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류산 정상에 올라서면 고성의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은 장엄하지만, 이 높은 산 정상에서 예부터 맑고 차가운 물이 솟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곳에 석정(石井), 선인정(仙人井)이라 불리던 작은 샘이 있었다. 해발 571m의 거류산 정상에서 물이 솟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비롭다. 그러나 선인정이 더욱 소중한 까닭은 단순히 물이 솟는 샘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는 오랜 세월 고성 사람들의 삶과 믿음, 기원과 기억이 함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옛 기록은 거류산 정상에 샘이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1895년 『영남읍지』 고성부 고적조에는 당시 거류산(巨留山)이라 표기하고, 거류산상봉유석정 수심청랭 속전선인정(巨留山上峰有石井 水深淸冷 俗傳仙人井)이라고 기록하였다. 곧, “거류산 정상에 석정(石井)이 있는데, 물이 깊고 맑으며 차고, 민간에서는 이를 선인정(仙人井)이라 한다”는 뜻이다. 선인정을 둘러싼 전설 또한 예사롭지 않다. 우물 곁에는 누운 소처럼 생긴 돌이 있었는데, 이를 두드리면 오음육률(五音六律)의 소리가 울렸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를 ‘신선이 치던 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석단에서는 신선이 옥피리를 불었으며, 그 소리가 30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설은 허무맹랑한 옛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을 경외하고 산을 신성하게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기록보다 전설이 더 오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남기도 한다. 선인정에는 기우제(祈雨祭)의 전승도 남아 있다. 가뭄이 들면 사람들이 거류산 정상에 올라 비를 빌었고, 칠월 칠석에는 노인과 처녀들이 맑은 물을 떠놓고 고장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샘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이어주는 물이었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더욱 귀한 것은 이 이야기가 문헌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80대 후반의 어르신 가운데에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따라 거류산에 올라 선인정의 물을 직접 마셨던 기억을 간직한 분들이 있다. 오래된 문헌의 기록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승, 그리고 실제로 그 물을 마셨던 사람들의 기억이 한 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둘러 기록해야 할 살아 있는 향토문화유산이다. 거류산이라는 이름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역에서는 태조산(太祖山) 또는 거리산(去吏山)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여지집성』의 고성현 읍지에는 유민산(流民山), 『영남읍지』에는 거류산(巨留山)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러한 전승과 문헌상의 여러 명칭을 거쳐 오늘날의 거류산(巨流山)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산 정상에 선인정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솟아난 작은 샘 하나를 두고 사람들은 신선의 우물이라 이름 붙였고, 가뭄이 들면 그곳에 올라 비를 빌었다. 어린 시절 그 물을 마셨던 사람들은 이제 노년의 기억 속에서 그 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기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샘의 흔적도, 그 샘을 기억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도 사라진다. 따라서 이제는 단순히 옛이야기를 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문헌 자료를 다시 면밀히 고증하고, 현장을 찾아 샘터의 위치와 흔적을 확인하며, 어르신들의 기억을 구술자료로 남겨야 한다. 필요하다면 지질과 수문 환경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여 선인정이 실제로 어떤 환경에서 형성되었고 어떻게 사라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작은 안내판 하나라도 세우자. 거류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높은 산 정상에 옛사람들이 마시던 샘이 있었구나” 하고 알 수 있도록 하자. 더 나아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확인된다면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보존과 관리 방안을 마련할 필요도 있다. 며칠 전 거류산 정상에 올라가 풀숲에 덮여 있던 선인정 주변을 벌초하고 깔끔하게 정비한 뒤 내려왔다. 문화유산은 반드시 크고 화려한 건축물이나 이름난 유적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래된 돌 하나에도 역사가 있고, 이름 없는 샘 하나에도 사람들의 삶이 있으며, 한 사람의 기억 속에도 한 시대의 문화가 살아 있다. 선인정이 바로 그러하다. 사라진 것은 단순히 샘물 하나가 아니다. 그곳에는 목마른 이의 갈증을 달래주었던 한 모금의 물과 가뭄을 이겨내고자 하늘에 빌었던 사람들의 간절함, 신선과 산신을 이야기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던 선조들의 정신이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선인정을 찾는 일은 잃어버린 샘 하나를 찾는 일이 아니다. 그 샘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고, 그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성의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흔적을 찾아 정확히 기록하고 그 의미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유산에 보내는 가장 깊은 예의일 것이다. 거류산 정상의 작은 샘, 선인정. 그 작은 샘 하나가 품었던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샘물 자체가 아니라,그 샘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던 고성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 기억의 물길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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