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향교 심상정 전교의 서원이야기-7] 고성에 뿌리내린 천만리 장군의 충절, 호암사
명나라 출신 조선 귀화한 천만리 장군 정신 담아
산 지세 따라 조성된 보기 드문 구조의 서원
임진왜란의 역사, 한·중 교류의 상징적 가치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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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면 장좌리에 자리한 호암사는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출신 장수로 공을 세웠던 천만리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보통의 서원과 달리 산지에 위치한 보기 드문 구조로 눈길을 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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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면 장좌리에 자리한 호암사는 사암 천만리(思庵 千萬里, 시호 충장공)를 모신 사당이다. 천만리 장군은 명나라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조선을 구한 뒤,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해 정착하며 충절의 삶을 살았다. 호암사는 그의 공적을 기리고 후손들이 제향을 이어가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현재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39호로 지정돼 있다.
# 조선을 구한 명나라 출신 천만리 장군 사암 천만리 장군은 중국 하남성 영양 출신으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몽고 오부추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명나라에 이름을 알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제의 명을 받아 군량을 조달하고,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선에 파병됐다.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며 조선의 위기를 구한 천만리는 전란이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귀화해 조선인으로 살았다. 천만리는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겠다며 왕검성 근처에 거주했다. 명이 멸망하자 고국을 향해 통곡하며 “사람의 도리와 하늘의 이치가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후대의 ‘호암사기(虎嵒祠記)’에도 기록돼 있다. 그는 금강산과 두류산을 오르내리며 시를 남겼고, 조선 선조는 그의 충절을 위로하기 위해 화산군으로 봉했다.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으며 조선 사회에 완전히 융화됐다. 그의 8세손 맹대는 사라졌던 제향 문헌과 제례를 복원하기 위해 1828년 조정에 상소해 조상의 시판(시호를 내린 문서)을 다시 하사받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암처사천공휘맹대공적비(惺菴處士千公諱孟大功績碑)’에는 “문중의 화합과 충효 정신의 본보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천만리는 도성 밖에 나가 고국을 향해 통곡했다고 전한다. 그 후 금강산을 세 차례, 지리산을 두 차례 찾아 시를 읊으며 향수와 충절의 마음을 남겼다. 이러한 그의 충심에 감복한 선조 임금은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그 자손에게 세습 벼슬을 내렸다. 천만리의 후손 태지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성에서 경주로, 다시 고성으로 옮겨와 장좌리에 터를 잡았다. 이후 후손들이 제향 공간을 마련하면서 호암사의 역사가 시작됐다. 숙종 때 대보단에도 배향되었고, 순조 때 불천위 사당으로 창건됐으며, 이후 중건돼 오늘에 이르렀다.
# 시로 남은 충절, 호암사 주련의 의미 호암사에는 조선을 구한 천만리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학봉 김성일의 시가 주련으로 전한다. 동토유황지(東土惟皇地) 정동일국인(情同一國人) 천추난보덕(千秋難報德) 세진팔방진(洗盡八方塵) “동방은 황제의 땅이요, 정의는 온 나라 백성과 같도다. 천추에 그 은덕 갚기 어렵고, 사방의 티끌이 씻기니 세상은 맑도다.” 이 시는 학봉 김성일이 천만리 장군의 은혜를 잊지 못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명군의 공을 찬양한 시 가운데 개인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한·중 교류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한다. 이 주련은 호암사 건축의 상징과도 같다. 충절과 은덕, 그리고 두 나라의 인연이 기둥에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진다.
# 가파른 지세 위의 사당, 호암사의 독특한 배치 서원은 보통 평지에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호암사는 산지의 가파른 지세에 자리하고 있다. 경남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구조다. 전체 경내는 다섯 단의 석축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각 단에는 외삼문, 강당, 내삼문, 호암사 본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린 이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즉, 앞쪽 낮은 곳에는 학문을 익히는 강당을, 뒤쪽 높은 곳에는 제향의 공간을 배치해 학문과 제례의 균형을 상징한다. 사방은 돌담으로 두르고, 자연석 계단이 각 단을 연결한다. 사당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호암(虎巖)으로, 사당의 이름은 이 바위에서 비롯됐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곳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져 예로부터 명당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이 단순한 제향의 장소를 넘어 기도와 학문 수양의 터로서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호암사로 들어서는 길은 외삼문에서 시작된다. 붉은색 판장문에 태극 문양이 그려진 솟을대문 형태의 외삼문은 속세와 성역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한다. 둥근 기둥을 세운 사주문 형식으로, 상인방 위에는 일곱 개의 흥살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마감되었으며, 문 위의 풍판이 비바람을 막는다. 외삼문을 지나면 돌계단을 따라 강당이 나타난다. 이곳은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천씨 문중 자제들의 교육 공간이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구조이며, 중앙에는 마루가, 좌우에는 온돌방이 배치돼 있다. 둥근 주초석 위에 세운 두리기둥이 특징이다. 좌측 방의 문 위에는 ‘운화루(雲華樓)’, 우측 방의 문 위에는 ‘영모재(永慕齋)’ 현판이 걸려 있다. 운화루는 학문이 구름처럼 번성하기를, 영모재는 조상에 대한 숭모의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길 바란다는 의미다. 강당 뒤로는 내삼문이 자리한다. 강당 구역과 제향 구역을 나누는 문으로, 세 칸 가운데 중앙 어간문에는 삼태극 문양이, 좌우 문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의 내삼문은 외삼문보다 화려하며, 경계를 넘어서는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 사당의 중심, 충장공의 위패를 모신 호암사 내삼문을 지나면 호암사 본전이 나온다. 제법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호암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량 구조로, 붉은 기둥과 단청이 조화를 이룬다. 전체 여덟 개의 기둥이 앞뒤로 나란히 서 있으며, 내부에는 천만리 장군의 위패와 시호장, 그리고 목판 68매가 보존돼 있다. 사당의 문은 여섯 짝으로, 각각 상·하 이분된 판장문마다 좌우에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총 12개의 태극 문양이 사당의 정면에 배열되어 음양의 조화와 우주 질서를 상징한다. 호암사 현판의 글씨 ‘虎巖祠’는 사당 뒤편 바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예로부터 이 바위에는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형상’이 서려 있어 강한 기운이 흐른다고 전해진다. 이런 풍수적 요인은 사당이 지닌 정신적 상징성을 더욱 강화한다. 호암사는 건축적, 역사적, 정신적 가치를 모두 지닌 사당이다. 건축적으로는 험준한 산세를 활용해 5단 석축 위에 전학후묘식 건물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구조가 특징이다. 경남 지역 서원과 사당 중에서도 이러한 형태는 드물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군의 사당이라는 점에서 국제적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사당 내부에 보존된 시호장과 목판은 조선과 명의 교류사, 그리고 후손들의 제향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충절과 효의 상징이자 학문 수양의 장으로서 기능한 정신적 가치도 크다. 천씨 문중은 이곳에서 제향뿐 아니라 후손 교육과 문중 모임을 이어오며 지역의 학문과 덕성을 함양해 왔다. 호암사는 단순한 사당을 넘어 명나라와 조선의 우정, 그리고 충절의 전통을 이어온 상징적 장소로 평가된다. 지금도 후손들은 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리며 조상의 뜻을 기리고 있다. 호암사는 임진왜란의 역사, 한·중 교류의 상징, 그리고 고성 지역민의 정신사까지 포괄하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가파른 산자락 위에 오롯이 서 있는 호암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조용한 기운을 품고 있다. 호암사는 충절의 흔적이자, 고성이 품은 역사와 정신이다.
# 호암사기(虎嵒祠記, 심상정 고성향교 전교 번역) 조상들이 살던 옛터에서 ‘비풍’의 노래를 떠올리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사람의 도리가 저절로 일어나 스스로 억누를 수 없는 바 때문이다. 고성군 장좌동은 운림과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으로 천씨 사암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사암공은 중국 영양 사람으로 명나라에서 벼슬하고 몽고 오부추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임진난을 당하여 황명으로 군량 보급 책임을 맡고 이여송 제독과 함께 조선 전투에 출전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적을 섬멸한 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귀국했으나, 공은 홀로 선견지명이 있어 돌아가지 않고 왕검성에 거주했다. 그 뒤 명나라가 망하자 도성문 밖에 나가 고국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드디어 금강산에는 세 번이나 올랐으며, 두류산에도 두 번이나 유람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강개지심을 펼쳤다. 선조 임금이 위로하며 화산군으로 봉하고 그 자손에게도 벼슬을 하게 했다. 그 후 정묘·병자호란을 만나자 주손인 태지가 경성에서 경주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고성으로 옮겨와 살게 되자 숙종 시절에 대보단에 배향했고, 순조 시에 불천위를 창건했다. 그 후 계묘년에 중건하고 충장공으로 시호를 받았다. 지금은 그 자손이 수백 호나 되고 이름난 인물들도 종종 나타나게 되었다. 어느 날 후손 맹대군이 나의 용문산방을 찾아와 기문을 청했다. 나는 일찍이 화산군의 업적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상함을 알고 또 사모하고 있었다. 옛말에 “그 사람을 사랑하면 옥상 위에 날아드는 새도 사랑한다” 하였거늘, 하물며 사람의 혈손으로서 능히 그렇지 않으랴. 나의 소감을 이와 같이 쓰노라. 1871년 중추부사 이선익 삼가 쓰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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