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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청학동 불리는 곳 ‘갈천리 종생마을’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3월 21일
ⓒ 고성신문

마장터 있어 삼국시대부터 거주 추정, 고성서원 본산 문정공 향촌 이암 묵재 노필 선생 모신 갈천서원
충효의 고장 대가면…터골에 영산신씨 남평문씨 열녀비,

화골 약수암 선바위와 칼바위 전설 전해져
2. 갈천리(葛川里)
갈천리는 본래 대둔면의 지역으로서 하천이 갈라져 있다 하여 ‘갈내’ 또는 ‘갈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에 종생(宗生)마을을 병합해 대가면 갈천리(법정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외갈(外葛)과 내갈(內葛), 종생 마을이 있다.
▣ 외갈
외갈은 갈천리에 속한 마을로서 1984년 8월 22일자로 고성군의 이동 명칭 및 구역확정에 관한 조례에 의거 행정리로 분동되면서 갈천리의 바깥쪽 마을이라 하여 외갈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악이씨가 맨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하며 그 후 서기 1700년 경에 양천허씨와 전주최씨가 입촌해 지금은 김해김씨, 김해허씨 등 9개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갈천서원
갈천리 입구에 있는 갈천서원은 숙종 38년(1712년)에 회화면 금봉서원(金鳳書院)을 옮겨 중건한 서원으로서 고성지역 서원의 본산으로 문정공 향촌(香村) 이암(李癌)과 지평 묵재(墨齋), 노필(盧珌), 대사간 관포 어득강(漁得江)을 제향하고 그 후 철종 5년(1854년)에 문열공 도촌(桃村) 이교(李嶠)를 제향하고 있다. (1975년 2월 5일에 지방문화재 자료 제36호로 지정돼 있다.)
▣ 내갈(內葛)
내갈은 갈천리의 중심마을로서 1984년 8월 22일자로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구역확정에 관한 조례에 의거 외갈과 종생마을로 분동되면서 갈천리의 안쪽마을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700년경에 맨 먼저 유씨와 안씨가 입촌하였고 그 후에 함안이씨가 입촌해 대성을 이루었으며 그 다음에 김해허씨, 양천허씨, 고성이씨, 진양강씨, 전주최씨, 김녕김씨, 광산김씨 등 각 성이 입촌해 마을을 형성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각 성 공히 도시로 떠나고 몇 호만 살고 있다.
▣ 종생(宗生)
종생마을은 본래 대둔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대가면 갈천리에 편입되었다가 1984년 행정구역 확정시 갈천리의 행정리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생(宗生)’이란 마을명은 지금은 한자로 종(宗)자를 쓰지만 옛날에는 종(種)자를 썼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7년 대한(大旱) 가뭄으로 씨앗들이 멸종되었을 적에 이곳에서 씨앗을 퍼뜨렸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종생마을은 옛날의 마장(馬場)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예측할 수 있으며, 지금은 30호에 7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러나 30년 전 만해도 70여 호에 4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마을로 진씨(陳氏)가 대성을 이루고 강씨, 김씨, 천씨 등 각 성이 살고 있다.
◎ 지명일화
◇ 절골 : 마을 안에 있는 절골은 신라시대 불교 전성기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기와조각 등 절터가 남아 있다.
◇ 마전 :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말을 타고 훈련한 곳으로 ‘마장’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지금은 이 곳에 낙농 목장이 들어서 있다.
◇ 백등산 : 마을 서쪽을 가로막고 있는 산으로 산꼭대기에 흰 바위가 있는데 마을에서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아무 탈이 없고 숲이 우거져 바위가 보이지 않으며 꼭 산불이 나서 불에 타 바위가 보이게끔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전설에 걸맞게 10년 주기로 산불이 난다고 한다.


3. 양화리(楊化里)
양화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서 본래 가동면(可洞面)의 지역으로 옛날 이 마을에 법천사(法泉寺)라는 큰 절이 있었던 연유로 마을명을 ‘법천’으로 불러 오다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줄지어 우거져 있다 하여 버들 楊(양) 자를 붙여 양화리로 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대가면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마을에 들어온 지 오래된 문중의 선산을 참고해 추정해 보면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인 1700년경에 맨 먼저 입촌한 성씨는 김해김씨라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함안이씨, 청주한씨, 밀양박씨, 의령남씨, 진양정씨, 성주배씨 등 10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문화유적
◇ 법천사지(法泉寺址) : 양화리 산 631-7·8번지 일대에 있는 법천사지는 신라시대의 고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폐사되고 현재는 7기의 부도(浮屠)만 남아 있다. 마을 안의 산골 이름에 암자(庵子) 이름이 붙은 것이 여러개 있으며(예 : 나무암골, 맹언암골, 수근암골, 전성암골, 생언암골 등)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양화리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 고성읍 우산리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은향사(銀香寺)로 이안(移安)하였는데 머리부분이 파손된 것을 보수해 높이는 1.5m로 1974년 2월 18자일로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봉수지(烽遂址) : 양화리 동쪽에 있는 제법 높은 산으로 큰 항아리 모양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임진왜란 때의 봉화대로 돌로서 50평 가량의 성처럼 쌓은 돌담이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봉화산 또는 봉화재라고도 부르고 있다.
◇ 정자나무(느티나무)와 동제 : 마을의 중앙 개울가에 느티나무 3그루가 숲을 이루어 있는데 수령 200년 이상으로 ‘정자나무밑’이라 부르고 있으며 나무 밑에 제단을 설치해 매년 정월 보름날 새벽에 동제를 지내고 있고 평소에는 동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전설
◇ 코바위와 해삼바위 : 마을 뒷산 산마루에 있는 높이 10m, 넓이 16.5∼19.8㎡ 되는 큰 바위로 이를 ‘코바위’라 하며 마을 서북쪽 ‘진성골’ 산비탈에 날카롭게 서 있는 높이가 30m도 넘는 웅장하고 기이한 바위를 ‘해삼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바위들에 얽힌 전설은 태고 때 천지개벽을 할 때 해일이 일어나 삼라만상이 물에 잠겼을 적에 코바위는 끝이 상투코만큼 남았고 해삼바위는 해일이 끝나 물이 빠지고 난 뒤에 바위에 해삼이 붙어 있었다고 하여 코바위와 해삼바위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4. 연지리(蓮芝里)
연지리는 본래 고성군 가동면(可洞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3월 1일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연동(蓮洞)과 지동(芝洞), 평동(坪洞)을 병합해 연동과 지동의 이름을 따서 연지리로 하여 대가면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지리는 옛날 늪지가 있던 곳에 연(蓮)을 많이 재배하였다 하여 연동이라 하고 평동은 넓고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행정리로 지동과 평동 마을이 있다.
▣ 지동(芝洞)
지동마을은 옛날에 시달(時達)이라 불러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연지리 지동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터골(基谷)과 방화골(芳花谷)의 자연마을이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맨 먼저 밀양박씨가 살아 오다가 그 뒤에 최씨, 허씨, 손씨, 이씨, 제씨가 입주해 지금은 10여 성씨가 살고 있으며 밀양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열녀비와 지명일화
◇ 열녀비 : 터골(基谷)마을 입구에 영산신씨(靈山辛氏)와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중의 열녀비가 있다.
◇ 방화골 : 방화골 마을은 앞산이 ‘디딜방아’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방화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산능선 끝의 큰 바위 틈에서 약수가 솟아 나고 있어 약수터로 유명하다. 그리고 근처에 ‘약수암’이라는 암자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다.
◇ 선바위와 칼바위 : 마을 서쪽산에 있는 바위들이 모두 세워진 바위로 선바위라 부르고 있다. 선바위 정면에 큰 굴이 있는데 입구는 좁으나 들어가면 여러 사람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그리고 선바위 옆에 흔들바위가 있는데 트럭 적재함 정도의 크기로 사람이 흔들면 흔들린다. 또 옆에 ‘칼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약 10m 정도로 뾰족하게 칼날같이 생겼다하여 칼바위라 부르고 있다.
▣평동(坪洞)
연지리 평동마을은 넓고 평평한 들 가운데에 마을이 위치하였다고 하여 평동이라 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오곡생산이 풍부해 옛날부터 걸인이 없고 인심이 후덕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 마을의 형성
연지리에 맨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은 천황산 아래에 있는 산골로 10여 호가 살다가 20여 년 전에 폐촌이 되어 지금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고 1700년 경에 청송심씨가 입촌하고 그 뒤에 창원황씨가 입촌했다. 지금은 김해김씨, 칠원제씨, 청주한씨 등 17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지명과 전설
◇ 장군바위 : 평동마을 한 가운데서 천황산 아래에 이르기까지 약 5~60m 간격으로 큰 바위가 띄음 띄음 들판에 놓여 있는데 옛날 장군들이 이 바위를 짚고 다녔다고 하여 ‘장군바위’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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