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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소년에서 고향발전을 위해 국회로

이군현이 걸어온 길
이은숙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4월 11일
ⓒ 고성신문

고난과 역경을 딛고 구어져 나온 단과자 빵같은 인생 드라마


고향 늘 잊지 못해 호도 ‘남평’이라 지어…KAIST 교수까지 성공


 


‘고성의 아들, 통영의 아들로 고성·통영을 최고의 도시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9일 한나라당 이군현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 되자 이 후보의 고성 선거사무실에서 기쁨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듯 했다. 이 후보가 당선되기 까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마치 고난과 역경을 딛고 구워져 나오는 단과자 빵 같다.


 


● 농부의 아들













1952년 경남 통영군 산양면 남평리 야사골에서 고성이씨 이부열·박이선 부부의 6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논 몇 마지기 부치는 농부의 아들로 더구나 6.25 전쟁이 전국을 휩쓰는 시기에 태어나 굶주림을 간신히 면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 후보의 고난은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시점부터 서서히 거센 세상의 어려움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큰형님이 사업을 한다며 고향 땅을 처분하고 통영읍에서 장사를 할 곳을 이리저리 옮기는 이사 속에서 이 후보는 유영·충렬·통영 초등학교를 전전했다.


 


잦은 전학 과정에서도 공부를 잘했던 이 후보는 또래보다 한 살 늦게 학교를 들어갔지만 반장자리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리더십이 강한 소년이었다.


 


4학년 때 부터는 축구부에 들어가 풀백으로 공을 열심히 차기도 했다. 농촌을 떠난 농사꾼 아버지는 대처(大處)에서 무기력했고 큰형님도 돈과의 인연이 별로 없어 1962년 그가 5학년 때 가족들은 서울로의 이주를 감행한다. 가족들이 터전을 잡은 인왕산 기슭 달동네였다. 


 


“운동은 여러모로 효과가 있어요. 몸과 마음을 함께 건강하게 해주고 사람 살아가는데 중요 덕목인 협동심과 극기심을 일깨워 줍니다.”라고 말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서울안산초등학교에서 핸드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생활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재미를 붙이고 있었지만 집안 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지 못했고 큰형님의 일은 부진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자신이 다니는 학교 정문 앞에서 군밤장사를 하기도 했다. 장사라기보다는 리어카에 밤 몇 톨 올려놓은 소꿉장난 같은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고 그는 두 살 위인 누이와 함께 아버지 앞에 앉는다.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를 못 보내서 미안하다.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기술을 배워야 한다. 기술은 빨리 배울수록 좋으니 졸업 전부터 일을 시작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누이와 함께 청계천 평화시장에 있는 한 신사복 공장 보조공으로 들어간다.


 


● 청계천 평화시장 꼬마 노동자


20여 명의 기능공들이 일하고 있는 신사복 공장에서 그는 당시 14세로 제일 어린 노동자였다. 꼬마 노동자 이군현은 공장 내에서 형, 누나들을 잘 따라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직원 모두가 가난과 생존을 위해 나선 일터이기에 그들 간에 인정이 통했다.


 


그는 아침 8에 출근해 10에 끝나는 일과를 반복해야 했고 희미한 전등, 사방이 밀폐된 공간, 먼지가 빠져 나갈 수 없어 공기는 탁하고 한 여름에는 수은주가 40도 넘게 올라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돌아가는 미싱 기계음에 정신이 멍할 정도이며 하루에 태양을 볼 시간은 점심·저녁 식사 때 잠깐뿐. 그런 곳에서 3년여 간을 보냈지만 그는 “당시 우리 집안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농촌 출신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공장에서 형·누나 같은 분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또 나의 길이 여기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코 좌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청계천의 어두운 골목길을 오갈 때도 나의 마음의 빛은 항상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다만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항상 마음이 아프게 했지요”라고 말한 그의 역전은 우연하게 찾아 왔다.


 


상고를 졸업한 후 은행에 다니고 있었던 다섯 살 위인 둘째 형님은 어느 날 학업에 대한 의지가 강한 동생이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 ‘이제 집안일은 내가 맡을 테니 너는 공부에 전념해라’며 명령을 내렸다.


 


● 끊임없는 도전


얼마나 하고 싶은 공부였는지 형님의 말이 나온 다음날부터 중학공부를 시작한 그는 6개월 만에 고입 검정시험을 독학으로 전 과목 합격에 성공하고 둘째 형님의 모교인 대경상고에 학비 전액 면제 장학생으로 중앙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교직 생활을 하면서 유학의 꿈을 꾸던 그는 마침 로타리 인터내셔널 한국 본부가 미국 유학 장학생을 한명 뽑는 시험에 도전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석사 과정동안 학비·생활비 전액 대주는 좋은 조건으로 유학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유학한지 3 8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미국 포트헤이즈주립대학교 교육행정학 석사, 캔자스주립대학교 교육행정학 박사 학위를 땄다.


 


1983년 귀국한 직후 한국교육개발원에 자리를 잡고 10개월 남짓 일하 던 어느 날 그는 한 강연회에서 ‘미국의 교육 동향’이란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강연을 하고 몇 칠 후 당시 한창 건립 중이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교무과장이 그를 찾아 왔다. 그는 ‘이 실장의 강연이 인상 깊었다’면서 ‘아예 우리와 같이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으로 KAIST 인문사회학부 교수로 임용이 된다.


 


이후 40만 교원을 대표하는 교원단체교원연합회 최연소 회장으로 당선한 그는 교권신장과 교육선진화에 앞장서 교육전문가로서 경륜을 인정받아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이군현 후보는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의원, 한나라당 선정 우수국감의원, 장애인 인권복지정책 우수의원으로 선정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7년 중앙선대위 조직상황실장으로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대선 승리의 중추적인 역할로 신뢰를 얻은 그는 러시아 특사 단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를 만들겠다며 2008년 한나라당 통영시·고성군 국회의원 후보자로 불현듯 돌아왔다.


 


● 통영·고성의 미래


회화면 문중재실 금봉재에 매년 참석하는 이 후보는 고향에 내려왔지만 ‘낙하산 공천’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허나 그의 좌우명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 바다에 맹세하면 고기도 용도 감동하고, 산을 두고 맹세하면 초목도 알아준다”처럼 통영시민·고성군민을 향한 맹세로 인한 신뢰는 곧 지난 9일 통영·고성 이군현 후보가 당선하게 이르렀다.


 


이제 고성 조선산업 특구 활성화, 남포항의 국가 어항 지정 추진, 공룡축제를 세계적인 축제로 육성, 경남항공고를 항공·조선 전문학교로 승격하는 등 대한민국 최고의 지역을 만들기 위한 그의 활보를 기대해본다.              

이은숙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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