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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현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무를 심는 일과 인재를 기르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 해볼 만한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육환 경이 척박했던 이곳 고성 땅에 철성중고등학교를 세우신, 당대 고성사회에서 걸출했던 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에게 감히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기회를 주신 철성고등학교동문회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그분을 회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재익 공(公)은 1892년 8월 20일 고성읍 동외리 489번지에서 아버지 김상홍(金相弘) 옹과 어머니 박승숙(朴昇淑) 여사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합니다. 김 공의 청소년기와 장년기 대부분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고 급기야는 나라를 빼앗겨 2천만 동포가 어둡고 긴긴 동면에서 헤어날 줄 모르던 때 김 공도 뜻있는 이들과 함께 만주로 가게 됩니다.
만주에서의 활동과 생활이 어떠했는지 더듬어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우나 국내의 사정이 여의치 못한 실정이었으므로 터를 잡기 위해 만주 이곳저곳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었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였다가 귀국했는데 일제강점기였기에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내가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가족들에게도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합니다.
신식학문에도 눈을 떠 인근 도시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불타올랐던 향학열을 달래느라고 밤이면 홀로 눈물도 많이 흘렸던 김 공은 이러한 자신의 아픔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결연한 의지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으며 일한 만큼 차츰 결실이 맺혀 갔습니다.
사실 김 공은 이재(利財)부문에도 상당히 눈이 밝아서 농업만이 유일한 생업이었던 시절에 일찍이 수산업으로 눈을 돌려 당시에는 연근해에서 조업을 해도 상당히 재미를 보았기에 한 번 해 볼만 한 일이라고 판단하고서는 과감히 수산업에 뛰어 듭니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인 어장주가 자신의 어장에서 일을 하는 김 공의 성실함과 강한 책임감에 반해 눈여겨 봐왔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 귀국하게 되자 김 공에게 후일을 기약하며 거저 맡기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 공의 성실 근면한 자세를 엿보게 하는 대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일에 임함에 있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실수나 실패가 끼어들 틈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신중하였으며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끝까지 돌봐주는 보스기질도 갖고 있어서 항상 사람이 따랐고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김 공의 사업에 참여하였으므로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갑니다.
그리하여 하는 일마다 좋은 결과가 나왔고 재산도 증식되어 거주하던 무학동의 집도 한옥으로 증개축하고 정미소도 운영하였으며 전답도 10여만 평가량을 소유하는 갑부소리를 듣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추석과 설 명절엔 못사는 이웃집마다 백미 한 말씩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며 이웃이 특별한 어려움을 당하여 쩔쩔 맬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기도 하여 김 공은 이웃에게도 모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946년 5월에 국민회(國民會) 고성군 지부장에 피선되어 해방 후의 어수선한 지역사회에서 리더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1956년 3월부터 통영군 산양어업협동조합장을 시작으로 전국 근어망조합장을 수년간 역임하였고 낙후된 지역민의 2세 교육을 위해 자신의 토지를 초등학교 건립에 기증합니다. 이 학교는 훗날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근무했던 곳입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웠던 1947년 9월 고성읍 기월리 143-1번지에 김 공은 자신의 옥답을 흔쾌히 내놓아 목조로 된 건물에 3개의 교실과 교무실을 건립하여 고성공민중학교를 개교토록 합니다. 1960년 10월에는 고성군축산업협동조합을 창설하고 그 업무에 필요한 건물과 토지를 일부 기증하였으며 고성군의 축산업 발전을 위해 초대조합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 뜻있는 고성유지들과 잦은 회합을 통해 육영사업에 대한 강력한 권고를 받게 됩니다.
당시 1963년도의 고성군내 전체 초등학교 졸업생은 3천200명인데 그 중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아동 수는 1천60여명에 불과하여 이것만 보더라도 고성읍내에 중등학교의 증설문제는 실로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습니다. 배움의 의욕은 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과 고성중학교, 고성여중학교에서 수용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1964년 1월 8일, 재성학원(載成學院) 설립을 마치고 그해 3월에 신입생을 모집하여 정식으로 문을 열고 학교명을 철성중학교로 명명합니다.
이 철성이란 이름은 일제시대 고성읍 덕선리에서 철성의숙(鐵城義熟)을 운영한 朴居洙(박거수)란 분이 있었는데 김 공이 자신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존경하고 동경한 인물이 바로 박거수 씨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닮고 싶고 그분의 인생행로와 일치하기를 원하는 습속이 있습니다. 김 공은 필생의 꿈인 육영(育英)사업을 펼치게 된 지금에 와서는 박거수 선생이 민족독립의 산실로 이끌어 온 철성의숙(鐵城義熟)의 「철성」이란 이름을 차용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철성은 고성의 옛 지명이기도 합니다. 학교의 이름조차 철성이라 명명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땅에 제2의「철성의숙」을 만들어 보겠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 공 당신께서 손수 만들어 세운 철성중학교의 제1회 졸업식도 보지 못한 채 66년 9월경에 갑작스레 쓰러져 돌아가시어 학교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45년이나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렇게 뜻 깊은 흉상을 제막하게 되었으니 김 공의 선행과 업적이 길이길이 기억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거룩한 일을 추진한 김석한 흉상건립추진위원장께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저를 포함한 여기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내가 만약 김 공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나는 과연 나의 전 재산을 쾌척하여 육영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만 해도 국가의 지원은 전무한 상태였고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있어 참으로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그 시절에 말입니다.
그것은 제2대 김기호, 제3대 노연현 이사장이 처한 사정도 모르긴 몰라도 아마 엇비슷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피땀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의 노후는 물론 아들딸을 위해 아깝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 놓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유재산이 공익을 위해 사용될 때 더욱 값있고 고귀해 지는 것입니다. 김 공은 노욕이 들 나이임에도 개의치 않고 교육입국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행동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철성고등학교동문회 여러분! 오늘을 계기로 하여 철성고등학교의 재단과 이사회, 동문회와 학부모,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고 협력하여 설립자의 고귀한 정신을 구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철성고등학교가 이 곳 고성 땅에서 명문학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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