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농촌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봄부터 씨앗을 뿌리고 모를 심으며 찜통 같은 무더위와 마른장마를 견뎌낸 농민들이 이제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콤바인이 논을 누비고 트랙터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그러나 그 풍경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마음까지 풍요로운지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농민에게 수확은 1년 동안 들인 농자재 값과 농기계 구입과 수리비, 인건비를 정산하는 마지막 과정이다. 문제는 농사를 시작할 때는 얼마나 들지, 수확할 때는 얼마나 받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는 중동 전쟁 여파로 비료값까지 올랐다. 일손은 줄었고 인건비는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정작 농산물 가격은 늘어난 비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풍년이면 농민이 웃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최근 농민들 사이에서는 “농사는 지을수록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수확량이 늘어 산지 가격이 급락하면 풍년이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산량이 부족하면 소비자들이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이처럼 농민과 소비자 사이에서 몫을 키워 온 것은 유통 단계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농산물 유통비용률은 1999년 38.7%에서 2023년 49.2%로 높아졌다. 소비자가 낸 돈의 절반 가까이가 중간에서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생산자는 헐값에 팔고 소비자는 비싸게 사는 기형적인 유통구조를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농업을 시장 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업을 시장에 맡겨 둔 채 농민이 농사를 포기한다면 그 피해는 농민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휴경지가 늘고 사람이 줄면 결국 지역 공동화로 이어진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심각한 군 단위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2025년 농림어업총조사에서 농가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은 51.3%로 절반을 넘었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고, 남은 이들은 이웃의 농사까지 걱정한다. 한 사람이 손을 놓으면 그 농지를 대신 맡을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농업정책은 사업 숫자와 예산 집행 실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농민의 실제 소득의 증가 여부다. 행정은 생산 지원을 넘어 판매와 유통, 가격 안정까지 아울러야 한다. 로컬푸드와 직거래로 중간 유통 단계를 줄이고, 대표 농산물은 브랜드화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해야 한다. 농민에게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어디에, 어떻게, 얼마에 팔 것인가”에 대한 답을 행정이 함께 찾아야 한다. 농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행정의 단순 지원이 아니라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수확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문제가 또 있다. 농기계 안전사고다. 도로교통공단 통계를 보면 2020~2024년 농기계 교통사고 100건당 사망자는 15.4명으로 일반 교통사고의 11배였고, 사고를 낸 농기계 운전자의 73.6%가 65세 이상이었다. 사망자의 88.8%는 전복·추락 같은 단독사고에서 나왔고, 안전띠를 맨 사망자는 4.8%에 불과했다. 농민에게만 조심하라고 할 일이 아니다. 행정은 수확철에 앞서 등화장치 설치 지원 및 위험 구간 점검 등 실질적인 안전조치에 나서야 하며, 자동차 운전자도 농기계를 만나면 무리하게 추월하지 말아야 한다. 몇 분 먼저 가는 것보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다. 이제 풍년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황금빛 들녘만 풍년이어서는 안 된다. 농민의 마음도, 소득도, 농촌의 일자리와 사람도, 무엇보다 사고 없는 안전한 수확이 풍년이어야 한다. 농산물 가격은 왜 불안한지, 생산비는 계속 오르는데 농가소득은 왜 따라가지 못하는지, 농민들은 왜 판로를 걱정하는지 우리 지역의 행정과 정치권이 답해야 한다. 올가을, 우리 지역의 행정과 정치권이 진정으로 돌아봐야 할 곳은 화려한 행사장이 아니라 땀으로 얼룩진 농민들의 작업장이다. 그곳에 농촌의 오늘이 있고, 지역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