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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쳐서 나라를 구했다 해도 기억도 못하더라”

고성초등학교 6학년 1반 출신 독립유공자 이재관·이상호·김영주
/최민화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7년 11월 03일
ⓒ 고성신문

고성초등학교. 10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나온 최고(最古)의 학교 그것도 한 반에서 독립유공자

세 명이나 배출됐다.


 


1930년대 초반 이재관, 이상호, 김영주 이 세 명의 까까머리 동무들이 10년쯤 후에는 독립운동을 하고, 60년쯤 후에는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남길 줄 어떻게 알았을까.



멀리 만화방초가 보이는, 산이 뒤를 둘러싸고 앞은 바다가 내려앉은 마을, 거류면 은월리 월치마을을 찾았다. 고성군 다 꼽아 10명도 채 되지 않는 독립유공자 중 한 사람인 이재관 선생의 집을 찾았다.


 


집안에는 오래된 독립유공자 표창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텅 빈 집은 금계 두 마리와 닭 몇 마리만 꼬꼬거리며 지키고 있었다.


마을분들께 묻고 물어 이재관 선생의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산중턱 한우농장을 찾았다.


 


“계십니까?”를 서너면 외치고 나서야 소들 사이로 아들 이성만 씨가 고개를 내민다. 이런저런 것들을 물으려는데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잘 몰라요. 저 밑에 할머니한테 가보세요. 우리 어머니예요”라며 아래로 손짓한다.


언뜻 듣기에 여자목소리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와 꼭 그만큼 가느다란 팔다리가 서있기도 위태해 보인다.


 












열 걸음쯤 떨어진 들깨 밭에 가니 수더분해 보이는 할머니가 혼자서 깻단을 베고 있다. 이재관 선생 부인이냐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고성신문에서 왔다고, 이재관 선생님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했더니 “내는 아는 기 있어 샀나”한다.


이재관 선생은 고성농업실수학교(현 경남항공고등학교) 재학 중 은사 이구희 선생의 민족사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일본 동경농업공예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때 만난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재일한국학생독립단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구국활동을 펼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42 2월 일본 동경에서 체포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고 한다.


 


최도남 할머니는 16살이던 해에 24살이던 이 선생을 만나 결혼했다고 했다.


그때는 예천 감옥에서 출옥해 마을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고성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을 때 서무로 근무하기도 할 때라 독립운동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다만, 일본경찰들이 얼마나 모질게 고문을 했던지, 비오기 전부터 이 선생의 다리며 팔이며 온 몸에 누가 때린 것처럼 멍이 들기 시작해서 쑤시고 아파 견딜 수 없어 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최 할머니는 “그리 해가 나라를 살린 긴데 유공자 지원금이 나와도 저 아들하고, 내하고 둘이 병원비만 하모 그것도 빠듯하다”며 긴 한숨을 쉰다. “그거만 그렇나. ~우 있는 할배 비석에 풀로 좀 뽑을라 캐도 몸이 저런 아들이 가긋나, 다리도 몬쓰는 내가 가긋나”하며 손을 내저으신다.


 


밭 몇 평 있는 것도 산비탈에 있고, 소 대여섯 마리 있는 건 몸이 불편한 아들이 키우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다 보니 소들이 죄다 말랐다.


아들 이성만씨는 올해 37. 할머니 나이 43살에, 이재관 선생 나이 51살에 낳은 늦둥이다.


 


이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대신 농사를 짓겠다는 결정을 할 때쯤 힘이 점점 떨어지더니 급기야 서있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곤 했다. 최 할머니가 “저기 저래서 병원에를 데꼬 가봤드마는 대뇌라 쿠나 그기 작은 거로 눌리서 저렇다 쿠네”한다.


 


대뇌가 커지면서 운동신경, 균형감각 등을 좌우하는 소뇌를 압박해 이씨는 서있기만 해도 넘어지는 것이다. 아들은 뇌병변 장애. 하지만 할머니는 뇌에 이상이 있는 것만 알지 정확한 병 이름도 모른다. 몇 년 전 지금보다 조금 덜하던 때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는데, 기자가 보기에도 1급은 충분히 되겠다 싶을 정도다.


 


아들은 가끔 머리를 싸매고 아야, 아야 소리를 내지르고는 나아지면 “엄마 내가 우짜데요”하고 도리어 묻는다고 한다. 그렇게 심하게 아프고 나면 최 할머니는 “내가 죽고 나모 아들은 우찌 하긋노”싶어서 힘들어도 사는 게 낫단다.


최도남 할머니와 아들 이성만씨를 만난 이후 아들의 장애등급을 3급에서 1급으로 바꾸기 위해 할머니와 기자는 아들과 함께 고성읍내 병원을 찾았다.


 


아들 이성만씨는 손을 놓고는 3m앞의 화장실도 가기 힘들고, 양치질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중증이라 1급으로 변경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뇌병변 장애 3급이 병명이 아니기 때문에 최도남 할머니는 몇 해 전 머리검사를 받은 부산대학병원엘 가기로 했다.


 


하지만 장애1급으로 바꾼다고 해도 보조금은 어차피 유공자 보조금만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삶이 팍팍하긴 마찬가지일텐데 최도남 할머니는 “고마버서 우짜꼬”를 연발하며 한 것도 없는 기자의 손을 놓을 줄 모르신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고성군지체장애인협회 김상수 회장은 아직 회원으로 등록되지 않은 이성만씨의 사정을 파악한 후 기자의 말처럼 중증이라면 한 대에 300만원이나 하는 전동휠체어를 무료로 주겠다 약속했다.


 


또 거류면사무소에서는 할머니 사정을 듣더니 비석 근방의 잡초 제거는 면에서 해줄 것을 약속했다. 이럴 때면 참으로 상투적이지만 너무도 잘 들어맞는 ‘이래서 세상은 살만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이 나라를 지켜낸 독립유공자의 유가족이 이렇게 어렵게 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독립유공자 유가족들은 고된 농사일로 손톱이 갈라지고 겨울이면 손끝이 몽땅 갈라져 아려 와도 나라에서 지원되는 ‘몇 푼’이 있기 때문에 하소연도 못한다. 오죽했으면 고향을 지키지 못하고, 60년 전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 일본으로 갔을까.



은월리 출신이라는 6학년 1반의 또 다른 독립투사 이상호 선생을 찾기 위해 은월리 월치, 신은, 정촌 세 마을의 이장님들께 전화를 드려 이틀 만에 정촌마을 출신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상호 선생의 집안사람이 많다는 도산촌도 근방이라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이상호 선생은 아직 생존해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뵙고 생생한 그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상호 선생을 포함한 가족들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같이 감옥엘 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한 3명의 동지들을 죽인 일본인데 이상호 선생은 일본에 있다고 한다.


 


이상호 선생은 이재관 선생과 마찬가지로 고성농업실수학교 재학 중 이구희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항일사상을 갖게 된다.


이후 일본의 익전농림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초등학교 적부터 친구이던 이재관 선생을 만나게 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역시 재일한국학생단을 조직해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1942 2월 심부름을 하던 아이의 문서를 떨어뜨리는 실수로 재일학생단은 일망타진 된다. 그 일로 이상호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예천경찰서에서 8개월 동안 구류를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이상호 선생은 징역 1 6개월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이상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정촌에도, 도산촌에도 없었다. 이상호 선생은 현재 87. 고령인데다 일찍 일본으로 유학을 간 이후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상호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광복 후 일경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사람들을 사상범이라 말들 했다니, 나라를 살리려다 오히려 나라를 판 사람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힘들었을 테고, 그러니 차라리 일본이 낫겠다 싶었겠지 생각하는 수밖에.


 


최근에 정해진 독립유공자로 넘어갈수록 자료도, 증언도 부족해지는 느낌이다. 이상호 선생을 조사할 때도 자세한 내용이 없어 쩔쩔 맸는데, 김영주 선생은 출신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12 335페이지에 내용이 있다더니 겨우 16줄의 내용이 전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전 고성문화원 황경윤 원장이 김영주 선생에 대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김영주 선생은 고성읍 월평리 출신이지만 어느 마을 출신인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21 10 11일 고성 출생, 동경에 유학을 갔고, 친구 몇몇과 독립운동에 관해 얘기했던 것 외에 다른 자료는 없다.


김영주 선생은 1940년 경 동경에서 전쟁과 노동, 여성문제 등에 관한 문헌들을 접하게 됐다.


 


이후 일제의 한민족차별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40년 말에는 비밀리에 강철규, 나기욱, 엄호영, 노병례 등 학우들과 함께 자주 만나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일본인 내부가 동요되고 있으니 이 기회를 독립운동 전개의 최적기로 이용할 것’등에 관해 계획하다가 1942 4월 체포됐다.


 


이번 기사와 관련해 한 분 한 분 취재를 진행하면서 참으로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인데 정작 은혜를 입은 나라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마구 휘젓고 있었다.


 


말이 좋아 독립유공자지, 어느 분은 아들이 사지를 쓰기 힘들고, 또 어느 분은 나라를 뺏은 일본으로 이주했고, 또 한 분은 출신지도 활동내역도 알 수가 없다.


 


당장 먹고 살기 편하게 만들라는 것도, 돈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부에서든 군에서든 독립유공자에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그들을 알리고, 유가족의 생활을 조금만 돌봐줘도 그들의 나라를 구한 은혜에 조금은 보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영주 선생은 해방 후 판사에 재직한 친구
황경윤 전 문화원장 증언












김영주는 애국동지 4명과 같이 일본검찰에 송치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은 고문과 취조 등 고초를 당하면서도 꿋꿋한 태도는 일본경찰을 놀라게 했다.


일본이 패전하자 방면을 시작했는데, 김영주는 비타민 B1 결핍증으로 전신이 부어서 입고 있던 하의를 벗기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우리 유학생 친구들이 가위를 가지고 와서 하의를 잘라서 벗기는 촌극도 벌어졌다. 죽게 되었으니 방면시킨 것이다.


 


출감하고 나서 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그런데 김영주는 사상범이란 낙인이 찍혀서 졸업증서를 받지 못했다.


 


마침 당시로써는 정말 미인이었던 고향 친구 홍태종의 누님 홍두리 여사가 동양공업학교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을 수없이 방문, 설득해 마침내 졸업증서를 받게 됐다.


 


이후 김영주는 조국이 광복을 맞자 귀국하여 부산지방검찰청에 취직하였다. 그 후로 판사특별임용 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에 임명되어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슬하에는 2 2녀를 두고 있으며 고향인 고성읍 월평리 곡용부락의 선산에 안장되어 있다.


기회가 되면 대전 국립현충원에 이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망일은 2000 12 29일이며 서기 2001 1 20일에 먼저 돌아가신 박숙자 부인 옆자리에 안장되었다.


여기 고성초등학교 동창회장 황경윤의 조사를 이 세상을 하직하는 급우에게 바쳤다.



 

/최민화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7년 1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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