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일, 오늘은 92년전 일본제국주의 무단탄압에 항거한 우리민족의 대대적 독립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이 땅 살아가는 우리는 3.1운동의 독립정신을 되새겨 오늘과 내일을 향한 값진삶을 살아보자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역사는 바로 내 삶의 뿌리로써 오늘의 거울이요, 내일의 창이다. 지금 우리는 자원의 고갈과 세계화의 경제침체는 물론 호전격 북한과의 군사적 급박한 대치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는 뚜렷한 역사의식과 나 자신은 물론,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한 거시적 안목을 갖추어 오늘의 삶을 값지게 영위하자는 당위성이다. 그때 그토록 암울한 상황속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민족자결의 독립의지로 조국을 지켜온 내용을 알고자한다.
#삼일운동의 원인을 본다
1) 일본은 강제로 한국을 합방한 후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을 감행하여 우리 민족과 민족자본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므로 대일감정의 악화 및 민족적 자아의식이 싹터 배일사상이 강화된 점. 2)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니 즉, 약소민족의 당면문제 및 독립 등은 그 민족 자체가 해결해야 한다는 운동이었으니 이때를 맞아 조국을 잃은 한국인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3)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일본인의 독살이라는 유언(流言)이 퍼져 국내 인심에 큰 충격을 주었음.
#운동의 경과 관찰
1) 독립선언식 거행으로 손병희 이하 각계의 대표자 33인은 고종의 장례일을 맞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탑골 공원에서 수 많은 군중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으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일본정부에 독립통고문을 보내고, 윌슨에게 동양평화 의견서와, 파리강화 회의의 각국대표에게 우리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문을 전달했다.
2) 선언문의 내용은 일본위정자의 양심과 도의심에 호소하여 한국인에게 자유독립을 부여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만방에 여론을 일으켜서 열강의 원조를 요청했다. 이를 달성키 위해 국민들은 비폭력수단에 의한 투쟁을 전개 할 것을 선언하였음. 이 선언문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33인이 서명하였다.
3) 독립운동은 확대되어 전국의 농촌과 도시에 파급되고, 계급과 남녀를 막론하고 이 운동에 가담하니 2개월 동안 그 수가 50만명을 넘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하얼빈, 간도, 하와이, 도쿄 등 한국민이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만세운동과 비밀집회가 있었고, 특히 간도에서는 일본영사관을 습격까지 했다.
4) 일본헌병, 경찰, 군대들은 평화적시위에 임하는 민족에게 총칼로 탄압하고 수 많은 사람을 학살하였으며 무차별 감옥에 가두었다. #실패 원인
1) 밑에서부터 일어나는 거족적 운동을 조직화하지 못했다. 민족의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켰을 뿐, 운동을 영속화시키지 못했다.
2) 거대한 민중의 힘을 집결시키고 지도할 중추세력이 약했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반면에 그 방법이 무력을 수반하지 않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무저항 주의에 그친 것, 긴밀한 국제적 연결을 강구하지 못한 무계획적 운동 등으로 집약할수 있다.
#삼일운동 때의 희생자 수
1) 피살자 : 6천670명 2) 부상자 : 1만여명 3) 피검자 : 5만2천700명 4)일본인 사상자 : 166명 5) 관청파괴 : 159개소
#결과와 의의
1) 거족적 독립운동은 일본의 헌병, 경찰들의 총 뿌리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 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을 일으키는 토대가 되었다.
2) 일본으로 하여금 우리겨레의 독립적 단결력을 과시했고 각국인에게 한국민족에 대한 민족성을 새로이 각성케 했다.
3) 우리 민족의 거센 항거에 대해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문화정치를 행하게 했다.
#가치성
지도자들의 당쟁과 근시안적 통치 방식으로 국토와 국민을 일본에게 넘긴 엄청난 결과를 크게 반성하게 되었으며, 우리민족의 나라사랑과 그 실천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삼일정신을 오늘에 재조명하여 정치가, 학자, 국민 모두는 우리의 역사관을 새롭게 가져야 하겠다. 요즈음 북한의 무력도발 후 일본과의 군사협정 등은 신중을 기해야한다.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군을 한국전에 참전 시키자는 말을 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총을 북한이 아니라 일본군을 향해 쏠 것이라고 했다. 일본과 우리는 독도와 위안부, 징용자들 및 전후 배상문제 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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