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은 백두산을 오르고 있어야 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2차 남북정상회담의 약속대로라면 올해 5월엔 백두산으로 바로 가는 하늘길이 열려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시간은 도리어 거꾸로 흐르고 있다. 그동안 잘 다니던 금강산 길이 끊기더니 이제는 개성 길도 위태롭다. 개성 길마저 끊어지면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10년간 교류의 폭을 넓혀오던 남북 관계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색(梗塞)국면으로 들어섰다. 지난 정부의 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예상 외로 심한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10개월, 그동안 6.15 남북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에 대해 대체로 배타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지난 정부에서 남북이 합의한 내용들이 하나둘씩 폐기되고 있다.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 베이징올림픽을 응원하려던 꿈은 오래 전에 깨졌고, 그 외에도 백두산 관광을 비롯하여, 서해평화 협력특별지대, 자원개발, 한강하구 공동 이용, 개성공단 확대,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경의선 연결 등 어느 한 가지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남쪽의 사시안(斜視眼)도 그렇지만, 북한도 그에 못지않다. 북한은 지난 10월, 노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며 무분별한 반공화국 대결의 길로 계속 나간다면 우리는 부득불 북남관계의 전면차단을 포함해 중대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가면 갈수록 태산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一連)의 사태를 대하는 우리 정부의 관계자는 태평스럽기까지 하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의 답은 그랬다. “문제가 없다. 으레 하는 위협일 뿐, 그들이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고. 이명박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통일교육원을 찾았을 때 실무자에게 경색된 남북 관계에 대해 전망을 물었다. 답변은 이랬다. “새 정부 들어 이제 겨우 100일이다. 이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의 대화 단절이 있었으며 곧 해결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100일이 아닌 10개월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갈등의 골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지난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습 사건 때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포기할 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관광객의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들의 잘못을 빌기는커녕 도리어 정부 관계자들을 모두 남쪽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의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는 개성공단을 방문해 실태 조사를 하면서, 남측 기업 관계자들에게 철수 문제까지 이야기했다고 한다. 북한의 처사도 졸렬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책 또한 가관이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기자 브리핑에서 국방위원회의 개성 방문은 압박용이며 북한이 개성공단과 관련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실제 북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참 안이(安易)하고 오만(傲慢)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정부의 오만은 첫 단추를 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인수위 때부터 "북한이 먼저 요청해야만 식량 지원을 해 주겠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주겠다"며 북한의 자존심을 긁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밟아놓고 이제 와서 대화를 하자니 그게 쉬울 리가 없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은 한 마디로 ‘비핵·개방·3000’이다. 일러 핵을 폐기하고, 체제를 개방하면, 10년 후에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 올려 주겠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을 도와 상생(相生)의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좋은 말을 하고도 정작 도움의 대상자인 북한으로부터는 오만방자하다고 욕을 듣는다. 3대 정책 중 두 가지는 실현 가능성도 낮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생존권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3대 정책의 문제점을 간단히 되짚어 보자.
우선 ‘비핵’은 민족 공존의 문제이면서 이웃 국가의 안보와도 관련된 문제다. 우리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이웃 국가에서 나설 수밖에 없다. 핵 폐기를 말하는 것은 좋지만 구태여 북한을 자극하면서까지 우리가 앞장서서 외칠 필요는 없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비핵’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개방’과 ‘3000’ 정책은 더 많은 문제가 있다. ‘개방’은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운 조건이다. ‘개방’ 문제는 북한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른바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던 소련과 동구권이 모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사실을 북한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기에 ‘개방’의 주장은 북한으로서는 ‘체제 붕괴 위협’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방’은 스스로 하는 것이지 요구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편하고 답답하면 북한 스스로 문을 열게 되어 있다. 그것을 강제하면 결국 내정간섭으로까지 비쳐질 수 있다.
그리고 ‘3000’도 문제점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목표를 제시한 것은, 3000달러가 중산층 성장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평화통일이 될 경우에 비용과 사회적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철저한 자립 경제구조를 갖추고 있는 북한이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로 전환할 지도 미지수지만, 체제 붕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정부가 파견하는 경제, 법률, 금융 분야의 경제 관료와 경영인으로 구성된 전문 자문 인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북한 노동신문의 논평을 그대로 빌리자면 ‘삶은 소대가리도 웃다 꾸레미 터질 노릇’이다. 북한도 잘 하는 것이 없다. 그동안 우리 쪽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고마움의 뜻 하나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도리어 냉전 시대에서나 쓰던 막말을 아직도 함부로 하며 억지까지 부린다.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자말자 북한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우리를 향한 ‘테러성 협박’이다. 그들은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빌려 “무분별한 반공화국 대결의 길로 계속 나간다면 북남관계의 전면 차단을 포함해 중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협박했다. 그리고 우리 대통령을 ’역도(逆徒)라며 막말을 하기도 하고, “남조선 당국이 반북 대결로 얻을 것은 파멸뿐이다”며 협박성 논평을 연일 내놓고 있다. 우리의 대북정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환시키기 위한 책략의 연장선상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듣기에 섬뜩하다. 그리고 그 협박이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도 없지 않아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그들을 그렇게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것은 우리가 아니던가. 두 번이나 정상 회담을 가지며 잘 풀어나가던 남북 관계를 흩뜨려 놓은 것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정부가 쌓아온 남북의 ‘신뢰’를 깨뜨리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남북이 벼랑 끝에서 다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수위 때부터 잘못 세웠던 대북정책을 다시 한 번 되짚을 때가 되었다.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 정말 드물게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자존심 하나만으로 세계적 강국 미국과 맞장을 두는 나라다. 그 자존심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개방하면 도와주겠다. 개방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게다가 10년 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에 살 우리가 생색내듯 북한을 3000달러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으니 그들의 자존심이 오죽 상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좋든 싫든 그들은 같은 민족이고 생존을 같이 해야 할 한 겨레다. 모자라면 채워주고 달래가며 같은 길을 가야 한다. 다소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달래며 상생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수정되어야 한다. 대북정책은 경제 논리로 풀 일이 아니다. 대북정책만은 ‘국민의 정부’나 ‘참여 정부’의 정책이 옳았다. 꼬여가는 대북 문제를 다시 처음부터 되짚고 공존의 길을 나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 정세가 북한에게도 아주 좋은 기회다. ‘철천지원수의 나라’ 미국에 진보 정권이 들어섬으로 대화의 길이 트였다. 이에 따라 북·미 관계도 급진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북한도 지금까지의 은둔에서 벗어나 개방의 길로 과감히 나와야 할 때다. 그래서 어려운 세계적 공황을 남북이 같이 손잡고 헤쳐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모두 역사 앞에 죄를 짓고 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나 모두, 통일을 바라는 국민들이나 굶주린 인민은 안중에도 없다. 말도 안 되는 희괴한 논리로 서로 헐뜯으며 자존심 싸움만 하고 있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한다. 더 이상 헛발을 걸어 역사의 흐름을 더디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방관하고 있는 사람 역시 역사 앞의 죄인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끊어진 통일의 길을 다시 이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