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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靈登)달의 바람을 맞으며

고성의 안녕과 공동체의 지혜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13일
ⓒ 고성신문
겨울의 매서움이 누그러지고 들녘과 바다가 서서히 숨을 고르는 음력 2월, 우리 선조들은 이달을 ‘영등달’이라 불렀다. 바람을 관장하는 신, 이른바 ‘영등할매(영등신)’가 하늘에서 내려와 보름 남짓 머물다 다시 오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삶을 좌우하는 힘이었다. 농경과 어업에 의지하던 시절, 바람의 세기와 방향은 곧 한 해의 풍년과 풍어를 가르는 운명이었다.
민속학 자료에 따르면 영등신은 음력 2월 초하루에 강림해 보름 무렵 돌아가는 계절 신으로 전승된다. 이는 국립민속박물관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관련 항목에서도 확인된다. 계절 전환기 바람의 변덕을 공동체적으로 관리하려는 생활 경험이 신앙의 형태로 체계화된 것이다.
특히 바다와 인접한 우리 지역은 바람의 영향이 절대적인 고장이다. 거센 해풍은 어로 활동을 좌우했고, 봄바람의 강약은 씨 뿌림의 시기를 가늠하게 했다. 이처럼 자연 앞에 겸허했던 지역민들은 영등할매를 정성으로 맞이하며 재해 없는 한 해를 빌었다.
영등날 아침이면 대문 양쪽이나 문설주 아래에 붉은 황토를 세 무더기쯤 쌓아 두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토설(土設)’ 또는 ‘황토 펴기’라 한다. 붉은색은 예로부터 부정과 잡귀를 막는 벽사(辟邪)의 상징이었다. 이는 “이 집은 신을 모실 준비가 된 정결한 공간”임을 알리는 표식이자, 부정한 기운의 출입을 경계하는 생활 규범이었다.
금줄을 치고 정화수를 떠 놓으며, 머무는 동안 큰 공사나 출어를 삼가던 금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바람이 변덕스러운 시기이니 조심하라는 선조들의 경험적 지혜가 의례의 형식을 빌려 전승된 것이다. 영등할매가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이 잔잔하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바람이 거세다는 속설 또한 해학 속에 자연 관찰의 통찰을 담고 있다.
제주에서는 이러한 신앙이 더욱 정교한 의례 체계로 발전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상도 지역은 이에 비해 비교적 간소한 제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맞이·머묾·송별의 순환 구조와 풍요를 기원하는 공동체 정신은 동일하다.
영등달의 의례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위협을 공동체적 질서로 관리하려는 사회적 장치였다. 음력 2월은 한반도에서 계절풍의 변화가 큰 시기다. 사람들은 바람을 신격화함으로써 위험을 공유하고, 금기를 통해 행동을 조율하며, 음식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 연대를 강화했다. 신앙은 곧 공동체의 안전망이었다.
오늘날 대문 앞 황토 더미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영등달이 지닌 본질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함께 기원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규범을 지키는 태도, 이것이 영등 신앙의 핵심 가치다.
산업화와 개인화가 깊어질수록 공동체의 결속은 느슨해지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우리 곁을 스친다. 기후 변화와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금 자연과의 공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선조들이 영등달에 보여 준 겸허와 연대의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
대문 앞 황토는 사라졌을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정결과 배려의 황토’ 한 무더기씩을 쌓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영등달의 바람이 거센 두려움이 아니라, 고성을 깨우는 희망의 봄바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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