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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인 선생, 재일학생단 비밀 조직 결성, 일제 항거… 고문 여독 33세로 순국

하기호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의 심재인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2월 25일
ⓒ 고성신문

참고 자료
부산경남 3.1운동사<사회법인 3.1동지회>
고성군지<고성군지편찬위원회 1995>
고성의 독립운동사<조현식 편저 1992>
경남항일독립운동참여자록<마산보훈지청편 2001>
대구지방법원판결문<1943. 5. 7>
고우회보 19면<1990>
대한민국 독립유공인문록<국가보훈처 2008. 12. 20>
대한민국 독립운동 포상자 명단 및 공적조서 내용<국가보훈처>
애국지사청송심공재인지묘비문



1. 일본의 상급학교에 진학



심재인(沈載仁) 공은 경남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 177번지에서 아버지 심수열(沈守烈) 공과 어머니 김돈선(金敦善) 여사와의 사이에서 1918년 10월 6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정의감이 남달리 뛰어났다.
1930년대 말경의 국내정세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열망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여 3.1 독립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발생으로 이어지고 그 후 국내외에서 학생들이 연쇄적으로 궐기한 고귀한 희생적 민족독립운동이 전개 되었던 시기였다.
1938년 심재인 공은 고성농업실수학교(固城農業實修學校)를 졸업하고 은사 이구희(李久喜) 선생의 지도와 주선으로 몇 몇 동료 학생들과 같이 일본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심재인 공은 일본 장기현(長崎顯) 소재 간조농업학교(諫早農業學校)에 진학하여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일본인 학생들의 심한 멸시와 민족적 차별에 대한 수모, 조국의 역사마저 단절당하고 우리 말과 글마저 빼앗긴 온갖 능멸을 당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우리도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재일고성학생독립운동의 기운이 돋아나고 있었다.


 


2. 독립을 되찾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경위



이렇게 결심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1943년(昭和 18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의 재판판결문에서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9년 11월에 심재인의 하숙집에 박근철(朴根澈), 이상만(李相晩), 이재관(李在官) 등이 모여 일본 학생인 사기행웅(寺埼行雄)에게 박근철이 구타까지 당하고 또는 ‘조선인(朝鮮人)이면서 건방지다’는 의미의 민족을 멸시하고 깔보는 질책을 듣고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하며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조선 사람이 이렇게 일본인에게 멸시당하고 있는 원인은 조선이 일본에 비하여 문화수준이 낮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때문에 일본 정부는 조선 사람에 대하여 교육을 시행하지 않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관청의 상석(上席)은 모두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고, 급료도 내지인(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의 배액을 지급하고 있으며 소학교(초등학교)도 내지인은 모두 입학시키고 있으나 한국인은 불과 몇 할 정도만 입학시키고 있으며, 졸업자의 취직도 한국인에 대하여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모든 영달도 불리하게 되어 있다.



세째, 이와 같은 차별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한국인이 분기하여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떠나 독립해야 된다고 각오하며 모든 것은 민족적으로 관찰함에 이르렀으며, 내가 사기(寺崎)로부터 구타당하여 하숙집에 돌아온 저녁 나와 심재인, 이상만의 3명이 사기의 부당성을 규탄하면서 조국을 가지고 싶은 자의 비애를 느껴 우리들은 실력을 양성하여 한국인의 독립을 도모하고자 협의 결정하여 차후 삼인정신(三人精神)이라 칭한다는 요지의 진술을 하였다.



넷째, 심재인으로부터 목하의 현상태로 한국민족의 실력으로서는 현시점에서 도저히 성공의 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실력양성과 동지규합(同志糾合) 분기의 시기에 대하여 토의 결정한 후 심재인의 제의에 대하여 배신자는 참(斬)도 불사하다고 맹세했다는 공술을 기재하고 있다.


 


3.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 이란 비밀 결사를 조직하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일명 지나사변)을 일으켜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함으로써 일본의 국력은 약화될 것임은 물론, 만약 세계대전으로 돌입하게 되면 일본은 패전할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이러한 시기를 택하여 독립운동의 거사를 실행하여 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심재인 공은 1940년 4월에 장기현 간조시에 간조농업학교의 신입생 자축회라는 모임을 가져서 심재인, 이상만, 박근철, 박응구(朴應九), 이재관, 이호(李虎), 김상훈(金相勳), 김민남(金敏男), 고연하(高蓮河), 정진근(鄭鎭根), 이상호(李相浩), 송병홍(宋炳虹), 손병주(孫柄柱) 등이 모여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이 삼삼인단(三三人團)의 점조직인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이라 이름짓고 이들의 자질을 향상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 하였다.



재일학생단은 이후 국내에서 조직활동에 들어가 8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각 지역에 조직망을 갖추고 일본의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갔다.
심재인 공은 1941년 간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우도궁고등농립학교(宇都宮農林學校)에 진학한 이후에도 일본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국내와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조국독립의 거사를 도모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1941년 5월 일부의 동지는 상급학교의 진학과 일본국내에서 활동을 위해 잔류하기로 하고 이상만은 곡물검사소 부산지소에 검사조수로 임명되어 귀국하였고, 동년 7월 28일 예천출장소로 전근이 되자 국내의 활동 본건지로 삼고, 이상호는 고성군농회에 기수로 취직되어 거점을 잡고, 이호는 함남 흥남비료공장에 취직하여 각자 거점을 잡아 국내에서 조직확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4. 경북예천에서 비밀조직이 발각되다



일본의 본부는 동경과 우도궁에 두어 심재인, 박응구, 김상만, 박근철, 이재관, 이상호, 정덕수(丁德秀) 등이 남아 국내와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엇으며, 일본에서는 동경에 있던 이재관의 하숙집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한편 우에노공원 등에서 밀회를 거듭하여 독립운동의 실행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2월 경북 예천에서 몇 몇 동지들이 밀회를 하고 있다가 심부름하는 아이의 실수로 조직문서를 떨어뜨려 당시 예천경찰서 고등계 한국인 형사(高松:고송)에게 발각되어 조직이 노출되면서 국내와 일본에 있는 동지들이 일망타진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어 80여명에 달하는 전원이 체포되어 경북 예천 등 각 경찰서 유치장을 메웠으며 일본경찰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해 8월 20여명은 불기소로 방면되었으나 40여명은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오랜 예심기간을 거친 후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언도를 받게 되었다.



심재인 공은 징역 4년형(최고형)을 언도받고 나머지 동지들은 징역 3년 또는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 등의 언도를 받았다.
이상만은 징역 3년의 언도를 받았으나 예심 구류중에 악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발병하여 25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채 1944년 1월 31일 순국하였다.


 


5. 8.15 해방 후 열혈투쟁의 등불은 꺼지다



심재인 공은 재일학생동지들 중에서 가장 많은 형량의 언도를 받았으며, 재일본 학생운동자 중에서는 중심인물로 지목되었다.
그 후 심재인 공은 갖은 고문과 심한 옥고를 치르던 중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으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50년 33세의 아까운 나이로 일기를 마쳤다.
이에 정부에서는 1990년 8.15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제91호)을 추서, 고인의 공훈을 기렸다.


 


6. 가족사항



심재인 공의 미망인 강분선 여사는 결혼 후 14년간의 결혼 생활 중 한 집에서 남편과 생활한 것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남편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3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내어 장남인 심진표(沈鎭杓)씨는 농촌새마을운동가로서 고성군 대가농협 조합장을 역임하고 경상남도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차남인 심의표(沈宜杓)씨는 KBS에 오랫동안 봉직하면서 KBS부산총국장과 본사의 7개 국장을 거쳐 KBS해설위원과 상임감사를 역임한 후 정년퇴임하여 현재는 대학에서 강의를 맡는 등 기업의 경영자, 고문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펴고 있다.
딸 심갑자(沈甲子)씨는 강성래(姜成來)씨와 결혼하여 가사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두 형제는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쳐온 어머니께 지극한 효도를 다하여 왔으나 2005년 2월 28일 향년 89세로 타계하였다.


 


7. 3부자가 국가의 훈장을 받다



심재인 공의 건국훈장에 이어 장남 진표씨는 지역사회개발공로로 새마을공로훈장 협동장을, 차남 의표씨는 민주화운동 유공으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각각 수여받아 일가(一家) 3부자(三父子)가 나란히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드문 일로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잇다.



심재인 공은 조국의 수난과 위기 앞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구국충정의 일념으로 젊음을 다바친 애국지사로서 그 애국정신은 후세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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