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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알아야 하고, 알아야만 사람다운 구실을 한다”-민족학교 철성의숙 설립

하기호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4월 02일
ⓒ 고성신문











▲ 제목을 넣으세요


 


 


 


 


 


 


하기호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의


 


무량산인(無量山人) 박거수(朴居洙) 선생과 민족학교 철성의숙(鐵城義塾)


 


 


고성의 진산 무량산 자락에서 탄생, 일본 건너가 개화의 문물 배워
1908년 민족학교 철성의숙 설립, 초대교장 박진완, 교감 박거수 선생
우리 고장 고성에 ‘글 장님’ 없애기 위해 동분서주, 무량리 등 야학 열어
철성의숙서 태극기 만들어 읍내 장터까지 은밀히 운반, 거사 계획
마산서 원동무역주식회사 창립, 해산물 곡물 포목 주단 등 도산매
이익금 상해 임시정부 정치자금 조달, 원동무역 초대 취체역 부임
1910년 고성체육회 조직, 초대회장 역임, 쌀 열섬 쾌척 농악 장려
1928년 서울 태평로서 42세 젊은 나이 교통사고로 운명, 눈물바다


 



1. 고성읍 무량리에서 태어나다
무량산인(無量山人) 박거수(朴居洙) 선생은 1887년 7월 6일(음력) 아버지 박진호(朴鎭顥) 공과 어머니 유기계 여사와의 사이에 4남 중 3남으로 고성군 고성읍 무량리 173번지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칙(聖則)이요, 태어나서 자란곳이 고성의 서쪽에 우뚝솟은 무량산(無量山) 바로 밑에 있는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호를 무량산인(無量山人) 또는 기전(杞田)이라 하였다.
고장 사람들은 기전(杞田) 선생이라고 불렀으나 본인은 무량산인(無量山人)을 즐겨 쓰셨다고 한다.



1902년(광무 6년) 선생이 16살 되던해 부친께서 병환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병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병세는 더욱 나빠져 부친께서는 생전에 며느리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1903년 겨우 17세의 나이에 장가를 드셔서 설정창 여사를 맞이 하였다.
그 다음해 1904년 음력 4월 20일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3년상을 마치셨다.


 


2. 청운의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다
박거수(朴居洙) 선생은 뜻한바 있어 문득 상투를 잘라버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서 학업을 닦으셨다. 일본에 머무러신 2년 동안 어느 학교를 다니셨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본에서 후꾸자와 유기찌(福澤諭吉)가 경응의숙(慶應義塾)을 세운 일에 심취하였다고 하며 1908년(22세) 고향 고성으로 돌아왔다.


 


3. 민족학교(民族學校) 철성의숙(鐵城義塾)을 설립하다
박거수(朴居洙) 선생은 이 고장의 옛 이름인 철성(鐵城)을 따서 철성의숙(鐵城義塾)을 고성읍 덕선리 선동(그너리)에 설립하였다(1908년).
처음에는 1학년 한 학급을 모집하여 이 해 4월 1일 개교하였다.
철성의숙의 설립은 집안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선생의 숙부이신 박진완(朴鎭完) 공을 초대 교장으로 모시고 박거수 선생께서는 스스로 교감이 되셨다. 장질인 박상요(朴相堯)씨와 덕선리 이판수(李判洙)씨를 학감으로 평양에 있던 정주 오산학교 출신인 김정행(金貞行) 선생을 요직으로 모시고 이 학교를 경영해 나갔다.
초대 교장이신 박진완 교장이 세상을 떠나자 박거수 선생의 중형이신 박경수(朴暻洙)시를 2대 교장으로 모시고 교사를 확충하고 학교는 날로 성장해 갔다.



무량산인 박거수 선생께서는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그 곳 개화의 문물을 배워 돌아오시어 학교설립에 착수하였고, ‘사람은 알아야 하고, 알아야만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육영의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4. 1919년 고성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919년 3월 15일 밤 고성읍 덕선리 선동마을에 있는 철성의숙에 교장 박진완과 교감 박거수를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이 때 찾아온 사람은 그 후에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제1차 일본인 고급관리 암살과 파괴사건에 관련되었던 진주 사람 이주현(李周賢)으로 박진완과 박거수를 찾아온 뜻을 밝히고 배만두(裵萬斗), 이상은(李相銀), 김상욱(金相煜)을 은밀히 박진완의 집으로 불러와서 국내 사정을 설명하고 고성에서도 독립만세 의거를 결행할 것을 다짐받고 독립선언서를 두고 이주현은 돌아갔다.
무량산인 박거수 선생은 배만두, 이상은, 김상욱으로 하여금 거사를 실행토록 막후에서 종용하는 한편 박거수의 집과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일에는 ‘에린놈’이라는 몸종을 시켜서 몰래 고성읍 장터까지 은밀히 운반케하여 거사 군중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고성읍 성내동에 일용잡화상을 경영하던 박효수(朴孝洙)의 철성상회를 지휘 본부로 지도해 나갔다.
거사 후에는 3.1독립만세 운동의 주역인 배만두, 이상희(李相羲), 이진경(李鎭擎)을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 시키려고 이들을 당시 상해 이범석(李範奭) 장군에게 보내어 운남기병학교(雲南騎兵學校)에서 군사교육을 이수케 한 후 광복군(光復軍)에 종사케 하였다(그 당시 이범석 장군은 운남기병학교의 조교였다).


 


5.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고취
철성의숙의 교육 목표는 삼은(三恩) 곧 국은(國恩), 사은(師恩), 부은(父恩)을 기반으로 나라찾기에 두고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달성을 바라는 마음을 길렀으며 기미(己未)3.1독립만세 운동 후의 3.1절 기념행사로 소운동회를 개최하고 개천절(당시에는 음력 10월 3일에 거행)에는 대운동회를 갖고 가지각색(지금의 가장행렬)의 행사를 빠뜨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전교생에게 시루떡을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운동회 때는 신호총으로 엽총을 사용하여 일제(日帝)에 무언의 위협을 가하게 하고 철성의숙 운동장 주변 둑은 무궁화 나무를 심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왔다.
또 다른 한편 이 고장에 글 장님을 없애기 위하여 철성의숙의 옛집에 야학(夜學)을 열어서 이를 직접 주도 하였으며, 5년후에는 무량리에 또 야학을 하나 더 열었다.


 


6. 원동무역주식회사(元東貿易株式會社) 설립운영
무량산인 박거수 선생은 경남 마산에서 이곳 애국지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원동무역주식회사란 회사를 창립하였다.
이 회사는 해산물, 곡물, 주단, 포목을 도산매하고 수출하기 위해서 세운 회사로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의 일부를 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에 정치자금으로 보내기 위해 회사를 세웠던 것이다.
마산에서는 나인한(羅仁漢), 명도석(明道奭), 구인욱(具麟旭), 김형철(金炯徹), 옥기환(玉麒煥) 등 여러분이 이에 가담했다.
고성에서는 집안의 박돈수(朴暾洙), 박경수, 박거수, 박효수씨 등 네집이 합쳐서 한 사람 몫으로 참가했는데 이때 박거수 선생은 이들 애국지사들과 서로 터놓고 지내던 터이므로 그것이 인연이 되어 참가하게 되었으며, 이 때 박거수 선생이 이 회사에 초대 취체역에 부임하였다.



7. 그 외 사회단체 운동에 참여하다
1910년에는 고성체육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 체육진흥에도 기여 하였으며 쌀 열섬을 내어 이를 기금으로 민속놀이인 농악(農樂)을 마을마다 장려하여 메마른 민족정서를 되찾고 전수해 나가게 하였다.
한편 대중운동의 모임체인 청년단과 신간회 조직에도 막후에서 많은 역할을 하여 대중운동의 산파역을 하기도 하였다.
고성청년단은 1921년경에 조직되었는데 회관은 지금의 고성초등학교 강당자리에 세워졌고 회원은 철성의숙 졸업생 중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와 읍내에 사는 뜻있는 젊은이들 이었다.



청년회 운동은 읍내에 살던 전갑봉(全甲鳳), 천두상(千斗上)의 두분에게 일임하고, 다시 그들에게 야학을 이룩하여 글 모르는 고향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장소는 청년회관이었다.
또 회관 뒤에는 뽕나무 밭을 만들게 하여 뽕나무를 심어 양잠실습을 실시하고, 읍내 무학동에 김재익(金載翼) 공의 집터를 빌어서 거기에 양철집을 지어 봄과 가을을 통해 누에를 치게 하였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생업자금으로 쓰게 하였고, 청년단의 경비 일절은 박거수 선생께서 모두 부담하였다.


 


8. 서울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하시다
무량산인 박거수 선생은 1927년 10월에 자녀교육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서 서울로 상경하였으며, 1928년 음력 3월 23일 서울 태평로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하셨다.
곧 열차 한 차량을 빌어 운상하여 마산까지 내려와 마산역의 맞은 쪽에 영구를 모시어 원동무역주식회사에서 노제를 보았으며, 이우식(李祐植), 남기우(南璣祐), 명도석(明道奭), 구인욱(具麟旭), 이연재(李年宰), 김형철(金炯徹)님의 분향과 조사로 모두 통곡하고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 영구를 화물차로 옮겨 모시고, 고향을 찾으니 다음날 새벽녘이었다.



철성의숙 전교학생이 빗속을 무릅쓰고 물려와 영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교직원들도 밤새워 영구를 모셨다. 이리하여 선생께서 직접학교에 마련해 주었던 악대를 앞세우고 영원히 떠나셨다.
운명한 해가 42세 였으니 아까운 젊은 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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