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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5주년 특집 - 고성에서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


황영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31일
40년 오랜 세월 땀 흘리며 고성을 일군 지역 곳곳의 주인공들
ⓒ 고성신문

ⓒ 고성신문
서울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바다와 은성호를 지킨 삶
배정호 씨 부부 40년 바다에서 희망을 건져

“서울에서는 돈을 벌 수는 있었지만 제 체질은 아니었습니다. 사람 속이고 경쟁하며 사는 게 싫더라고요. 고향 바다에 와서 힘들게 살아도 이게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일면 가룡마을 선착장에는 올해 예순아홉이 된 배정호 씨의 은성호가 묶여 있다. 해가 지면 바다로 나가고 새벽이 되기 전에 돌아오는 생활을 40년 가까이 이어온 배다. 작은 배는 바뀌었지만 배를 모는 사람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배 씨의 하루는 지금도 바다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봄이면 감성돔을 따라 자망을 놓고, 계절에 따라 도다리와 전어, 물메기 등을 잡는다. 어획량은 예전만 못하고 몸도 젊은 시절 같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배를 탈 생각”이라고 말한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다는 수없이 변했다. 어구도 바뀌었고 어종도 달라졌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가 됐고 갈바람이 몰아치던 겨울바다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배정호 씨의 삶은 한결같았다. 하루하루 바다로 나가 가족을 먹여 살리고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마흔 해를 넘었다.

# 서울을 떠나 다시 찾은 고향
배씨는 처음부터 어부였던 것은 아니다.자란도에서 태어난 그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부모를 따라 지금의 가룡마을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부모가 바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지만 스무 살이 넘어서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세탁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생활했다. 젊은 청년에게 서울은 새로운 기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배 씨는 “서울 생활을 해보니까 우리 체질하고는 맞지 않았다”라며 “사람 속이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이 싫었다. 고향이 훨씬 편했고 결국 다시 내려오게 됐다”라고 말했다.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형과 함께 굴양식 일을 거들며 바다를 다시 배웠다. 어릴 적 부모를 따라다니며 보던 바다와 직접 생계를 책임지는 바다는 전혀 달랐다.“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는 서툴고 힘든 것이 많았습니다.”배 씨는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자망어업을 시작했다. 처음 마련한 배는 1.5톤 남짓이었다. 작은 배는 파도 앞에서 너무 왜소했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가진 것이 많지 않았던 젊은 어부에게는 그 배가 삶의 전부였다.그는 “처음에는 돈이 없어 작은 배부터 시작했다”라며 “조금씩 모아 지금의 배로 바꾸면서 여기까지 왔다”라고 말했다.

# 갈바람을 견뎌낸 세월
배정호 씨의 어업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풍어도, 큰돈도 아닌 바람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바다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북서쪽에서 갑자기 몰아치는 이른바 ‘갈바람’은 태풍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들을 만큼 순식간에 바다를 뒤집어 놓았다.당시 배 씨가 타던 배는 1.5톤 남짓한 작은 어선이었다. 지금처럼 기상예보가 촘촘하지도 않았고 풍랑주의보가 내려지면 출항을 막아주는 제도도 없었다. 바다에 나갔다가 갑작스러운 바람을 만나면 오롯이 어부 스스로 버텨야 했다.그는 사랑도와 욕지도 일대에서 조업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가을이면 갈바람이 갑자기 몰아쳤다. 얼굴로 파도가 덮칠 정도였고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라며 “죽을 고비를 두 번 정도 넘겼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전어 새끼 등을 잡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먼 바다까지 나가야 했다. 작은 배가 높은 파도를 넘을 때마다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이쳤고, 그때마다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 경험은 결국 배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배 씨는 “작은 배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조금씩 돈을 모아 지금의 배로 바꾸게 됐다”라고 말했다.세월이 흐르면서 바다는 달라졌다.기후변화로 예전 같은 갈바람은 거의 사라졌고, 풍랑주의보가 내려지면 해경이 출항을 통제한다. 위험한 날에는 무리해서 바다로 나가지 않는다.

# 손으로 일군 40년
사람이 기계보다 먼저였던 시절 배정호 씨는 어깨와 허리 수술까지 받으며 세월을 견뎌냈다.지금처럼 양식 장비가 없던 시절에는 굴이 달린 줄을 하나하나 손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무거운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허리와 어깨가 먼저 망가졌다.그는 “그때는 기계가 없어 전부 사람 손으로 했다”라며 “결국 허리 수술도 하고 어깨 수술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픈 곳이 없다”라고 말했다.어업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젊은 시절에는 엔진 성능이 약해 욕지도까지 가는 데만 일곱 시간이 걸렸다. 바람이 불면 돛을 이용했고, 더 오래전에는 노를 저어 바다를 오갔다.지금은 사랑도까지 30분이면 닿고 먼 바다도 두 시간 안에 갈 수 있다.

# 변해버린 바다를 바라보며
배 씨는 40년 동안 바다도, 어촌도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예전에는 같은 마을 어민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 다투는 일도 적지 않았다.통발을 먼저 놓았느냐, 그물을 잘랐느냐를 두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지금은 그런 갈등이 많이 줄었다.먹고 사는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고 사람들의 마음도 예전보다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다.그러나 다른 고민이 생겼다.고기는 줄고 값도 떨어졌다.30여 년 전 감성돔 한 마리가 3만 원에 거래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기름 한 드럼 값은 3만 원 안팎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름값과 어구 값은 몇 배나 올랐는데 감성돔 값은 오히려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어획량과 고기값은 갈수록 떨어지지만, 오늘도 은성호는 바다로 간다.마을 사람들은 젊은 시절 태풍이 불어도 바다로 나가는 배 씨를 보며 “저 사람은 미쳤다”라고 말하곤 했다.그만큼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한 어부였다.그렇게 번 돈으로 빚을 갚고, 집을 짓고, 배를 바꾸고, 두 자녀를 대학까지 공부시켰다.예금은 많이 남기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애들 둘 다 잘 키웠고, 식구들 건강한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예순아홉이 된 지금도 그는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다.그렇게 은성호는 오늘도 가룡마을 선착장에 조용히 닻을 내리고, 내일이면 다시 새벽 바다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한다.“예전에는 봄만 되면 들치가 엄청 들어왔는데 지금은 구경도 하기 어렵습니다. 바다가 예전처럼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곱창냄새와 함께 지켜온 서외오거리 40년
ⓒ 고성신문
↑↑ 40여 년 고성은 많이 변했지만, 서외오거리에서 한결 같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제찬호·김계자 씨 부부.
ⓒ 고성신문

사람 만나고 움직이는 일이 지금도 살아가는 힘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요. 그래도 이 일을 놓으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이제는 생활이 됐습니다.”고성읍 서외오거리에서 ‘서외오거리 곱창’을 운영하는 제찬호(76)·김계자(73) 씨 부부는 4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손님을 맞아왔다. 부부에게 식당은 단순히 생계를 잇는 일터가 아니다. 두 자녀를 키우고 집을 마련하며 지역 사람들과 인연을 쌓아온 삶의 터전이다.

# 두 아이를 위해 시작한 식당
부부가 처음 식당 문을 연 것은 1987년이다. 제 씨가 스물아홉 살이던 때였다. 회사에 다니며 마산에서 생활했던 부부는 두 아이를 키우며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려가기 어렵자 고성으로 돌아왔다.김 씨의 오빠가 당시 옛 고성군보건소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음식 장사 경험이 없었던 부부는 친정 오빠에게 일을 배우며 ‘서민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했다.김 씨는 “회사 월급으로 아이 둘을 키우며 살기가 쉽지 않았다. 오빠가 식당을 하고 있어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고성에 들어왔다”라며 “처음에는 장사를 잘 알지도 못했지만 살기 위해 부딪치며 배웠다”라고 떠올렸다.초창기 식당에서는 곱창과 고기뿐 아니라 정식 등 여러 음식을 함께 팔았다. 당시에는 학교에 급식소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주변에 식당도 많지 않았다. 가까운 학교 교직원들의 주문을 받아 음식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도 많았다.김 씨는 “학교에서 밥을 해달라는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낮에는 음식을 만들어 배달하고 저녁에는 식당을 운영했다”라며 “배달하는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가게에서 손님만 기다리는 것보다 수입에는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 외진 길목에서 맛으로 일군 40년
옛 보건소 인근에서 4년가량 장사한 부부는 현재의 서외오거리 자리로 식당을 옮겼다. 당시 이곳은 지금처럼 차량과 사람이 오가는 번화한 오거리가 아니었다. 주변에는 건물이 드물었고 논밭과 오래된 집이 대부분이었다. 도로와 인도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외진 곳이었다.제 씨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주변에 건물이 거의 없었다. 길도 제대로 포장되지 않았고 오래된 집 몇 채만 있었다”라며 “장사가 될지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라고 기억했다.외진 곳까지 손님을 불러 모은 것은 부부가 정성껏 차린 음식이었다. 기존 손님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학교 교직원과 지역 주민들이 하나둘 찾기 시작하면서 식당은 자리를 잡았다. 식당 이름도 ‘서민식당’에서 ‘대가식당’으로 바뀌었다가 주변 도로가 오거리 형태로 정비되면서 현재의 ‘서외오거리 곱창’으로 자리 잡았다.부부는 식당을 새로 지은 뒤 한동안 2층까지 손님을 받았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에는 늦은 밤까지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돌아간 뒤 가게를 정리하면 새벽 3~4시가 되기 일쑤였다.제 씨는 “집을 짓고 처음 몇 년은 2층까지 손님을 받았다. 손님이 나간 뒤 치우고 정리하면 새벽 4시가 되는 날도 많았다”라며 “그때는 젊었으니 견뎠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일했나 싶다”라고 말했다.

# 어려울수록 버팀목이 된 단골손님
김 씨도 “직원을 많이 두지 않고 둘이서 대부분의 일을 했다. 식당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몸이 성한 곳이 없다”라며 “먹고사는 데에는 도움이 됐지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식당 일은 선뜻 선택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털어놨다.오랜 장사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외상이 흔했다. 단골이나 아는 손님이 “다음에 주겠다”라며 식사비를 미루면 돈을 달라고 재촉하기도 어려웠다. 손님을 믿고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었다.다른 식당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지역의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왔다. 부부는 그 이유를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와 인연에서 찾았다.제 씨는 “다른 식당에서는 외환위기 때문에 손님이 없다고 했지만 우리 가게는 생각보다 괜찮았다”라며 “그동안 알고 지낸 지역 사람들과 단골들이 많이 찾아준 덕분이었다”라고 말했다.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지역 경기는 예전의 활기를 좀처럼 되찾지 못했다. 고성 인구가 줄고 젊은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면서 상권도 함께 위축됐다. 식재료비와 인건비 등 운영비는 계속 올랐지만 식당 수입은 과거보다 크게 줄었다.

# 사람이 남은 장사
40년 가까이 장사하며 가장 큰 보람은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왔던 손님이 어른이 돼 다시 식당을 찾기도 한다. 오랜 단골들과 함께 나눈 세월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부부의 자산이 됐다.제 씨는 “식당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알고 지낸 것이 가장 좋았다”라며 “오랫동안 찾아주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장사를 계속해 온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나이가 들면서 식당을 정리할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김 씨의 허리 건강이 나빠지고 제 씨도 체력이 떨어지면서 일을 계속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문을 닫고 집에만 있을 생각을 하면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제 씨는 “장사를 그만두려고 몇 차례 생각했지만 이 일을 안 하면 할 일이 없다. 나이가 들어 집에만 있는 것보다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낫다”라며 “손님들과 이야기하면 시간도 잘 가고 잡념도 줄어든다”라고 말했다.

# 서외오거리와 함께 이어갈 내일
부부는 앞으로 2~3년 정도 더 식당을 운영할 생각이다. 무리하게 많은 손님을 받기보다는 건강을 살피며 오랜 단골들에게 익숙한 맛을 내놓을 계획이다. 제 씨는 여든 살 무렵까지는 가게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1987년 작은 식당에서 출발해 서외오거리의 변화를 지켜온 제찬호·김계자 씨 부부. 외진 비포장길이 오거리가 되고 주변에 건물과 상가가 들어서는 동안에도 부부는 같은 자리에서 불판을 달구고 손님들의 밥상을 차렸다.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힘들어도 그날 해야 할 일을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맞으며 하루하루를 이어왔을 뿐이다. 곱창 냄새가 밴 작은 식당에는 그렇게 부부의 지난 삶과 고성의 변화가 함께 쌓여 있다.부부가 바라는 고성의 미래는 거창하지 않다. 지역에 일자리가 늘어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황영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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