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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위기의 시대에 제정구를 다시 생각한다

손호철 교수의 추모집 ‘제정구 생명정치의 길’ 발문 요약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2월 16일

 


● 노무현 정권 독선 오만으로 국민신뢰 잃어



“8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한국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최대의 위

기에 처해있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라는 민주화운동출신 정부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가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어 다수 서민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민주화냐’며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 정권들이 지난 십년간 도덕적으로 타락한데다가 독선과 오만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필자의 논문 일부)



그리고 그 같은 위기는 예상한대로 지난 12월 대선에서 민주화운동진영의 참패로 나타나고 말았다. 


 


● 운동권의 관념적 급진주의 반성해야



지난 두 정권, 나아가 민주진영은 말만 앞세워왔다. 그 전형이 제정구 선배와 같은 통추회원이었던 노무현대통령이다.


 


한마디로 “빈 수레가 요란했다.” 운동권들이 목청만 높여서 민중을 이야기할 때 제정구 선배는 조용히 민중과 함께 생활하면서 스스로 가난을 실천했다.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른다”고나 할까? 민주화운동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제 선배와 같은 외유내강, 겸허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노무현식의 스타일의 급진주의만이 아니라 운동권의 관념적 급진주의 역시 반성해야 한다.



끝없는 자기성찰도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제 선배의 장점이다. 오만의 극치였던 노무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운동진영은 대부분 그동안 자기성찰이 없이 오만해 있었다. 항상 적과 싸우는 것이 중요했고 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성찰이 없는 운동과 조직은 썩기 마련이다.



제 선배는 말했다. “독재와 싸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독재화 되어있었다… 내 속의 독재와 권위주의를 보고, 그 야심들을 감시하고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가짐 없는 큰 자유, 226쪽). 바로 그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 나아가 민주화운동 진영의 지도자들이 이 같은 자기성찰을 계속해 왔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를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국민의정부에 국민 없고 참여정부에 참여 없어



우리가 제 선배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민중을, 국민을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김대중 정부가 ‘국민의 정부’를 이야기했지만 국민의 정부에 국민은 없었고 ‘참여정부’가 참여를 이야기하지만 국민 참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선하고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또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삶과 생명을 같이 나누면서 섞여 사는 것을 뜻한다. 같이 의논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면서 사는 삶이다…


 


일반적으로 부자일수록,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권력이 높을수록,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이해관계가 없는 한 간섭하기도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간섭함으로써 살아간다… 같이 산다는 것은 잡초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잡초임을 배우고 깨달아 하느님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우리 함께 어우러져”, 28~30쪽).


 제 선배를 생각하며 운동권에 팽배한 먹물 특유의 관념적 급진주의를 한번쯤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에게서 또 주목해야 하는 것, 배워야 하는 것은 연대의식과 공동체정신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정책을 추구한 결과 우리 사회가 과연 한국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공동체가 무너지고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 버렸다. 특히 이 점에서 그가 강조하는 연대의식과 공동체정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연대와 공동체정신은 진보좌파의 핵심가치



사회운동의 경우도 연대의식과 공동체정신이 진보와 좌파의 진정한 핵심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교조화된 이념만 남고 이 같은 정신은 형해화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그의 깊은 애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94년에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갈 핵심적인 시대정신은 공동체정신”이며 “한국 정치개혁의 핵심적인 방향도 함께 사는 공동체 정치문화를 형성하는 것”(“한국 정치개혁의 전망과 현실”, 126쪽)으로 주장한 바 있다.


 


 그 같은 생각에서 그는 아파트의 경우도 아파트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마을 공동체를 제고시키는 방향에서 주택정책을 만들어 가도록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461~462쪽).


 


● ‘자본론’보다는 ‘생명’, ‘이론’보다는 ‘성실성’을



공동체의식이 극한으로 갈 때 다다르는 필연은 바로 제 선배가 주장하는 생명사상이다. 모든 생명이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제 선배는 말했다. “이 병들고 썩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자본론같은 어려운 이론이 필요 없고 「생명」이라는 말 한 마디면 족하다. 그 말 한 마디에서 모든 심오한 사상과 확신이 우러나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회과학 공부가 아니라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라고 선언했다. (가짐 없는 큰 자유, 313쪽).


그렇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반생명적이라는 것이다. 제 선배는 1989년 쓴 글에서 이처럼 전통적인 좌파의 인식을 넘어서 생태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쓰레기와 페기물이 누적 된다… 자본주의는 본질상 ‘함께 살기’가 아니라 ‘따로 살기’요 ‘너도 살고 나도 살고’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며 물질을 경멸하면서도 물질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독점과 독재를 넘어 함께 사는 사회로”, 49쪽).



그는 이미 90년에 말하고 있다. “‘나’라는 개체가 없는 공동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생명체로서의 나 또한 공동체 속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다… 생명에는 ‘홀로’라는 것이 없다. 언제나 ‘함께’이다. 바로 이 ‘함께’와 ‘같이’라는 생명의 본질에서 공동체가 연유되고 있는 것이다”(“나에게 필요한 공동체, 공동체가 필요한 나”, 55쪽). 이 같은 인식에 기초해 그는 90년대 초부터 “이제는 ‘물질의 눈’, ‘물리적 힘의 눈’, ‘따로 살기, 끼리끼리 살기의 눈’에서 돌아와 ‘사람의 눈’, ‘생명의 눈’, ‘함께 살기의 눈’, ‘가난의 눈’으로 돌아가자”(“자전 에세이: 제정구 빈민운동가”, 67쪽)고 외쳤던 것이다.  


 


● 공동체정신·생명사상이 민주주의의 관건
나아가 제 선배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회과학 지식이 아닌지 모른다.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이 현재 처해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다.


 


어쨌든 공동체정신과 생명사상은 그로 하여금 1)노동자들의 경영참여, 2)독점적 시장지배의 종식, 3)장기적 차원에서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공적자본 확대, 나아가 자본의 기능적 사회화, 4)토지공개념에 기초한 택지의 국유화와 주거문제 해결이라는 급진적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독점과 독재를 넘어 함께 사는 사회로”, 53~54쪽).


 


● 초선 국회의원들의 ‘깨끗한 정치선언’ 주도



제 선배는 1992년 총선에서 민주당후보로 당선되어 14대 국회에 진출한 뒤 11명의 동료초선의원들의 깨끗한 정치선언을 주도했다(“14대 개원국회 열리는 첫 날”, 238쪽). 그리고 이를 실천했다.


 


특히 복마전이라는 평을 받는 건설위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에서 깨끗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모범을 보여줬고 이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판 전체를 정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 선배는 87년 6월 민주항쟁에 의해 얻어낸 직선제 성과를 양김이 분열함으로써 군사정권에게 상납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이들의 권력욕에 따라 나라가 지역으로 나눠지는 것을 보고(“나라를 다섯으로 나누었다”, 274쪽)



보수야당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야민주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주체를 꾸려 그 힘으로 양 김 씨를 정치일선에서 후퇴시키고 야권청소와 야권통합을 주도하여 군사정권과 정면대결의 틀을 올바르게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국민의 가슴에 정치적 희망의 불씨 당기고자”, 319쪽).


 


제 선배는 결국 이 같은 입장에서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종로에서 출마하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후 제 선배는 3당 통합에 맞서 김대중 대통령과 평민당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통합야당에 합류해 민주당의원으로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이는 당초 내걸었던 3김 퇴진이라는 정치노선에서 상당히 후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제 선배는 통합야당이 출범하게 되어 자신이 주장해온 대의와 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가짐 없는 큰 자유, 216쪽).


 


● 6월항쟁 정신 짓밟는 3김정치에 결사투쟁



그러나 제 선배는 1995년 김대중 씨가 다시 야당을 분열시키며 정계에 복귀하자 이에 대항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이 보스정치와 줄서기라는 전근대적 정치행태를 재현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며, 민주세력과 야권을 분열시키고 정당정치의 민주화를 후퇴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지역주민들에게 드리는 글”, 259-260쪽).


 


 다시 3김 청산의 깃발을 쳐든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등 당시 함께 했던 대부분의 개혁적인 소장의원들이 3김의 지역주의 바람으로 인해 1996년 15대 총선에서 줄줄이 낙마를 한 가운데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1997년 대선에서 그는 그의 생애 가장 논쟁적일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된다. 3김 정치에 맞서 개혁적 소장정치인들이 모인 ‘통추’는 97년 대선을 놓고 갈라지게 된다. 노무현대통령 등 일부는 정권교체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김대중 캠프로 합류했다. 또 다른 일부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제 선배와 이부영 전의원 등은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지역주의와 3김 정치를 청산하는 것이 더 급한 과제라고 판단해 이회창 캠프에 합류했다.


 


이에 대해 그는 3김 정치도 정치지만 김대중 씨의 유신세력인 김종필과의 연대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제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23쪽).



97년 대선 당시만 해도 이회창은 소신 있는 대법관 출신의 개혁적 정치인이자 3김 정치 청산의 기수였다. 또 그가 비판했던 DJP연합에 의해 집권한 김대중 정부, 그리고 그에 이어 출범한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앞에서 지적한 신자유주의정책과 도덕적 타락, 독선, 오만으로 민주화운동이 최대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면이 많다.


 


● ‘생명의 눈’ ‘함께살기의 눈’ ‘가난의 눈’을



제 선배는 3김 정치 청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99년 2월 9일 역설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그가 그처럼 싸워온 3김 정치 청산, 구체적으로 사당정치 청산은 97년 제 선배와 달리 김대중 진영으로 돌아간, 3김 정치에 투항한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제 선배와 같은 원칙 있는 정치인들이 “초선의원으로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벌였던 3김 정치 청산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에 묶어내는 그의 육성이 실린 글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좋은 지침이 될 것으로 믿는다. 특히 그가 지적한, ‘물질의 눈’, ‘물리적 힘의 눈’, ‘따로 살기, 끼리끼리 살기의 눈’을 넘어선 ‘사람의 눈’, ‘생명의 눈’, ‘함께 살기의 눈’, ‘가난의 눈’, 그리고 단순히 더 많은 사회과학 공부를 넘어서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 우리 민주화의 위기를 헤쳐 나갈 지침이 될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의장)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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