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가 들어와 마을이 이루어진 당동, 마을에 못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9. 내곡리(內谷里)
▣ 남촌(南村) 남촌마을은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내곡리의 남쪽마을을 남촌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것은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의 입촌 연대를 살펴보면 김해김씨와 연일정씨가 1600년대에 입촌하여 살게 되면서 그 뒤에 창원황씨, 전주이씨, 경주최씨 등 성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내곡리 동제와 전설 동해면 내곡마을 남쪽 하천변에 약 400여년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느티나무에 얽힌 사연이 있어 내곡마을 사람들은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다. 사연인즉, 지금부터 약 300여년전에 이 마을 김씨 집안에 7대 독자가 있었는데 그 집 며느리로 들어온 박순숙이라는 여인은 나이 40이 넘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는 대가 끊어진다고 야단들이라 박여인은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동안 박여인은 전국의 명승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자식하나 점지해 주십사하고 불공도 드리고 백일기도를 하는 등 모든 것을 다하여도 자식을 하나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날 박여인은 다른날과 같이 목욕을 깨끗이 하고는 이 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서 백일 기도에 들어갔는데 백일 되던 날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흰수염이 석자나 되고 흰색장삼을 걸친 백발노인이 나타나서는 “부인 정말 고생이 많소이다. 그대의 정성이 대단하여 소원을 들어줄테니 집에 가서 편안히 몸을 보살피도록 하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부인은 깜짝놀라 꿈이 아닌것을 깨닫고서 그날부터 궂은일은 삼가고 몸조리를 잘하고 있는데 얼마후에 아기를 갖게 되어 10개월 후에 달덩이 같은 옥동자를 낳아 온 마을 사람들의 경사가 벌어졌다. 그 후로부터 이곳 내곡사람들은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소원이 있으면 이 느티나무 밑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유래되어 지금은 마을에서 동제를 모시고 있는데 정월 초하루날이면 마을사람들이 깨끗이 목욕을 하고서 제각기 소원을 기원하고 있다.
▣ 북촌(北村) 북촌마을은 남촌마을이 동명유래와 같이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내곡리의 북쪽에 위치하였다하여 북촌마을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주민이 거주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의 입촌연대를 살펴보면 1600년경에 김해김씨, 연일정씨, 순흥안씨가 입촌하고 그 뒤에 창원황씨, 함안이씨 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내곡리 성터 동해면 내곡리에 있는 이 성터는 곡산봉수대의 동방으로 연접된 소형의 토성으로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 목장 성터 동해면 내곡리 상진두(윗나리고지)로부터 봉암리 호구당까지 이어진 길이 약 6㎞에 달하는 구절산록(九節山麓)에 있는 성터로 고려때 군마를 기르던 목장으로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있다.
◇ 곡산봉수지(曲山烽燧址) 동해면 내곡리 구절산 줄기에 축조되어 있는 이 봉수대는 진해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통신기관으로 크게 활용되었다고 한다.
◎ 동해면의 성날과 전설 성날은 내곡리 북촌마을의 한 조그마한 자연취락으로 옛부터 바다건너 회화면 당항을 연결하는 나룻터가 있어 많은 주점과 사람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몇 가구만 살고 있는 곳으로 슬픈 사연을 담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성날에 금실 좋기로 널리 소문난 김석공(金石公)이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김씨는 토지가 없어 남의 집 품팔이와 장날이면 소쿠리, 쟁기 등을 만들어 배둔장에 갖다 팔아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슬하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기 위한 장정을 징발하였는데 이 마을 김석공도 여기에 징발되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한 김씨는 자기가 축성을 위하여 장기간 떠나면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의 생계가 염려되었지만 조정의 부름을 거역할 수가 없어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보낸 부인은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아프지만 당장 생계를 맡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하루를 한달같이 기다리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뒤에 1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기별 또한 없어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 갔다. 2년,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던 남편은 결국 축성의 마무리를 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서는 성의 마무리 즉, 성날이라 하여 부인은 성날 모양의 제당을 만들어서 남편의 혼백을 모시던 곳을 본따 지금의 지명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성날터는 없어졌다.
14. 거류면(巨流面)
거류면은 소가야때는 진여부곡(珍餘部曲)이라 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되면서 광일면과 광남면의 두개면으로 나누어져 광일면은 장대(長大), 하촌(下村), 가리(佳里), 양촌(陽村), 오산(烏山), 산촌(山村), 구현(九賢), 송정(松亭), 용산(龍山), 월치(月峙), 정촌(亭村), 신은(新銀)의 12개 동리를 관할하였고, 광남면은 봉암(鳳岩), 상련(上蓮), 하련(下蓮), 신리(新里), 용동(龍洞), 연화동(連花洞)의 6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면을 병합할 때 광일면과 광남면을 합쳐 거류산의 이름을 따서 거류면이라 칭하고 당동(塘洞), 신용(新龍), 화당(華塘), 거산(巨山), 가려(佳麗), 송산(松山), 은월(銀月), 용산(龍山)의 8개로 개편하였다.
1973년 7월 1일자 대통령령 제6542호로 동해면 감서리(甘西里)가 거류면에 편입되었다.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조례 제858호로 당동리, 신용리, 화당리, 거산리, 가려리, 송산리, 용산리, 은월리, 감서리의 9개리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쪽은 당동만, 서쪽은 고성읍, 동북쪽은 동해면, 남쪽은 통영시 광도면에 접해있다.
거류면사무소는 군청 소재지에서 남쪽 11.1㎞ 떨어진 당동리 75-6번지에 자리하고, 면적은 36.5㎢에 2010년 6월 25일 현재, 가구수는 2천658세대, 인구는 5천532명이다. 경지면적은 1천480㏊, 임야 1천813㏊, 특용작물 재배면적 41㏊이다.
거류산성은 소가야때 축성한 성이라 전해지고 있고, 거산리에는 지석묘군이 있는가하면 화당리에는 군영지로 사용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교육기관은 유치원 3개, 초등학교 3개,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의료기관은 병·의원 2개, 보건지소 1개소가 있다.
인구밀도는 247인/㎢이고 취락은 주로 구현보강(九賢補江) 일대의 경사지와 당동만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발달해 있다.
1. 당동리(塘洞里)
본래 용남군 광남면의 지역으로써 연당(蓮塘)이 있었으므로 당골 또는 연당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곡동(鳳谷洞), 상연동(上蓮洞), 하연동(下蓮洞)을 병합하여 당동리라 해서 거류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당동(塘洞) 당동은 처음 경주최씨가 들어와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광이면 연동리가 1901년(고종 38년) 진남군 광이면 하연동으로 개칭하여 오던 중 1914년 광이면과 용남군 광남면을 합면하여 거류면 당동리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동이라 동명을 지은 것은 연지(蓮池)가 있었다하여 칭하였다고 한다. 당동이라 한 것은 주택으로 알맞은 지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에 당동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은 마을에 못이 있었다하여 지어진 것이다. 특산물은 별로 없고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으며 마을 뒤에는 우뚝 솟은 거류산이 있어 이 거류산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설도 많다.
◎ 사적 및 기념물
◇ 쌍효각(雙孝閣) 당동 북쪽 길가에 있는 정문이다. 효자 경주최씨와 효부 함안조씨의 정문이다.
◇ 쌍효문(雙孝門) 쌍효각 북쪽에 있는 정문(旌門)으로 효자 정천동(鄭千東)과 효부 밀양박씨의 정문이다.
◇ 척망대(陟望臺) 당골 서쪽에 있는 망루로 최상노(崔祥魯)가 대를 쌓아놓고 날마다 이 곳에 올라 그의 아버지 산소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 포효문(褒孝門) 당동과 봉곡 사이의 길가에 있는 비로 효자 김상습(金尙習)의 효행을 기록하고 있다.
◇ 효열각(孝烈閣) 당동 앞 길가에 있는 정문으로 최상뢰(崔祥賴)의 아내 전주이씨의 정문이다.
◇ 가매바위 풀밭골에 있는 바위로 마치 가매(가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구뭇터(논) 당골 북쪽에 있는 논인데 옛날에는 못(池)이 있었다고 한다.
▣ 신당(新塘)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이면 연동으로 칭하였으며, 1901년(고종 38년) 진남군 광이면 하연동으로 개칭 되었으며, 다시 1902년(고종 39년)에 광이면 당동으로 칭하였다.
1914년 광이면과 용남군 광남면을 합면하여 거류면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당동리라 칭하였으며, 당시 면사무소, 주재소가 위치한 마을로 인기가 늘어나면서부터 신생(新生)마을로 형성되어 자연마을 단위로 분동시 신당마을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사와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당동(당골)장터가 있어(3, 8일) 장이 서기도 하며 동부농협, 고성수협지소, 거류우체국 등 금융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음식점, 다방, 오락실, 노래방 등 도시 못지 않은 근린시설이 마련되어었다. 특히 생선회의 요리솜씨가 좋아 생선회를 즐기려 외래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선착장 주위에서는 낚시꾼들의 낚시모습이 장관을 이루기도 하고 동해의 앞바다를 바라보면 통영시의 가자미섬이라든가 일출의 모습도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신당의 아침은 밝고 명랑하기 그지없다.
◎ 당골만(당동만)
신당마을 앞에 있는 만이며 당골장(당동장)은 신당마을 선착장 옆에 있는 시장으로 3일과 8일 장날이 열린다. 신당 앞 선창가에 있는 개를 선창개, 당골판장 앞에 있는 개를 시장개라 부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