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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면 이 아이는 어쩌나”

초고령 사회, 발달장애 가족을 지키는 ‘자기신탁’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10월 16일
ⓒ 고성신문
젊은 날 고향을 떠나 일찍이 경남 고성에 터를 잡은 한 어르신의 이야기다. 홀몸으로 낯선 고장에 내려와 바닷바람과 흙먼지를 맞아 가며 평생을 아끼고 모은 끝에, 이제는 매달 일천만 원의 임대료가 나오는 상가 건물을 이루었다.
남들 눈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고성의 건물주지만, 정작 어르신의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아내와 두 아들,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중 맏아들이 걱정이다. 첫째는 태어날 때부터 발달장애가 있어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제 앞가림조차 버거운 저 아이를 두고 내가 눈을 감으면 누가 끝까지 돌보아 줄까. ‘내가 떠나면 이 아이는 어쩌나.’ 거울 속 깊어진 주름을 볼 때마다 어르신을 떠나지 않는 걱정은 오직 이것 하나다.
고민은 꼬리를 문다. 평생의 땀이 밴 건물을 팔자니 아깝고,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 소도시에서 제값에 사겠다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설령 판다 해도 양도소득세를 떼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이 많지 않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둘째 딸을 보면 안쓰럽다. 치솟은 집값에 신혼살림 차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추석 고성 본가에 인사 온 예비 사위는 딸아이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 고마우면서도 장인의 재력을 보고 전세금이라도 보태 주기를 바라는 눈치인 듯해 마음이 씁쓸했다.
지금이야 몸이 성하니 건물을 관리하고 임대료로 가족을 챙기지만, 치매가 찾아와 판단력을 잃거나 세상을 떠나는 날 이 집안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캄캄하다.
이것은 이 어르신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평생 땀 흘려 논밭과 집을 일군 고성의 많은 부모가 똑같은 걱정을 안고 산다. 흔히들 유언장을 써 두거나 살아 있을 때 미리 자식에게 명의를 넘기는 증여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현실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부모가 떠나자마자 형제끼리 재산을 두고 다투고, 몸이 불편한 맏아들의 몫은 사기나 다른 형제의 사업 실패에 휩쓸려 사라지기 쉽다. 건강한 자녀의 빚 때문에 건물 전체가 경매로 넘어가, 장애가 있는 자식이 보금자리에서 쫓겨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애써 물려준 재산이 오히려 가족을 갈라놓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이런 걱정을 풀어 주는 오래된 지혜가 바로 ‘신탁(信託)’이다. 고성의 많은 군민은 신탁이라 하면 서울 여의도의 큰 금융회사나 수백억 자산가들만 하는 것으로 여겨 지레 포기한다. 금융기관에 매달 비싼 수수료를 내야 한다거나, 시골 부동산 몇 개로는 어림없다는 오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법은 금융회사를 거치지 않고 가족이나 개인끼리 맺는 ‘민사신탁’을 폭넓게 허용한다. 매달 나가는 관리 수수료가 없고, 무엇보다 재산을 남에게 파는 것이 아니어서 사고팔 때 무는 무거운 세금, 곧 취득세가 들지 않는다.
신탁을 등기부에 올리는 데 드는 비용도 등기 비용과 공증·법무사 수수료 정도의 적은 실비에 그쳐, 건물을 팔거나 증여할 때 무는 세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적다. 고성 군민 누구에게나 문턱 없이 열린, 실속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은 신탁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핵심은 부모가 스스로 재산 관리자가 되는 ‘자기신탁’에 있다. 건강한 지금, 본인이 그대로 관리자가 되어 자신과 장애가 있는 아들을 함께 수익자로 삼는 신탁을 세우고 건물 등기부에 올린다.
이때 자기신탁은 공증을 한 번 받아 두어야 효력이 생긴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소유권과 관리 권한을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고 본인이 그대로 쥐고 있으면서도, 등기부에 ‘신탁’이라고 새겨지는 순간부터 그 건물은 본인의 다른 재산과 분리되어 따로 보호를 받는다. 이 덕분에 훗날 재산을 맡은 사람이나 자녀 개인에게 빚쟁이가 생기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빚을 이유로 건물에 압류를 걸거나 강제로 처분할 수 없다. 신탁의 가장 큰 힘은 부모가 눈을 감은 뒤에 드러난다.
길고 지루한 상속 다툼을 거치지 않고, 신탁을 세울 때 적어 둔 생전의 뜻 그대로 재산 관리가 곧바로 이어진다. 건물의 소유권은 신탁이라는 금고에 넣어 누구도 함부로 팔지 못하게 하고, 매달 나오는 일천만 원의 임대료만 부모의 뜻대로 나눈다.
발달장애가 있는 맏아들에게는 평생 매달 생활비와 간병비가 꼬박꼬박 지급되도록 해 두어 낭비나 가로채임을 막고, 서울의 딸과 다른 아들에게도 정한 규칙에 따라 공평하게 나눈다. 건물을 헐값에 팔거나 양도소득세를 무겁게 물 일도 없고, 사위나 친족의 섣부른 욕심에 재산이 흩어질 걱정도 크게 덜 수 있다.
그래도 뒷날 재산을 맡은 사람이 딴마음을 먹고 건물을 몰래 팔아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수 있다. 등기 제도가 이런 위험까지 막아 준다. 신탁을 등기할 때 등기소에 함께 내는 ‘신탁원부’라는 서류에 ‘자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건물을 마음대로 팔거나 담보로 내놓을 수 없다’는 조건을 분명히 적어 두면 된다. 등기소에서 등기 신청을 접수하고 심사해 처리하는 등기관은 제출된 서류만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재산을 맡은 사람이 매매계약서를 들고 와도 이 조건에 걸려 소유권을 넘기는 등기를 받아 주지 않는다.
세금도 한 가지 짚어 두자. 신탁을 한다고 해서 상속세나 증여세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애가 있는 자녀를 위해 재산을 맡겨 두는 경우에는 법이 따로 마련해 둔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느냐에 따라 혜택의 크기와 조건이 달라지므로, 구체적인 절세 방법은 세무 전문가와 상의해 정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나 신탁의 참된 가치는 세금을 줄이는 데 있다기보다, 재산이 흩어지지 않게 지키고 부모의 뜻대로 물려주는 데 있다.
피땀으로 일군 터전은 자식을 위해 청춘을 바친 고성 부모들의 역사다. 이 결실이 부모가 떠난 뒤에 흩어지거나 자식 간 불화로 얼룩져서는 안 되며, 세상 물정 모르는 아픈 손가락의 삶을 무너뜨리는 불씨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신탁은 부모가 떠난 뒤에도 그 뜻이 자녀와 가업을 지키게 하는 가장 지혜로운 사랑의 방법이다.
내가 떠나도 이 아이의 삶은 존엄하게 이어져야 한다. 고성의 모든 부모가 신탁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평생 일군 재산을 지키고, 자녀의 삶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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