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6-05-15 03:32:16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연재기획

[제107주년 삼일절 특집] 고성시장에 번진 “대한독립만세”, 107년 전 그날을 다시 읽다

첫 거사 좌절 뒤 이어진 만세운동
만세운동 거점이었던 철성의숙 배만두 박거수 등 재조명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6년 02월 27일
↑↑ 1930년 4월 9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철성의숙의 당시 모습. 박거수 박진완 배만두 등이 모여 고성읍 만세운동을 은밀하게 결의한 곳이다.
ⓒ 고성신문
↑↑ 현재 고성군여성친화공간 담소랑은 옛 객사터로, 이 주변은 쌀과 나무 등을 팔던 고성시장 싸전이었다.
ⓒ 고성신문
↑↑ 가운데 카페가 고성읍 만세운동의 출발지였던 고성시장 철성상회 터. 고성군청 고성군수협 사거리
ⓒ 고성신문
1910년 8월, 조선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조선의 청년들은 값싸고 무한한 노동력이 됐고, 조선 땅은 일제의 온갖 수모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1919년 1월, 대한제국의 황제이자 조선의 26대 왕이었던 고종이 승하했다. 두 달 후 조선에는 대한독립만세의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고성에서도 대한독립만세가 그야말로 들불처럼 퍼졌다.

↑↑ 박거수 선생(1887~1928년)
독립운동가, 철성의숙 설립자
ⓒ 고성신문
# 고성은 무엇 때문에 결행하지 않는가
1919년 3월 15일 밤, 진주 사람 이주현이 조용히 고성읍 덕선리를 찾았다. 철성의숙에서 박거수와 박진완을 만난 이주현이 독립선언서를 꺼내놨다. 박거수와 박진완은 배만두와 이상은, 김상욱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았다. 이틀 후인 17일이 거사일이었다. 처음은 학생들,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합류하기로 했고 뒤이어 농민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이들은 마산가도, 통영가도, 진주가도, 대가가도까지 고성읍으로 향하는 네 곳의 가도를 지나 고성장으로 가기로 했다. 네 곳의 길마다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질 터였다. 그리고 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고성읍을 행진하기로 했다.
거사일 새벽, 학생들과 함께하기로 했던 배만두의 집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인지, 만세운동 계획이 누설된 것이었다. 일본 헌병들은 배만두를 검거했다. 고성의 첫 만세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날의 만세운동 시도는 고성 군내 대한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배만두가 구류된 상황에서도 고성 사람들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도쿄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조선 유학생들이 나섰던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안태원, 부산상업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서주조가 주도해 모여든 동지들과 함께 고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지금 각지에서는 일개 농부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고성은 무엇 때문에 이를 결행하지 않는가.”
3월 22일 정오, 학생 약 200명이 고성읍 시장에 모였다. 군중들 사이에서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터졌다. 학생들이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고성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합류했다. 만세 시위 소식을 들은 일본 헌병과 경찰이 출동해 학생들을 위협하며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대열은 결국 흩어졌다.
4월 1일, 철성면(고성)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김진만, 문상범 등이 앞장섰다. 태극기가 다시 나왔다. 수백 명이 몰렸다.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성 헌병분견소는 사천 쪽 헌병 지원까지 끌어왔다. 재향군인과 소방대원까지 동원됐다. 총검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들었다. 일본 상인들까지 몽둥이를 들고 나와 제지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군중이 몰린 어시장 안은 더 거칠어졌다. 문상범이 달려들었고, 총검에 맞아 휘청이는 그를 일본 헌병이 붙잡아 끌고 갔다. 상황이 위험해지자 만세 대열은 울분을 삼킨 채 흩어졌다. 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진만, 문상범, 김상욱 등 7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마산으로 압송돼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 문상범은 6개월, 김진만은 4개월 옥고를 치렀다.
나라 뺏긴 설움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36년의 세월 동안 고성에서도 수도 없는 항일 독립만세운동은 이어졌다. 지세 인상을 반대하고, 동해면의 어부들은 물론 소작인을 포함한 농민들, 여성과 청년들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그 중심에 철성의숙, 송계의숙과 같은 민족교육기관이 있었다.

# 알아야만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다
철성의숙은 대가저수지 아래에 있었다. 1908년 박거수 선생이 ‘사람은 알아야 하고, 알아야만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다’라며 설립해 국은(國恩)·사은(師恩)·부은(父恩)의 삼은(三恩)을 교육 목표로 삼아 교육했다. 그러니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량산인(無量山人) 박거수 선생은 1887년 고성읍 무량리에서 나고 자라 아호를 무량산인 또는 기전(杞田)이라 했고, 고성 사람들은 기전 선생이라 불렀다.
1904년 음력 4월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그는 상투를 자르고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동안 머물며 학업을 닦았다. 1908년 22세에 고향 고성으로 돌아온 그는 고성읍 덕선리 선동에 철성의숙(鐵城義塾)을 설립, 숙부인 박진완을 초대교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교감이 됐다.
철성의숙의 목표는 글 못 읽는 사람을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박거수는 철성의숙 옛집에서 야학을 열어 직접 주도했고, 5년 뒤 무량리에도 야학을 하나 더 열었다.
1919년 3월, 철성의숙은 고성의 독립만세운동 거점이 된다. 박거수는 배만두·이상은·김상욱이 거사를 실행하도록 막후에서 주도했고, 박거수의 집과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일 ‘에린놈’이라는 몸종을 시켜 읍내 장터까지 은밀히 운반하게 해 군중에게 나눠 주게 했다. 고성읍 성내동 일용잡화상 박효수의 철성상회는 지휘 본부였다. 그러나 이날의 만세운동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박거수는 마산에서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해 해산물·곡물·주단·포목 등을 도산매하고 수출했다. 이익 일부는 상해 임시정부에 정치자금으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1910년 고성체육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을 맡았고, 쌀 열 섬을 내어 농악을 장려했고, 청년단과 신간회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고성청년단은 1921년경 조직됐고 회관은 지금의 고성초등학교 강당 자리였다고 전해진다. 회관 뒤에는 뽕나무밭을 만들고 양잠 실습을 했으며, 읍내 무학동 김재익 집터를 빌려 양철집을 지어 누에를 쳤다. 여기서 나온 이익금은 학생들에게 나눠 생업자금으로 쓰게 했고 청년단 경비는 박거수가 부담했다고 한다.
박거수는 1927년 10월 자녀교육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고, 1928년 음력 3월 23일 서울 태평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운구는 마산까지 내려와 마산역 맞은편에서 원동무역주식회사가 노제를 올렸고, 밤 10시가 넘어 화물차로 고향에 닿은 시간은 다음 날 새벽녘이었다. 빗속에서도 철성의숙 전교생이 영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교직원들도 밤새 영구를 모셨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박거수의 일생과 그 삶의 궤적, 가치를 담은 비석은 그가 설립한 철성의숙 자리가 바라다 보이는 고성읍 선동마을 입구에 지난해 들어섰다.

↑↑ 1973년 삼일절 배만두 선생이 대성초등학교에서 기념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 고성신문

↑↑ 배만두 선생(1896~1979년)
독립운동가
ⓒ 고성신문
# 독립유공자 되려고 한 게 아니다
“고성의 만세운동은 처음 이주현·박진완·배만두·이상은·김상욱에 의해 (1919년) 3월 17일 단행하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비밀이 누설되고 배만두가 붙잡히면서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사연구소의 ‘배만두’에 관한 공식 기록은 이게 전부다. 국가보훈처에서도 배만두는 ‘열거 인물 중 한 명’으로만 나온다. 그런데 배만두의 생애를 따라가면, 3·1운동에서 만주 독립군, 자유시 참변, 해방 뒤 정치조직 활동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이 줄줄이 겹친다.
배만두는 1896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한학을 배웠고 1908년 설립된 고성교회에도 다녔다. 1914년쯤 서울로 올라가 YMCA 야학에서 공부했다. 학업 뒤 들어간 곳이 조선보병대, 창덕궁수비대였다. 순종 호위 업무를 맡았다.
1919년, 배만두는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전국 각지의 3·1만세운동 소식을 듣는다. 3월 15일 고성읍 덕선리 선동마을 철성의숙 교장 박진완 집에서 이상은, 김상욱, 이주현 등과 함께 독립만세 의거를 계획했다. 동원 책임을 맡은 배만두는 학생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런데 3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이 배만두 집을 덮쳐 체포했다. 고성의 첫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으나 남은 이들은 3월 22일, 4월 1일 각각 의거를 일으켰다.
배만두는 경찰서에서 탈출했다. 탈출을 도운 조선인 일본 헌병대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손의 이야기에 따르면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김학열의 부친이라 한다.
탈출 뒤 배만두는 외가가 있는 의령을 거쳐 만주로 갔다. 운남육군강무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교장이 이시영이었다. 배만두는 1921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군 이청천 부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뒤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다. 배만두는 1921년 초 이범석이 이끈 합동민족군이 시베리아로 파견될 때 함께 갔고, 그해 6월 자유시 참변에도 휘말렸다. 살아남아 만주로 되돌아갔다.
1930년 함경도 흥남으로 갔다. 목수와 노동자로 일하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초모 공작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 무렵 재혼했고 큰아들 배영이 1931년 흥남에서 태어났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뒤 서울로 들어가 정세권이 경영하던 건양사에 입사했다. 흥남질소비료공장 작업동 공사, 소록도 한센병 병원 건축공사 현장에 파견돼 일했다.
1930년대 후반 다시 고성으로 돌아가 ‘백일공무사’라는 이름의 건설회사를 만들었다. 이때 그에게 사업밑천을 준 사람이 ‘조선의 건축왕’으로 불리는 기농 정세권 선생이다. 백일공무사의 수익은 독립군 자금이 됐을 것이다. 1940년대에는 ‘김 선생’이 집을 찾았다는데 후손에 따르면 그 김 선생은 약산 김원봉이라 한다.
해방 뒤 배만두는 고성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고성군부위원장, 한국독립당 고성군당위원장으로 일했다. 1973년 3·1절에는 고성 대성초등학교에서 기념 축사를 했다. 1979년 3월 1일 오후 5시, 84세로 숨졌다. 3·1운동 60주년 날이었다. “오직 묵묵히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배만두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않았다. 생전 “독립유공자 되려고 독립운동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땅에 들불처럼 일었던 대한독립의 염원. 그들의 피 맺힌 목소리가 있었기에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우리 뜻대로 살 수 있다. 107년이 지난 지금 그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 지금 우리가 해야 한다. /최민화 기자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6년 02월 27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김근 / 편집인 : 황영호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