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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력도 돈도 기술도 없는 三無人生 가족·친구·고향 사랑, 그 힘으로 성공했다”

신대도 재경고성향우회 전 회장의 인생드라마
글=정출도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8월 21일
ⓒ 고성신문

유년시절 미움받지 않는 귀여운 악동
군대생활 3년 인생배워, 국방대학 역할
부산시내 바다장어 공급… 전국 확산 대박
‘서울서 실패하면 내 인생 끝장’ 각오 다져
재경향우회 한마당 축제, ‘마을회치’ 재연
재경향우자녀 90명 고향뿌리찾기 운동 주관


 


#부친 故 신창호 씨 사진관 경영·음악 애호가 멋쟁이



올해 일흔한 살인 신대도(申大道) 향우는 1940년 10월 경남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 316-6번지에서 신창호(申昌昊) 씨의 4남 2녀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신창호 어른은 젊은 때부터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재력도 있고 음악을 좋아하는 멋쟁이 시골신사로 읍민의 존경을 받았다. 황성문·손상조·권동조·김원대·김성옥 씨 등 동년 선후배들과 함께 고성읍 여론을 주도하는 원로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대도 향후도 고성초등학교 4학년 초반기까지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였고 급장을 연달아 할 정도로 성적도 우수하였다. 미움 받지 않는 장난꾸러기이기도 했다.


 


#6.25전쟁 폐허 속에 하루 죽 두 끼로 연명



그러나 6.25전쟁은 고성 사회 모든 가정과 마찬가지로 신대도 향우의 가정도 거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고성읍 일대의 가옥들은 형편없이 파괴되었고, 사진관 영업도 사실상 폐업상태로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입은 많고 식량은 부족하니 어머니(영현면 봉발리 백씨 집안이 친정)는 아침에도 죽, 저녁에도 죽을 끓였다. 점심 식사는 아예 없앴고 저녁 죽도 오후 5시쯤 먹고는 6시부터 취침이었다. 아이들이 취침시간을 어기면 혼이 났다.


 


#부친, 빵집·양장점 등 10여 가지 사업 줄줄이 실패



부서진 가옥은 주변에 버려져 있는 다른 집 목재를 주워서 땜질하였고 이층 다락방에는 나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사진관 집 아이들이니 잘 먹고 잘 자란다”고 말했지만 신대도 향우의 집안 사정은 거의 기아선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중학교를 거쳐 고성농고 졸업 때까지 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부친은 그동안 과자점·빵집·식당·떡방앗간·양품점·위스키 시음장·아이스케키점 등 10여 가지 사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입을 덜기 위해서 막내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은 부산에 있는 고모 댁으로 내려 보냈고, 신대도 향우도 1960년 4월 육군에 입대했다. 세 살 위인 형 우홍 씨도 사업을 한다며 서울로 올라갔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신대도 향우는 육군에 입대하더라도 대도시 주변부대로 배치되면 야간대학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전병참학교 수료 때 돈을 써서 의정부 보충대로 배치되었다.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의정부 보충대는 전방으로 병력을 배치하는 곳이었다. 그의 ‘촌놈 계산’이 첫 실패를 맛본 것이다.


 


#육군 입대, 유류보급창에서 인생 공부 많이 하다



배치된 곳은 경기도 연천군 8사단 내 수송부대 연료보급창이었다. 4.19 학생혁명, 민주당 집권, 5.16혁명 등 서울 정치는 숨 가쁘게 돌아갔지만 군대는 계속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신대도 일병도 고참들이 시키는 대로 관행처럼 계속되던 요령과 편법을 배우게 되었고 남의 휴가증을 갖고 고성까지 장거리 외박을 하기도 했다. 미군 감독관들은 차량의 연료소모기록만 보여주면 OK였다. 신대도 향우는 “군대 생활 3년 동안 진짜 인생을 배웠다. 나에게는 군대가 국방대학이었다”고 회고한다. 또 “내가 그때 만약 돈 욕심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철창신세가 되었을 것”이라며 웃는다.


 


#고성수협 월급 3천원 임시직에 겨우 취직



1963년 1월에 제대한 신대도 향우의 최우선 과제는 취직이었다. 가족의 생계유지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남산 밑에 방을 하나 빌렸으나 공부가 될 리 없었다. 보다 못해 어머니가 나섰다. 삼촌 신태섭(申兌涉) 씨가 고성수협 이사로 있었지만 총무계장에게 매달렸다. 신대도 향우는 제대 후 2년 만인 1965년에 그것도 말단 임시직으로 고성수협에 들어갔다. 월급은 정식 직원의 5분의 1인 3천원(지금 돈으로 약 30만원)이었다.



#1년 후배 이정자 씨와 8년 연애 끝에 결혼 성공



신대도 향우는 신설 부서인 신용계로 배치되었다. 이곳의 주 업무는 예금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농협도 있고 상업은행도 있는데 누가 새로 생긴 수협에 예금을 할 것인가. 방법은 돈을 빌려 예금을 하고 고리로 이자를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업무 추진비 등으로 그 뒤치닥거리를 했다.



그렇게 해서 1965년부터 1970년까지 5년 동안 고성수협 신용부문(예금·대출부문)의 토대를 확립했다고 신대도 향우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신 향우는 1966년에 시험을 거쳐 수협 정식 직원이 되었고 그 다음해인 1967년 10월에 이정자 씨와 결혼했다. 이정자 씨는 고성초등학교 1년 후배로 신대도 향우와 무려 8년이나 연애를 계속했다. 고성읍 ‘노랑신문’ 10대 뉴스의 하나였다.


 


#삼촌의 수협조합장 선거 실패로 또다시 실업자



1970년 신대도 향우에게 또 위기가 닥쳤다. 삼촌인 신태섭 고성수협 전무가 수협 조합장 선거에 출마했고 신 향우는 선거운동을 위해 사표를 냈다. 고성군 출신 국회의원에게 줄을 대 보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고 결과는 실패였다. 삼촌은 그때의 화병으로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대도 향우는 수협에서 저축했던 돈도 금방 다 없어져 알거지가 됐다. 집도 빚 때문에 농협에 저당 잡혔고, 생계는 어머니가 고리사채를 얻어 이리 막고 저리 막고 하였다. 근 1년 동안 백방으로 줄을 댄 끝에 1971년 초 부산수협에 들어갔다. 직책은 판매주임이었다. 신 향우는 곧 실력을 발휘했다. 자갈치 위판소 판매담당계장, 부산수협 본소 군납계장, 판매계장 등 노른자위를 다 맡아 보았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산수협 계장 때 투서 받아 40여 일간 고초도



그러나 호사다마, 또 불운이 닥쳤다. 부산수협 근무 7년째 되던 1977년 어느 날 신대도 부산수협 판매계장은 부산지검에 연행되었다.
뇌물수수죄 및 상납 혐의였다. 면세유류 배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선주들과 차기 수협조합장 자리를 노리던 반대파들이 투서를 한 것이다.
신대도 계장은 “상납은 없었다” “유류를 배정 받은 몇몇 선주로부터 약간의 사례금을 받았지만 활동비와 업무추진비로 썼다”며 끝까지 버텼다. 부산수협 상무·전무 등 간부들이 검찰청으로 줄줄이 소환되는 등 40여 일 동안 시끄러웠다. 결과는 신대도 계장 혼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는 것으로 끝냈다. 부산수협 간부들과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인간적인 의리를 지켰다는 것이 큰 보람이라고 지금도 자부하고 있다.



신대도 향우는 이듬해인 1978년 부산 송도해변에서 바다 장어(아나고) 수집 판매 업무를 시작했다. 부산수협 위탁판매 중매인 자격으로 차 한 대를 가지고 부산시내 식당에 장어를 공급했다. 장어 잡이 어선에 선도금을 많이 주고 거래처 관리도 열심히 했더니 취급 물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서울·인천·청주·충주·제천까지 거래처가 확대되었다.


 


#바다 장어 도매사업 대성공… 눈물 나는 부부 고생도



그러나 문제점도 속출했다. 먼저 최대 거래처인 서울에서 판매 대금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서울 책임자는 제매였다. 부산의 경우 장어운반차(물탱크차) 한 대 가지고도 월수입이 200만원은 되었는데, 오토바이 10여 대로 하루 100㎏씩 배달하는 서울에서 이문이 안 남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 중림동(현 한국경제신문사 자리)에 있는 서울 사업장에서 3~4일을 관찰한 다음 서울 사업을 직접 하기로 신대도 향우는 결심했다. 7~8명에 이르는 오토바이 배달요원을 전부 철수시키고 2.5톤 물탱크 한 대, 배달요원 2~3명으로 사업 조직을 개편했다. 장어 수조 위에 널판지와 전기장판을 깔아 부부 침실을 만들고 2층 다락방에는 동서 내외가 지내도록 했다. 처마 끝에 천막을 연결해 배달원 숙소를 만들고, 옆집 방 2개를 빌려 아들 딸 공부방으로 하였다. 밤낮없이 물고기를 취급하자니 골목길은 항상 질퍽하고 어수선해서 이웃집 원성이 잦았다.



사실 부산에서 서울로 사업장을 옮길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부인 이정자 씨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또 부산에서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는데 또 낯설고 물선 서울로 가족을 끌고 올라간다니 부인으로서는 끔찍한 모험이었다. 신대도 향우는 부인에게 목이 멘 듯 막말을 내뱉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학력도 돈도 기술도 없는 삼무인생(三無人生)이다. 당신 믿고, 가족 믿고, 친구들 믿고 서울로 가자는 것이다.”
부인은 그때 눈물을 흘리며 묵묵부답이었다고 신대도 향우는 회고한다.


 


#하루 3시간 토막잠에 400만원씩 벌기도



신대도 향우는 이를 악물었다. ‘서울에서 실패하면 내 인생을 끝장이다’란 각오였다. 하루 3~4시간 정도 토막잠을 자면서 얼굴에 소금이 돋을 정도로 일했다. 당시 서울에는 신대도 향우의 삼우수산 등 3개 업소가 바다 장어를 공급했었는데 장어 어선이 주로 몰리는 부산 송도에 수집거점을 마련한 삼우수산의 공급 능력이 월등했다. 그뿐 아니라 공급 가격도 품질도 조건이 좋았다. 새벽 4시가 되면 중도매꾼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줄을 서기도 했다.



어떤 때는 새벽 2시경 명동 횟집이라면서 장어를 긴급 배달해 달라고 간청했다. 배달요원도 집에 가고 없었다. 신대도 향우는 장어통에다 산소통을 꽂아들고 무작정 길거리로 나섰다. 용달차든 택시든 무엇이든지 잡아타기로 했다. 마침 용달차가 나타났다. “요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명동에 갔다 옵시다.” 명동 횟집 사장은 신대도 향우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영원한 단골 친구가 되었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전국에 지점이 5개소, 배달차가 13대, 하루 수입은 400만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것도 4~5개월 반짝 하고 말았다. ‘비브리오균이다’하고 방송이 나가면 몇 주일씩 일손을 놓아야 하고, 외상값은 판매액의 4분의 1에 이르렀다.


 


#회 파티 200여 회 주최… 친구사랑·고향사랑 유별나



신대도 향우의 장점이자 단점은 친구를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다. 부산에서 고향 친구가 이혼을 하게 되자 그 친구의 생일파티를 20년 넘게 차려 주고 있으며, 서울에서도 고향친구가 신장암 수술을 받자 40여 일간 병간호를 맡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철마다 아나고회다 전어회다 하며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생선회 파티를 베풀었고, 골프 동호회 등 서울에서 사귄 친목모임에도 서울에서 또 어떤 때는 고성에서 회 파티를 열었다. 그가 20여 년간 회 파티를 주최한 횟수를 따지면 약 200회는 넘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향사랑·고향자랑이기도 했다.



신대도 향우가 재경고성향우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인 2007년 9월 예산 1천만 여원을 들여 재경고성향우회 한마당축제(서울 서초구민 운동장)를 개최한 것도 봄날 고향마을에서 흔히 보던 ‘마을회치’를 재연한 것이다. 이날 한마당축제에는 ‘고성 총쟁이 국밥집’ ‘월평리 구장술집’ ‘고성풍물패’ ‘고성부녀자합창단’ 등이 동원되어 400여 재경향우뿐 아니라 단체  상경한 이학렬 고성군수 등 고성군 관계자들 모두를 고향 정취에 흠뻑 빠지게 했다.



신대도 향우의 지극한 고향사랑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세계공룡엑스포 입장권 사주기 운동을 벌여 자기 돈으로 600여 매를 사기도 했으며(2007년 4월), 재경고성향우회원 자녀 90여 명을 고성으로 초청하여 고향 뿌리찾기 운동을 주관하기도 했다(2008년 10월). 또 고성오광대 서울공연도 주최하여 재경향우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2008년 11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모두 이웃사랑 친구사랑



신대도 향우에게는 이처럼 친구들을, 그리고 고향사람들을 신나게 하는 유전자가 있다. 신대도 향우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형 우홍 씨도 모두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신나게 하는 자질을 타고났다.



아버지는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온갖 악기를 연주하고 작은 악단까지 조직하는 등 시골 벽촌 고성읍에 예술혼을 심었다. 어머니는 불우이웃뿐 아니라 시장 모퉁이의 행상들까지 자기 용돈을 털어서 도와주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형 우홍 씨의 친구사랑은 더 유별나다. 신대도 향우는 형 우홍 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장례식 때 형님 친구들이 고성읍 동외리 남산기슭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형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형님은 사업에는 연전연패했지만 친구사업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억 떼이고 ‘인과응보’ ‘공수래공수거’ 깨달아



‘신대도가 돈 번다’는 소문이 번지자 너도나도 손을 벌렸고 투자하면 떼돈 번다는 투기꾼들도 찾아왔다. 실제로 투기꾼이 ‘석산을 개발하면 떼돈을 번다’고 해서 1억원을 빌려 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자도 두둑하게 잘 주다가 어느 날 회사를 부도내고 잠적해 버렸다.



신대도 향우는 1억원을 떼이고 나서야 깊이 깨달았다. “인과응보로구나. 내가 군대에서 유류보급업무를 취급하면서 알게 된 가게주인한테서 휴가비 1천원(지금 돈 약 10만원)을 급히 빌리고는 갚지 않았는데 그 업보를 이제 내 돈 1억원으로 떼이는구나.”



“공수래공수거다. 35년 물고기 장사 이젠 그만하자.” 그리고 2000년 6월 노량진 수산시장 사업장을 폐업신고하고 직원 8명에게 월급 두 달 치를 더 얹어주며 모두 내보냈다.


 


#전세 살아도 마음 편하면 최고… 나는 행복해



그는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재경고성향우회 회장을 하면서 5천만 여원 정도를 찬조했지만 서울 대방동 아파트에서 전세를 산다.
“전세 살면 어떻습니까?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돌보며 편하면 최고지요.”
“대구에 사둔 상가건물에서 노후자금은 나옵니다. 죽을 때까지 자금 조달 계획이 딱 서 있습니다.”



“죽을 때 돈 가지고 갑니까? 많은 돈 그거 짐 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내 몸 건강하게, 가족들과 화목하게, 좋은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고향 사람들도 도우면서 사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인생 보람의 하나라면 형제자매 사촌형제 그리고 그 자녀들까지 20여 명에게 내 사업장에서 또는 그 주변에서 일자리를 마련해줘 거의 모두가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건강 비법이요? 새벽에 일어나 손바닥에 28군데 쑥뜸 뜨고, 1시간 반 동안 산보하고, 체조하고, 샤워하고, 친구 만나서 웃고 떠들고…”


 

글=정출도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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