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6-05-15 13:03:19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특집

[고성향교 심상정 전교의 서원이야기-8] “조선시대 관학에서 지역 문화유산으로, 고성향교”

1607년 중건, 1800년대 통영 이전했다가 복귀
600년간 지역 교육기관, 성현 제향
유교예절과 가치관 알리는 관학시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12월 26일
↑↑ 고성읍 교사리에 위치한 고성향교는 1398년 창건 이후 약 600년간 지역 유생을 위한 교육기관이자 성현 제향을 위한 공간으로 역할해왔다.
ⓒ 고성신문
ⓒ 고성신문
고성읍 교사리에 자리한 고성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교육과 유교 제례를 담당했던 대표적인 관학 시설이다. 교사리라는 이름부터가 향교가 있는 교동과 사직단이 있는 사동을 합친 말이다.
고성향교는 1398년(조선 태조 7년)에 창건돼 약 600년 동안 지역 유생 교육과 성현 제향을 이어왔으며, 현재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관리되고 있다.

# 600여 년 이어온 관학과 제향의 공간
고성향교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임진왜란 당시 건물이 소실됐고, 전란이 끝난 뒤인 1607년 고성 현령 정여린과 도감 이현 등의 주도로 중건됐다. 이후 1726년에는 행정 여건 변화로 통영군 선도면 죽림리로 옮겨졌다가, 1876년 다시 현재의 고성읍 자리로 이전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 배치는 이 시기를 거치며 형성된 것이다. 1984년에는 전반적인 보수 공사가 이뤄져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조선시대 고성향교는 지역 인재 양성의 중심지였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유교 경전을 배우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고, 이를 통해 지역 출신 관리들이 배출됐다. 향교 교육은 단순한 학문 습득을 넘어 관료로서 갖춰야 할 도덕성과 윤리를 함께 강조했다.
향교는 교육 기능과 함께 지역 교화의 역할도 담당했다. 유교적 예절과 가치관은 향교를 통해 지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고, 이는 지역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림 사회는 교육과 제례, 사회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며 지역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의 확산과 교육 제도의 변화로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점차 약화됐지만, 제향과 상징적 기능은 꾸준히 이어졌다. 고성향교 역시 교육 중심 기관에서 제례와 전통 계승의 공간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 배치로 드러나는 유교 질서,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
고성향교의 가장 큰 건축적 특징은 전형적인 ‘전학후묘’ 구조를 따른다는 점이다. 전학후묘는 앞쪽에 학문을 익히는 공간을, 뒤쪽에 제향 공간을 두는 배치 방식으로, 유교 사회에서 학문과 예를 함께 중시한 사상을 상징한다.
향교 경내에 들어서면 먼저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배치돼 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유교 경전을 배우고 강론하던 중심 교육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강학과 토론이 이뤄졌던 장소다. 명륜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해 유생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됐다. 이곳에서 유생들은 숙식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명륜당 뒤편에는 내삼문을 지나 대성전이 위치한다. 대성전은 고성향교의 핵심 제향 공간으로, 공자와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단정한 박공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공자와 5성, 송나라 유학자 2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대성전 좌우에는 동무와 서무가 배치돼 있으며, 이곳에는 우리나라 유학자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성향교에서는 이 위패를 대상으로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봉행해 왔다. 석전제는 공자와 성현의 학덕을 기리는 대표적인 유교 제례로, 향교가 지닌 제향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입부에 해당하는 풍화루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향교를 드나드는 관문이자 휴식 공간 역할을 했다. 풍화루는 ‘풍속을 교화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향교의 사회적 역할을 상징하는 건물로 평가된다.

# 오늘의 고성향교, 전통을 잇는 문화유산
오늘날 고성향교는 과거의 관학 기능을 넘어 지역 문화유산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봄·가을 석전제를 통해 유교 제례 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향교 공간을 활용한 전통문화 체험과 예절 교육, 역사 교육 프로그램 운영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지역 유림들은 고성향교를 단순한 보존 대상이 아닌,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향교의 역사와 건축적 가치를 알리는 해설 프로그램, 청소년과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전통문화 교육은 향후 지역 문화 자원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성향교는 600여 년 동안 지역 교육과 제례, 공동체 질서를 함께 담당해 온 공간이다. 조선시대 관학으로 출발해 오늘날 지역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기까지, 고성향교는 고성의 역사와 함께 변화해 왔다. 명륜당과 대성전, 동재와 서재가 이루는 공간 속에는 학문과 예를 중시했던 조선 사회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鄕校移建實記(향교이건실기·심상정 전교 번역)
아! 지난 경오년(1860) 통제사 정하응 공과 본읍 수령 유기동 공이 기사년(1858년) 이후 통제영과 본읍이 서로 얽힌 것을 보고, 협의를 풀어 조정하기 위한 뜻으로 조정에 장계를 올렸는데, 이로 인해 읍의 치소를 통제영 안으로 옮겼고, 다음 해 봄에는 교궁을 죽림으로 옮겼다. 이것은 당시의 형편에 따른 임시방편이었을 뿐 백성들의 여론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선비나 백성들은 향교 건물이 통제영에 근접해 있고 관부가 변방에 치우쳤다 하여 모두 답답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고을의 운수가 순환하여 강규형 공이 이 고을의 부사로 내려와 정치를 맑고 공정하게 하고 민정을 잘 살펴 지역 방어의 허술함을 염려하고 도로의 거리가 균등하지 않음을 민망하게 여겨서 읍의 치소를 되돌려놓을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통제영 중군장 김영출 공이 통제영과 읍을 다스리는 불편한 점을 조정에 돌아간 날부터 힘을 다해 주선하였더니, 영상인 이유원 공이 장계를 올린 것이 실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읍의 치소를 돌려 놓으라는 전교가 있었고 향교를 복원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렸다. 이것은 실로 하늘의 뜻이지만 또한 어찌 인심에 감동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본 읍민들은 춤추며 노래하고 선비들 또한 서로를 경축하며 기뻐하였다. 이 공역을 처리함에 실상 일은 크고 힘은 보잘 것 없는데 대한 한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당중에서 특별히 일을 주관할 인원을 천거하여 감역 등 세 책임자를 정하였다. 나같이 모자란 사람도 죽림으로 향교를 옮길 때 상례의 직책을 맡았다 하여 이에 의절 관계를 맡아 함께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이 신중하고 예절 또한 큰 것이어서 우매하고 지식이 얕은 나는 나이 들고 심기가 온전치 못하여 거듭 사양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강 부사가 뜻하지 않게 서울로 옮겨가게 되고, 민치기 공이 고성 부사로 부임하여 향축을 받들어 봉안하고 향교 복구에 더욱 힘써 일을 추진하다가 불행히도 연관(귀인의 죽음)하시니 온 고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며 이건하는 공사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사론은 무학정에 터를 잡으려고 했는데, 옛적에 경영하다가 끝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땅이 얕고 석회질이 많아 공사비가 배로 들어간다 하여 다시 옛 향교의 동쪽 미륵등에
정하였다. 감여가는 미륵등보다 좋은 터라 하였으나 향론이 여기서도 일치되지 않아 부득이 옛터에 그대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때 신상규 공이 명을 받고 남으로 왔는데 부임한 첫날부터 향교 역사를 급선무라 여겨 소임을 맡은 세 임원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일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하여 을해년 단양인 단오에 대성전과 양무가 완성되어 길일을 잡아 봉안하였다. 나머지 각 건물의 공사는 납월에 이르러서야 공사를 마쳤다.
대성전에 십철을 봉안하고, 동서 양무를 설치하는 것 등은 국조의 학제에 따랐으며, 송조 4현을 전내로 승향한 것은 숙종조의 하교에 따랐다. 아아, 우리 부자께서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동국으로 가겠다고 탄식한 뜻은 단지 가상으로 한 말이지만, 진(陳)에 있으면서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한 뜻은 정녕 우리 고을 제자들을 위해 하신 것이다.
한 고을의 문물이 다시 환히 밝아지고, 산천초목이 모두 정채를 띄었으니 이상국과 강 부사의 공로가 이에 더욱 드러난 것이며, 우리 현후의 노력하신 정성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새로 중수하는 날을 맞아 사실의 전말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고, 향인들이 나에게 기록을 위촉하기에 또 그 일에 종사하면서 가만히 보고 느낀 감흥이 있어 감히 한 마디 말로 우리 고을 여러 군자에게 격려하고자 한다.
이제 향교를 복구한 이날은 정녕 기강을 떨치고 풍화를 돈독히 할 때이다. 부자의 실에 들어오고 명륜의 당에 올라 성실하게 읍양하는 기풍이 있고, 낭랑하게 강송하는 소리가 들리며 인효의 근본을 배양하며 덕의의 문을 넓게 열어 후생 제자들로 하여금 긍식할 곳이 있게하여 돌아오도록 한다면 어찌 한갓 우리 고을만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실로 사문의 추앙을 받을 것이니 어찌 각자 힘쓰지 않겠는가.
숭정기원후5병자(1876년) 정월 상한 당말 이병채 삼가 쓰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12월 26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김근 / 편집인 : 황영호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