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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성어민항쟁 참여 13명 대통령표창

1918년 동해면 내산리서 일본인 어업자에 항거
저임금 개선 요구하다 헌병 개입으로 집단 충돌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6년 08월 21일
↑↑ 1918년 10월 14일자 부산지방법원의 고성어민항쟁 판결문
ⓒ 고성신문
1918년 고성군 동해면에서 저임금 노동 등 일제의 식민지 경제 침탈에 맞섰던 고성어민항쟁 참여자 13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경상남도에 따르면 국가보훈부가 제81주년 광복절을 맞아 실시한 독립유공자 정부포상에서 고성어민항쟁 참여자 13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포상자는 고성 출신 조준이·박용수·조영옥·조용조·김재운 선생, 창원 출신 김귀용·박광렬·박영업·오동업·유삼두·이위도 선생, 남해 출신 박원오 선생과 당시 고성에 거주했던 곽명옥 선생이다. 이들은 경남도가 국가기록원 판결문과 형사사건부, 집행원부, 당시 신문과 일제 경찰기록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공적이 확인돼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으로 발굴됐다.
고성어민항쟁은 생존을 위한 임금 인상 요구에서 시작해 일본인 어업자의 저임금 노동과 일제의 식민지 경제 침탈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 공적을 인정받았다. 특히 1919년 3·1운동보다 앞서 수백 명의 어민이 집단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지역 항일운동사에서도 의미가 크다. 당시 상황은 일제 경찰기록인 ‘고등경찰관계적록(경남도)’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판결문 등에 남아 있다.
고성어민항쟁은 1918년 8월 31일 동해면 내산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내산리에서는 일본인 멸치망 어업자들이 조선인 어민들을 고용해 어업을 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물가가 오르면서 생계가 어려워진 조선인 어민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인 어민들의 월급은 3~7원이었으며 일본인 어업자들은 최고 10원까지 인상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부 어민들은 부산 등 다른 지역의 임금 수준을 들어 월 15원을 요구했으나 협상은 결렬됐다.
일본인 어업자들의 요청으로 헌병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충돌로 이어졌다. 국가기록원 판결문 사건개요에는 어부 200여 명의 월급을 조정하던 중 일본 헌병이 박용수 선생을 구타하자 소요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 경찰기록에는 유삼두 선생 등을 중심으로 약 500명이 모였으며, 헌병이 칼을 빼 들자 어민들이 돌을 던지며 맞선 것으로 기록됐다.
항쟁에 참여한 일부 어민들은 이후 일제의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는 한국인 어민 17명이 ‘태90’을 선고받았다. 이 가운데 유삼두·곽명옥·조운옥·박용수 선생은 1918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각각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6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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