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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선 산에 마음 기대고 바다에 영혼 맡기면

현대수필가 100인선-김열규(고성신문 논설위원)
글=김열규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8월 21일












     ▲ 김열규


고성신문 논설위원


# 자란만 내다보며


 


중치고개, 그 달막재에 서면



“아, 자란아! 아, 자란아!”
중치고개에서 자란만을 내다보면 오직 탄성이 나올 뿐이다. 한숨 섞인 탄성, 그 다음은 침묵이다.
절경이니 가경佳境이니 해보아야 오히려 싱겁다.



그 순간 스스로의 감각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저 장려한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시각이 못미덥고 바람결이 스쳐 지나가는 촉감도 그저 긴가민가할 뿐이다. 장엄한 대자연에 깃들인 절대의 정적은 이미 청각을 넘어서 있다.
“이게 정말일까? 내가 이 경관을 보고 있다는 게!”



그리곤 이내 멍해진다. 뭔가를 보고 있는 것이 이토록 완벽하게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니!
눈 가진 보람! 눈 가지고 뭔가를 본다는 보람!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중얼댄다. 누구에게? 뭣에게? 다름 아니고 대자연에게, 자연의 섭리에게 고개 숙인다. 자란만은 한바다다. 하지만 남으로는 통영 미륵산이 동으로는 사량도가 동그마하게 멀리로 감싸고 있어서 내해內海라는 인상도 풍기고 있다. 그러나 정남으로는 수평선이 아스라하게 틔어 있기에 역시 한바다의 품위는 갖출 대로는 갖추었다. 그래서 자란만은 아늑한 한바다, 고스란한 대양이다.



달막재라고도 하는 중치고개! 달이 어둔 밤하늘을 혼자 가다가 지쳐서는 이 고개 턱을 움막삼아서 쉬었다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달막재!
그 마루터기에 서면 가까이는 삼산과 하일면의 해안선이, 중간으로는 그만그만한 섬들이, 멀리로는 통영 욕지섬이 마주보이고 바른편으로는 사량도가 눈에 든다.



작은 섬들은 사뭇 귀엽고 앙증맞다. 갖가지 맵시, 여러 가지 모양새의 섬들이 떠 있다. 아기자기, 옹기종기 하고 많은 섬들이 보인다.
등줄기를 심지 돋우듯 하고 있는 것, 고개 숙이고는 고즈넉하게 엎드린 것, 팔다리 뻗고는 편하게 누운 것, 제각각으로 멋부릴 대로는 부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졸고 있는 것, 곁에서 기지개 켜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그 모양새는 여간 다양한 게 아니다. 크고 작기가 서로 다르다. 높낮이는 들쭉날쭉 변화무쌍이다. 그러니 맵시가 서로 넘나들고 빛도 이랬다저랬다 한다. 머리 둔 방위가 어긋나면서 서로 등지기도 한다.



한데도 전체가 여간 잘 어우러져 보이는 게 아니다. 하나하나 따로 보면 아무래도 깜냥깜냥이 서로 다르다. 다들 제 분수지킬 만큼 지키고, 제 멋 부릴 대로는 부리고 있다. 제 깜냥대로 모양 짓고 있다. 하지만 그 소갈머리가 결코 좁지는 않다. 서로 친구하고 서로 슬겁기가 한량없다. 통이 크고 알이 배었다.



서로 다름이 협찬의 터전이란 것, 변화가 조화의 기틀이란 것을 자란만의 섬들은 일러주고 있다. 서로 달라서 서로 같아질 필요가 있다고, 서로 달라야만 어우러진 전체가 비로소 아름답다고, 저들 바다에 누운 섬들은 말하고 있다.



다들 말이 많아야 필경 쓸 만한 말이 빚어지는 것쯤이야 저 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얼룩지고 엇갈리고 하면서 맞잡는 손길이라야 비로소 훈김이 돈다는 것도 그들은 알 고 있으리라….
자란만 섬들로서는 그 변이變異의 폭만큼 화합의 폭도 크고 넓다.



그러나 그들 맵시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모를까, 노상 밋밋한 게 바다다. 파도가 더러 오도깝스럽기는 해도 그래 보아야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바다의 어떤 소망이 저들 섬에는 깃들어 있을 것 같다.



바다가 물살 치면서 여러 가지로 조형造型을 했지만 아무래도 신이 차질 않았을까? 너울대고 출렁대는 저들 파도보다 한층 두드러진 형상形象을 구해 본 걸까? 아무래도 파도로는 형태를 짓긴 하지만 순간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쉬웠을까?



그런 고심 끝에 궁리궁리해서는 또 솜씨 있는 대로 부려서는 파도가 빚어서 굳혀 놓은 것이 저들 섬일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저 섬들의 무리가 갖는 다양한 형상들은 조물주가 바다의 판넬에다 펼쳐 놓은 조각의 전시장일지도 모른다.



햇발 싱그러운 날에는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운동회를 벌일 것 같아 보인다. 흐린 날이나 안개 짙은 날이면 좌선坐禪도 하고 묵상에 잠기기도 한다. 맑은 날, 황혼 무렵이면 붉은 노을에 지펴서는 미소를 짓는 그들, 보는 이 마음도 연분홍으로 곱게 물이 든다.



섬들은 바다에 뜬 다양함이고 변화다. 그 섬 내다보면서 중치고갯마루에 서는 것, 그건 온전하게 딴 세상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승 고갯마루에 서서는 피언을 누리는 것이다.


 


동화리 해변, 그 천연의 암각 미술관에서



하일면의 소을비포 성이 근사하게 재건되었다. 조선조의 수군의 기지 하나가 고성뿐만이 아니라 남해안의 명물로 덩그렇게 살아났다. 여간 기분 좋지 않다.
한데 내친김에 성과 그 둘레의 마을을 지나서 동남쪽으로 바다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치자. 개울둑과 논두렁 길을 밟고, 한 십 분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선다.



솔밭 새로 바다가 넘겨다보인다. 널따란 해협 너머로 사량도가 소슬하다. 높진 않아도 옹기종기 이어진 산봉우리들의 맵시가 곱다랗다. 그 원경遠景의 반김을 받으면서 꼬불꼬불 벼룻길을 내려서면 이내 물가에 선다.
크고 작은 몽돌(조약돌)이 듬성듬성 깔린 모래톱을 조금만 걷다보면, 바른편 산기슭 쪽으로 길게 늘어 선 바위 벼랑을 만난다. 누가 쌓다 만 성벽일까? 반 마장은 되게 연이어져 있다.



암벽岩壁의 전체 모양도 모양이지만 그 세부가 놀랍다. 움푹움푹 패이고 불쑥불쑥 솟은 기 기복起伏은 만물상을 연출해 보인다. 거기 더해서는 각기 줄무늬의 모양과 색조를 달리하는 층層과 층이 겹쳐서는 거대한 벽화壁畵를 그려내고 있다.



자상하게 모르긴 해도 수천만 년, 아니 그보다 더하게 몇억 년이 걸렸을 것 같다. 그 까마득한 세월이 너울과 바람을 부려서는 파고 후비고 깎고 또 다듬고 하였을 것이다.



가까이 붙어 서서는 찬찬히 매만지고 더듬고 한다. 그 촉감을 즐긴다. 지긋하게 누르면 촉촉하게 염분 머금은 물기가 묻어나는 것 같다가도 슬며시 손바닥이 스치면 따끔거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위아래로 훑을 때의 촉감이 다르고 옆으로 문지를 때의 촉감이  또한 다르다. 피부로 느끼는 감촉인데도 그야말로 형형색색이다.



그 아릿한 느낌들에 끌려서는 배와 가슴을 갖다 대고는 양팔을 벌린다. 머리를 갖다 붙이고는 코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전신에 스며드는 바위 벼랑의 체감體感에 흠뻑 취한다.
어느 누구와의 악수가 이랬을까? 누구와의 포옹이 또 이 같았을까?



‘아!’
절로 토하는 한숨, 눈이 절로 지긋하게 감긴다. 살며시 이마를 바위에 대고는 비빈다. 아기들처럼 도래, 도래, 도래질을 한다. 바위를 스치던 바람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한참을 그렇게 무아지경에 젖어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바위벽이 살짝 밀어 주는 그 기척! 나도 그냥 떠나지는 않는다. 손바닥으로 그의 앙가슴을 토닥거린다.



발걸음이 우둘투둘한 바위너설을 밟는데도 사뭇 가볍다. 이내 널따란 암반岩盤에 올라선다. 인공위성이 찍어낸 화성의 지표 모양 그대로가 펼쳐 있다. 이제 갓 인공위성을 내려서서는 화성을 걷고 있는 듯이 신비함에 젖게 된다. 온통 울툭불툭, 기복이 절묘하다. 그 새로 더러 더러 게가 눈에 띈다. 저만큼, 재빠르게 단거리 경주를 하고 있는 녀석 이쪽으로는 느릿느릿 산책하는 녀석이 보인다. 아마도 그들 눈에는 이곳 암반의 기복은 종횡으로 얽혀서 솟은 태산준령 같아 보일게 아닌지 모르겠다.



산책하는 게와 나란히 또 다시 발을 옮긴다. 이내 화성을 벗어난다.
또 다시 바위 벼랑을 만난다. 소나무 우거진 비탈로, 쇠톱으로 일부러 깎아낸 듯하는 절벽이 줄줄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꺾이고 굽이치고 하는 그 형세는 매우 역동적이다. 근처에 무수한 발자국 화석을 남긴 바로 그 거대한 공룡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인다.



놀란 가슴을 달래면서 더 안으로 들어서면 이젠 바닥에 깔린 널따란 바위 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직선, 사선斜線, 나선螺線에 또 점선點線 등등, 별의별 줄무늬가 거기 새겨져 있다. 높낮이도 각각으로 그 바위 선문線紋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엘스워드 켈리의 추상화 한 폭이다. 아니 조형물일까?



네모로, 마름모로, 동그라미로 또는 타원으로 아니면 소용돌이로 줄이 그어져서는 구획된 각각의 그 공간들! 그 다양한 모양새의 도형들의 공간!
제각기 제 모습 뽐내면서도 이웃과 손잡고 가슴 열어젖힌 그 조화며 해조諧調의 아름다움이 굳이 저 단단한 바위 판에 새겨져 있다니! 그래선가? 암반 전체에 칠해진, 회백색의 그 색조가 여간 부드러운 게 아니다.



그들 한복판에 펄썩 주저 앉는다. 두 다리 길게 뻗고 두 팔 어깨너머로 가누며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편안하다. 가을이면 바위 온기가 엉덩이에서 허리로 또 어깨까지 번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소금기 머금은 서늘한 해풍이 설레고 든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새삼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귀에 든다. 그래서 온 사방의 고요와 침묵을 거든다. 나는 그 철썩이는 묵상默想에 묻혀서 잠긴 작은, 단단한 소라고둥이 된다.



여기까지가 한 고비다. 나의 미술관 순례는 이제 바야흐로 마무리의 고비에 들어선다. 산비탈이 바다로 쑥 내민 끝, 그 안존한 곶을 따라 가서는 물가에 선다.
나는 거듭 우주인이 된다. 화성 지표地表의 무늬가 그대로 찍힌 또 다른 바위 판에 들어선다. 나의 걸음은 절로 타박, 터벅 우주인의 것을 닮는다. 수평선이 우주 저 너머로 아스라하게 열리고 나는 두 팔을 한껏 벌린다.



나의 미술관 순례는 그래서 우주여행으로 마감한다. 촘촘히 별들이 늘어선 창공 저 너머, 무한 저 너머의 창공을 향해서 가슴도 부푼다.


 


고성땅 지방도로 1010; 천하의 명당, 명소로 가는 길



우리가 경이驚異에 눈 뜨는 그만큼, 길이 열린다. 세상도 따라 열린다. 그러면서 우리들 스스로가 묵은 껍질을 벗는다.
놀라움이 없다면 삶은 그리고 세상은 어떻게 될까? 시효가 지난 공문서의 찌든 봉투와 닮은꼴이 될 게 뻔하다.
경탄과 구함, 그 둘이 빠지면 우리 인생은 그리고 우리 사는 세상은 이가 몽땅 다 빠진 입이나 잇몸과 다를 게 없다. 그렇듯이 길에서 그 둘이 빠지면 길이 자격 상실을 하게 된다는 것을 1010은 일러준다.



그 중에서도 소을비포의 깊은 안자락, 세상에서 영영 돌아앉은 몽돌밭은 정말이지 천지간의 가장 큰 경탄이고 또 감탄이다.
소을비포 지나서 갯벌 따라서, 개울 끼고 논둑 새를 누벼서 반마장쯤 가서 겨우 다다르는 그 언덕에 서는 것만으로도 경탄이 작열灼熱한다.
사량도 마주보는 그 통쾌한 전망!, 굽이지면서 돌아가고 있는 물 깃의 아기자기한 정경!



보는 이는 다만 놀랄 뿐이다. ‘아!’ 소리, 그 이상 아무 말도 못한다.
한데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서면, 또 다른 신천지다. 세상에서부터 눈에 안 보이는 베일로 단단히 덮어서 가린 비경이다.
대자연의 경이가 외경畏敬스럽다는 것을 절감할 것이다.
무선 秘典인가 싶어진다. 마음 여미고 고개 깊이깊이 숙이게 된다.
정경과 전망만은 아니다. 또 다른, 보다 더 가슴 설레는 경탄과 놀라움은 거기, 그들 바위 때문이고 돌 때문이다.



언덕 기슭에 줄지어 서 있는 석벽은 보는 이에게 더 크게 더 활짝 눈 뜨라고 속삭인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재촉한다.
비로소 개안開眼하듯, 눈동자 열라고 권하다.
세상 태어난 보람, 자연을 보는 복됨이 비로소 간절해지고 또 절실해지는, 눈뜸, 바로 그 개안을 여기서 하게 된다. 그러면서 ‘개안’이야말로 진실에 눈뜨고 깨달음으로 마음 열리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경이를 반가운 손님 맞듯 하면, 우리는 누구나 심청의 아버지가 된다.



말 없을 돌이, 그리고 침묵의 석물이 그런다니 더 놀라운 일이다. 바위 덩치가, 돌멩이가, 돌바닥이 그렇게 한다니 기가 찰 일이다. 김수동의 거짓말 같다.
더러는 우뚝 서 있다. 더러는 웅크리고 있다. 아니면 꿈틀대고 있다. 용솟음하는 것도 있다. 어느 것은 파도와 희롱하면서 우쭐대기도 한다. 변화무쌍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걸친, 바위 조형의 어마어마한 미술관이다.
몽돌 밭의 해안선, 근 한 마장이 온통 석물 전시장이다.
바위 조형만 그런 게 아니다. 널따란 바위 바닥으리 기하학인 ‘선문線紋의 만다라’는 또 어떻고! 그 점묘點描의 묘妙는 또한 오죽하고!
도형의 아름다움, 선화線畵의 매력, 점찍기의 매혹魅惑이 바위너설과 납작 바위에 얼룩지고 아로새겨져 있다.



몽드리안의 선묘線描!
대원군의 난초의 선!
한석봉의 필치!
‘포인트링’이라 일컫기도 하는 미국 현대 화가들의 점박기!
모딜리아니가 그려낸 여인의 길둥그런 목의 선!
남녀의 에로스를 서로 붙안고는 하늘 나는 남녀의 육신의 동선動線으로 그려낸 샤갈의 화폭!
언제 그들이 여기 와서 작업하는 행운을 누린 걸까?
뿐만 아니다. 출렁이는 파도, 바람 따라서 잔나뭇가지들이 연출하는 설렘, 창공에 뜬 학의 날갯짓! 실구름의 물살!



단순한 추상이 있는 바로 곁에는 다양한 구상 도형이 새겨져 있다. 삼각, 사각의 장난치는 듯한 얼룩무늬 곁에는 원과 나선螺線으로 얽히고 설킨 복합 문양들이 회돌이를 치고 있다.



바람이 그리고 물살이 무슨 재주로 이 돌과 바위의 화판들에 선의 무늬를 각인한 걸까?
나는 이 위대한 놀라움을 오랜 친구 찾듯 한다. 그때마다 그들은 내게 새로운 경탄이 되곤 한다.



물때 따라서, 밀고 나고 오르고 내리는 조수 따라서 그들은 변모한다. 그들은 자주 자주 화장과 치장을 바꾼다. 그게 심해지면 변신술을 부리고 둔갑내기도 한다.
파도가 몰고 오는 습도에 의해서 음영을 달리한다. 농담濃淡도 물론 달라진다. 이끼가 끼고 거기 햇살이 얼룩대면 조형은 문득 색동옷을 입기도 한다.



해돋이에서는 기지개를 켜다가도 황혼이 깃들면 명상의 무게를 더한다. 그에 장단맞추어서는 바람이 음악처럼 장조에서 단조로 바꾸어지기도 한다.
그러자니 이곳 경탄의 석상들은 또 석문은 필경 동영상을 겸한다.



누구든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판타지아’를 연상할 것이다. 선과 점과 형태가 그리고 색상이 서로 물고는 수시로 바뀌어지는, 그 일대 변괴變怪와 환상의 영상이 바위로 조형되고 돌 무늬로 구현되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동화리, 나의 ‘천연 석물 미술관’을 다녀올 적마다, 화사한 꿈에서 갓 깨어난 열락을 누리곤 한다.
그리고는 ‘꿈이여 다시 또 한 번!’
고쳐 꿈을 볼 날을, ‘지방도로 1010’에 대고는 빌고 또 빈다. 그 장땡의 길에 대고 빈다.


 

글=김열규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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