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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여파 전국서 반혁명세력 규탄시위 격렬

고성민중 5천여명 7.29총선 투표함 88개 불살라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9월 03일

고성이구회, 4.19묘지서 7.29의거 50주년 기념식


 















▲ 정출도


고성신문 논설위원


지난 7월 29일 오후 서울 4.19민주묘지(

서울 수유리 소재)에서 이구회(회장 정출도) 주최로 ‘7.29 고성민중 반혁명세력 규탄의거 50주년 기념식’이 엄수되었다. 이구회란 1960년 7.29 고성민중 의거 당시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된 고성 출신 대학생 26명의 모임으로, 해마다 7월 29일이면 ‘반혁명세력 규탄의거’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 50주년기념식에는 찌는 듯한 불볕더위 속에서도 재경 회원 10명 가운데 9명(△권충웅 △김수복 △김윤열 △김재욱 △김화영 △이청수 △정출도 △진병언 △허종권=가나다 순)과 고성에서 상경한 1명(김상갑) 등 모두 10명이 참석했다(전국 생존 회원은 19명).



이날 행사는 △4.19 민주묘지 유영봉안소 참배 △‘7.29 고성민중 반혁명세력 규탄의거’ 자료집 헌정(유영봉안소의 185위 영정들 앞에) △4.19 민주묘지 참배 △4.19혁명기념탐 앞 단체 기념촬영 △4.19혁명기념관 방문 △7.29 고성민중 반혁명세력 규탄의거 50주년 성명서 낭독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6천800여 자의 긴 성명서 앞머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는 50년 전 봄날, 12년 이승만 독재를 뜨거운 젊은 피로써 무너뜨리고 이 땅에 정의와 민주의 금자탑을 우뚝 세운 청년학생 185위가 잠들어 있는 국립 4.19묘지입니다. 우리도 그대들과 같은 또래 같은 학년의 학생들로서 그대들이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피를 뿌려 독재를 타도한 지 약 100일 후 7.29총선에서 경남 고성 5천여 군민들과 함께 ‘자유당 잔재 반혁명세력 물러가라’고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른 26명의 이구회 회원들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우리들의 50년은 왜 엊그제만 같을까요? 그대들도 50년 전 경무대 앞 거리에서 이승만 독재가 쏜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우리와 같은 칠십 노인이 되어 손자들 손잡고 이 아름다운 산천을 즐기고 있겠지요. 4.19혁명 동지들이여! 우리 다함께 ‘4월학생혁명기념탑’ 비문을 다시 한 번 크게 낭독해 봅시다.”(비문을 선창·복창하다)


 


#4월학생혁명기념탑 비문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거한 수만 명의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이 성명서는 △2.28 대구 고등학생의 반정부 시위 △3.15 부정선거 항의 마산 1차 시위 △4.11 김주열 군 시체 발견 후 마산 2차 시위 △4.18 고대생 피습사건 △4.19 피의 화요일 서울 시민학생 대규모 유혈 반정부 시위 △4.25 대학교수단의 계엄 하 시가행진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이기붕 자유당 부통령 당선자 일가족 집단자살(4.28) △6.15 내각책임제 개헌안 통과 등 4.19학생혁명의 전후과정을 자세히 회고했다. 그리고 파렴치하게도 7.29총선에 재출마한 자유당 잔재 반혁명세력에 대한 전국적인 규탄시위를 자세히 소개했다.



성명서에 따르면 7.29총선에서 반혁명세력 규탄시위의 격화로 투표함이 소각되는 등 전국에서 13개 선거구의 개표가 중단되고 300여 명의 청년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신구파 간의 권력 다툼에만 몰두, 반민주 반혁명 잔재세력을 일소하는 혁명입법에 소홀했으며, 10여 년간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던 국가경제 재건에도 무능과 혼란을 거듭했다. 결국 집권 9개월 만에 5.16 군사 쿠데타로 비극적 종말을 고했다.



성명서는 끝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숨 막히는 권력 교체, 지역 갈등과 이념 대립의 피 튀기는 충돌 속에 피땀의 50년 세월이 흘러갔다”고 말하고 “그러나 4.19혁명 동지 친구들이여,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고통과 시련의 50년 속에 우리 민족은 지혜와 용기를 키웠고 그 결과 세계 10위권의 국력과 국격을 이루어냈음을 장하다고 평가하시라. 4.19혁명 동지들이여. 오늘밤 접동새 울음소리 들리면 슬픔을 거두시고 긴 단꿈을 청하시라”며 끝을 맺었다.



이날 7.29 고성민중의거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또 ‘7.29 고성민중 반혁명세력 규탄의거 50주년 보고서’*별첨 참조도 발표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고성 출신 대학생들의 반혁명 자유당 잔재 최석림 씨의 7.29총선 출마 규탄시위(7.23~7.30) △고성민중 5000여 명의 개표소 난입, 투표함 소각, 군청·경찰서 점거 사태(7.30) △시위 주동 대학생 26명 구속(7.31) △고성군민 5000여 명의 반혁명세력 규탄시위 및 구속학생 석방 촉구 결의문 채택(8.1) △고성군민 5천600여 명의 구속학생 석방 진정서(8.3) 및 탄원서(8.20) 제출 △구속학생 1심(11.10) 2심(1961.2.7) 재판 결과와 사건 배경 등이다.



고성이구회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순서는 부산지법 판결문 명단 순서)
△김화영 △김윤열 △김종욱 △김수복 △윤보현(고인) △배상열 △권충웅 △신장효 △서정동(고인) △정출도 △김재욱 △허종권 △진영준(고인) △한영우(고인) △서형을(고인) △진병언 △이청수 △진진규 △김정수 △김태근 △박병화(고인) △김상갑 △장숙례 △박기선 △강종형 △한준현(고인) 등 26명.


 


 


7.29 고성민중 반혁명세력 규탄의거 50주년 보고서


 


△1960년 2.8 대구 고등학생 데모 △3.15 부정선거 마산 유혈항의시위 △4.11 마산 앞바다 김주열 군 시체 발견 △4.18 고려대생에 대한 자유당 깡패 집단습격 △4.19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유혈시위 △4.25 서울시내 주요 대학 교수단의 계엄령 하 시위 감행 △4.26 전국 대도시의 이승만 하야 촉구 시위 등 약 80일간에 무려 185명의 학생 시민들이 목숨을 바친 피의 힘으로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12년 독재는 끝내 무너졌다.



3.15 부정선거의 원흉 이기붕 자유당 부통령 당선자는 경무대 피신 중에 4월 28일 가족집단자살을 했고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승만 대통령도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긴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5.29)을 떠났다. 5월 1일 허정 수반이 이끄는 과도정부는 3.15정·부통령선거를 공식으로 무효화하고, 국회는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6월 27일 정부는 새 헌법에 따라 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를 7월 29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전국서 자유당 잔재 출마 규탄 시위 확산



그러나 7월 2일 국회의원 입후보자 등록 마감 결과 자유당 부패독재와 부정선거에 책임이 큰 반혁명 자유당 잔재세력들이 곳곳에서 출마하여 국민들을 크게 분노하게 하였다. 천안, 예산, 광주, 군산, 창원, 삼천포, 창녕, 함안, 합천, 진양, 의령, 밀양, 남해 등 전국 곳곳에서 ‘반혁명세력 규탄대회’가 잇따랐고, 우리 고향 고성에서도 민의원 후보로 등록한 자유당 3.15부정선거 지역 총책 최석림 씨에 대한 규탄 여론이 폭발했다. 민·참의원 후보 마감일 직전인 7월 1일 고성 장날을 계기로 고성 청장년 30~40명이 모여 “반혁명 분자 최석림은 반성하고 후보를 사퇴하라”는 규탄 성명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쳤다.



4대 민의원이었던 최석림 씨는 자유당 2인자 이기붕 씨를 ‘아부지’라고 부르면서 아부하고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씨와 친교를 맺어 고성군 행정 치안 공무원들을 부하처럼 좌지우지했다. “면사무소 급사까지 최석림 씨 계열이 싹쓸이했다”는 등 최석림 비판 여론은 격렬했다. 참고로 7.29 반혁명세력 규탄 고성민중 의거로 26명의 대학생들이 구속되자 8월 1일(고성 장날) 고성군민 5천여명이 궐기하여 구속 학생 석방을 촉구하는 진정서와 탄원서를 사직 당국에 잇달아 제출하였는데, 그 탄원서 내용에는 최석림 씨의 반민주적 비행과 부도덕성이 생생하게 고발되어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에 최석림 씨가 당선된 것도 자유당 정권의 고성판 독재의 결과입니다. 최씨는 ‘서대문 경무대’ 주인공 이기붕에게 아부하여 ‘아부지’라고 부르면서 추종하고,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와도 사교를 맺어 각급 경찰관서를 임의 남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최석림의 말이라면 산천초목이 경동할 정도로 권세가 충천하였습니다. 5.2 4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된 것도 최 씨의 음모와 지령에 따라 이루어진 ‘관건선거’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3.15 부정선거 지역총책’ 최석림 씨 축출 대상 제1호



“최석림 씨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제반 군 행정에 깊이 개입하였고 특히 그의 부친 최낙권(崔洛權) 씨는 ‘대원군’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사실상 고성군 국회의원 행세를 하면서 군수로부터 동회장, 동서기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등 무소불위의 특권자 행세를 자행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당이나 최 씨 일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군민들을 각종 죄목으로 감옥에 몰아넣어 최석림의 의정생활 2년 동안에 우리 군민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지냈습니다. 저 유명한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시에는 최석림 씨가 자유당 군당위원장으로서 경찰권을 총지휘하여 6만 고성 유권자를 함구불언케 하고 투표인지 조작인지 국내 최고 득표율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7월 23일 김화영 등 고성 출신 대학생 26명은 고성읍 쌀시장에서 ‘반혁명세력 규탄 학생궐기대회’를 열고 “최석림 씨는 반성하고 입후보를 사퇴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고성읍내를 행진하였다. 고등학생과 청년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순식간에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시위대는 고성읍 동외동 최석림 후보 선거사무소 앞에 연좌하여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석림 후보는 고성군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조직력과 자금력을 과시하며 선거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다.
 
#“최석림 물러가라” 학생들 단식투쟁하다 잇따라 쓰러져



학생시위대는 단식을 시작했다. 7월 말 더위에 학생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고성군민들이 드디어 동요하기 시작했다. 주부들이 죽을 쑤어 탈진 학생들을 구호하고 몇몇 병원에서는 무료 구호 작업에 나섰다. 읍내 유지 인사들도 들고 일어났다. “최석림을 잡으러 가자” “최석림 운동원부터 잡아들이자”



읍내 청년들이 최석림 운동원들을 하나둘씩 잡아왔다. 학생시위대들은 최석림 운동원들에게 최석림의 행방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학생데모 시작 3일째인 7월 25일 경이었다. 드디어 학생들은 트럭 몇 대에 나누어 타고 고성군내를 다니면서 마이크로 최석림 규탄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최석림 후보의 플래카드며 입간판은 보이는 대로 철거되었다. 최석림 지지 유권자들과 즉석 토론회도 가졌다.



7월 25일 오후에는 최석림 씨의 부친 최낙권 씨(일명 대원군)와 최 씨의 동생 최학림 씨가 데모대에 붙잡혀 최석림 씨의 행방을 추궁당했다.
그리고 투표일인 7월 29일이 되었다. 심신이 피로해진 학생시위대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 짧은 휴식을 취했다. 투표는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7월 29일 밤 9시 경부터 군청 2층 개표소에서 개표 작업이 시작되었다. 개표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자유당 후보 최석림의 리드였다. 다음날 7월 30일 아침 군청 주변에는 군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숫자는 3천여명에 이르렀다. 오전 10시경 최석림의 득표수가 차점자인 김종빈 후보(민주당)보다 500여표 앞서기 시작했다. 개표는 막바지에 들어섰고 나머지 투표함은 최석림 씨 지지표가 많은 하일면, 하이면 투표함이었다.
 
#최 씨 표 앞서자 5천여 고성민중 분노 폭발, 개표소 난입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또 최석림이가 부정선거를 했다” “돈 뿌리고 술 사주고 매표했다” “학생들이 나서라” “개표를 중단시켜라”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정적인 것은 타 후보의 표가 최석림의 표로 섞여 들어가는 혼표 사태가 있었다는 소문이 군중들에게 퍼진 것이다. 학생 3~4명이 “개표소로 들어가자”고 외치면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넘어갔다. 200여명의 경비 경찰(학사 경찰)들이 그 학생들을 구타하면서 연행하려 했다. 군중들 속에서 돌멩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구출하자” “학생들을 때리지 말라” 군중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돌 소나기가 경비 경찰들에게 퍼부어졌다. 학생들과 청년들이 바리케이드를 밀어제치고 물밀듯이 군청을 향해 달려갔고 경찰들은 황급히 퇴각했다. 곧 이어서 투표함들이 군청 2층 개표소 창문을 통해 마당으로 내던져졌고 박살이 난 투표함들은 곧 화염에 휩싸였다. 민의원 선거 투표함 44개, 참의원 투표함 44개가 모두 불타버렸다. 이처럼 청년학생들의 반혁명세력 규탄시위 격화로 전국 13개 선거구에서 개표가 중단되었고 경상남도만 하더라도 삼천포(9개), 창녕(62개), 밀양갑(4개), 고성(88개), 산청(52개)에서 투표함이 다량 소각되었다.



성난 고성 군중들은 군청은 물론이고 옆 건물인 경찰서까지 밀고 들어갔다. 집기가 부서지고 창문들이 박살났다. 경찰들은 이미 십리쯤 도망쳐버렸다.
거의 하루 낮 동안 고성읍은 해방구가 되었다. 최석림의 부친과 동생이 데모대 앞에서 플래카드(최석림을 규탄하는 내용)를 들고 고성읍내를 행진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경찰서장(김동우)은 학생대표(김화영)에게 “반혁명세력 척결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하고, 군선거관리위원장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시위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데모 학생들도 당황했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고성군민들의 분노가 이렇게 격렬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곧 질서 회복에 나섰다. 군청과 경찰서의 부서진 집기들을 청소하고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군 당국자와 경찰서 책임자들에게 사과했다. 치안 유지에도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속학생 부산형무소서 또 1주일간 단식투쟁



그날(7월 30일) 저녁 고성경찰서 신임 서장(이거락)이 학생 대표들을 서장실로 초청했다. 20여명의 학생들이 서장실을 방문했을 때 서장 옆에는 부산지검 검사 1명도 앉아 있었다. 대화는 “치안 유지에 학생들이 적극 협조하겠다” “최석림 같은 반혁명 분자는 반드시 축출되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의 목적은 4.19 학생혁명 과업을 고성 사회에서도 완수하자는 것이다” 등등 학생 데모와 군중 시위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주스가 여러 차례 나오면서 시간은 밤 12시가 가까워졌다. 경찰서장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고 말했다. 학생들은 일어섰다. 2층 서장실을 나와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복도에는 뜻밖에도 전투복 차림의 경찰들이 양쪽으로 줄을 서서 차렷 자세로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앞쪽에서 찰칵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에게 수갑을 채우는 소리였다. 우리는 구속된 것이다. 경찰서 뒷마당에는 경찰 버스가 한 대 서 있었다. 우리 학생들을 전투경찰 두 명씩이 팔짱을 끼고 버스 좌석에 앉혔다. 버스는 조용히 고성읍을 빠져나가 세 시간 후에 부산형무소 정문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부산형무소 미결수 감방에 분산 수감되었다. 우리의 투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단식을 시작했다. 일주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우리의 의식은 더욱 명료해졌다. “허정 과도정부도 민주당 정권도 4.19 학생혁명정신을 배신했다. 4.19 학생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생들이 더 투쟁하고 더 희생해야 한다.”



#고성군민 5천여 명 반혁명세력 규탄 궐기대회



여름 더위 속에서의 단식 데모, 그리고 옥중 단식 투쟁으로 우리 학생들의 건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병동 신세를 지는 학생들이 잇따라 생겼다.
우리가 구속된 지 하루 만인 8월 1일 고성 장날. 고성읍내에서 5천여 명의 고성군민이 모여 구속학생 석방촉구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반혁명세력을 규탄하고 최석림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문’도 채택됐다. 구속학생석방대책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어머니들은 “내 자식이 무슨 죄냐” 고성 여중고 학생들은 “오빠들을 석방하라”며 경찰서 앞에서 연좌단식농성을 시작했다. 8월 3일에는 군민대표 진정서가, 8월 20일에는 탄원서(김용태 고성교육감 등 고성군민 5천600여 명이 서명)가 사직 당국에 잇따라 전달되었다. 고성군선거관리위원회는 “구속학생 석방 전에는 일부 재선거도 실시하기 어렵다”며 학생석방을 촉구했다. 김용태 고성교육감을 비롯한 군내 기관단체 대표들이 서명하고 구속학생 김화영의 부친 김원대 씨가 문안을 작성한 탄원서 내용을 읽어보면(위에서 일부 인용) 자유당잔재 반혁명세력인 최석림 씨에 대한 고성군민들의 반감과 증오가 얼마나 크고 뿌리 깊은지 실감할 수 있다.



우리가 구속된 지 100일 만인 11월 10일 부산지방법원 형사부(재판장 이명섭)는 우리들에 대해 1심 판결을 내렸다. 죄목은 국회의원선거법 위반·공무집행방해치상·소요죄 등이었다. 김태근(일명 춘랑) 박병화 등 2명에게는 학생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이유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김화영·김윤열·윤보현·배상열·권충웅·신장효·정출도·김재욱·한영우·서형을·진병언·이청수·진진규·김정수·장숙례(여자) 등 15명에 대해서는 1년 6개월 징역에 2년간 집행유예, 김종욱에게는 6개월 징역에 1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리고 허종권·김상갑·김수복·박기선 등 4명에게는 선고유예, 서정동·진영준·강종형·한준현 등 4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우리는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하였고, 대구고등법원 형사제1부(재판장 윤병칠)는 1961년 2월 7일 판결에서 김태근·박병화에 대해서도 2년간 집행유예를 선고, 신병을 석방하는 한편, 나머지 항소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대법원에도 상고했으나 5.16 군사혁명이 발발하자 스스로 소를 취하했다.)
 
#1심 판결문 “고성학생시위는 4월 혁명과업 완수 성격”



3명의 판사가 참여한 부산지법 1심 재판부는 판결 이유 후반부의 정상 참작 부분에서 고성 데모 학생들의 범법 동기가 ‘최석림과 같은 반혁명세력에 대한 규탄’과 ‘4.19혁명정신 완수’에 있음을 인정한다고 명시하여 역사적인 명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심 판결 이유 중 정상참작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건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 김화영·김윤열·윤보현·배상열·권충웅·신장효·정출도·김재욱·김종욱·한영우·서형을·진병언·이청수·진진규·김정수·김태근·박병화·장숙례·박기선(허종권·김상갑·김수복·서정동·진영준·강종형·한준현 등 7명은 선고유예 및 무죄-필자 주) 등은 제4대 민의원 의원인 최석림(崔奭林)이 자유당 열성당원으로서 고성군민들에 대한 그의 민폐가 극심하였을 뿐 아니라 3.15정부통령 부정선거 시에는 마산, 충무, 고성 등지의 부정선거 총지휘자로서 활약한 바 있는 소위 반혁명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자숙함이 없이 새 공화국의 첫 민의원 의원을 선출하는 7.29 선거에 다시 입후보를 하자 당시 정부(허정 과도정부)에서는 동 최석림과 같은 반혁명세력의 입후보를 억제하고 규탄할 수 있는 하등의 입법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여서 상기 피고인들은 특정 개인이나 어느 지방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4월 혁명 과업의 완수라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동 최석림의 입후보 사퇴를 권유하고 그 당선을 저지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60년 7월 23일에는 고성읍민 약 5천 여명이 운집하여 ‘반혁명세력규탄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동읍 각계의 고위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투쟁준비위원회도 결성하여 상기 피고인들이 조직한 ‘반혁명세력규탄 학생데모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사실도 있다. 또 본건 소요범죄 등의 시기가 4월혁명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과도기라는 사실, 또 본건 소요범행 직전까지도 상기 피고인들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상기 최석림의 민의원 후보를 사퇴시키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특히 1960년 7월 30일 개표일 아침에 상기 피고인들 주위에 운집하여 개표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약 3천 여명의 군중들이 모두 흥분하여 “최석림이가 또 매표행위 등 부정선거를 했다” “학생들이 앞장서라” “해치워라”고 하는 등 고함을 지르면서 상기 피고인들을 선동하였고, 그때 마침 개표소(고성군청 2층) 안에서는 다른 민의원 입후보자의 득표수가 최석림의 득표수에 산입되는 혼표사건까지 있었다는 소문이 군중들에게 전달되면서 군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거기에다 군중들의 소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배치되었던 경찰관들(약 200여명)이 3~4명의 동료학생들을 구타 연행하는 등 난폭한 상황이 목격되자 이에 격분한 피고인들이 범행을 하게 된 사실들을 인정할 수 있다.”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9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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