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향교 심상정 전교의 서원이야기-6 300년 이어온 향학열과 공동체 정신의 가치, 고성 육영재
전주최씨 문중 서당 넘어 종합교육기관
인재를 길러내고 지켜낸 전통 교육의 요람
서비 최우순 선생의 충절과 학문의 정신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09월 26일
|
 |
|
| ⓒ 고성신문 |
|
|
 |
|
| ⓒ 고성신문 |
|
|
 |
|
| ⓒ 고성신문 |
|
|
 |
|
| ⓒ 고성신문 |
|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에는 수백 년 세월을 품은 전통 교육의 요람, 육영재가 자리하고 있다. 육영재는 문중의 서당을 넘어, 지역의 향학열과 공동체 정신을 담은 문화유산이다.
# 학이 알을 품은 명당, 학동마을 육영재의 배경이 되는 학동마을은 전주최씨 문중이 입향해 세운 집성촌이다. 17세기 후반, 최형태가 꿈에서 학이 알을 품는 모습을 본 후 그 터전을 찾아 정착하면서 학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고즈넉한 돌담길로 인생 사진 명소라 알려진 학동마을은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전주최씨 최대의 집성촌이자 낙남정맥 이남에서는 하동 금남면 한재와 함께 대표적인 반촌으로 꼽힌다. 국가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돌담은 마을 주민들의 손으로 쌓은 삶의 흔적이다. 마을 주변에서 난 납작한 돌을 차곡차곡 올린 뒤 흙으로 토담을 더하고 덮개돌로 마무리한 구조는 단단하면서도 소박하다. 사철 언제든 그렇지만 특히나 능소화 피는 계절이면 눈 가는 곳마다 그림이다. 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사람 키 높이에 맞춘 구멍이 뚫려 있다. 이는 굶주린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던 구휼의 흔적이다. 담장으로 경계를 나누지 않고 공동체의 인심과 나눔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수백 년 이어온 정신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가 없다.
# 육영재의 역사와 건축 육영재는 1723년, 후손 교육을 목적으로 초가삼간 규모로 처음 세워졌다. 당시 학동마을은 전주최씨 문중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고, 학문을 닦아 후손을 기를 필요성이 커졌다. 이후 학동들이 늘어나자 기존 건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결국 1845년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이때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2칸의 본채로 확장됐고, 사랑채와 곳간채, 솟을대문까지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육영재는 서원의 전통 건축양식을 충실히 보여준다. 본채는 앞면 6칸, 옆면 2칸으로, 지름이 큰 원형 기둥이 사용됐다. 사랑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이며, 곳간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으로 구성됐다.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을 얹은 1칸 규모다. 건물은 동서남북 방향으로 배치돼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내부에는 문짝과 천장에 정교한 목조 장식이 남아 있어 예술적 가치도 크다. 이는 육영재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미학적 감각과 정신 수양을 함께 추구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건축적 특징은 오늘날에도 서원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육영재라는 이름에는 ‘영재를 길러 가문과 사회를 일으킨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공부한 인재들은 정계, 재계, 교육계 등 각 분야에 진출해 활약했다. 한국전쟁 당시 하일초등학교가 전소되자, 육영재는 5년 동안 임시 교사 역할을 하며 지역의 교육을 지켜내기도 했다. 육영재에는 학동마을뿐만 아니라 하일면 전역, 사곡과 상리 등 인근 지역에서도 학동들이 모여들었다. 전성기에는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들은 한문 기초에서 성리학의 심화 과정까지 배웠고, 시문을 짓고 토론하며 학문적 성장을 도모했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는 과정을 아우르는 종합 교육기관인 셈이다. 학동 문중에서만 20권이 넘는 시문집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학문적 깊이를 잘 보여준다.
# 여전히 살아 있는 최우순 선생의 정신 육영재와 학동마을의 교육적 토양은 많은 인물을 길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이름은 서비 최우순 선생이다. 최우순 선생은 1832년 학동마을에서 태어나 7세에 이미 한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어려서 송휘순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고,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매관매직 등 현실의 모순을 보고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했다. 1895년에는 의병을 일으켜 국권 회복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병중에도 피신을 권유받았지만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본래의 호 청사를 버리고 서쪽 문을 연다는 뜻의 서비라는 호를 지어 일본을 향한 문을 닫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서비 선생은 일제가 은사금을 내리며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했고, 강제로 끌려가려는 위협 앞에서도 선비의 기개를 지켰다. 결국 1911년, 그는 스스로 독을 마시고 순절했다. 향년 80세였다. 마을 어귀에는 그의 순의비가 세워져 있고, 언덕에는 서비정이 남아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최우순 선생의 삶은 육영재가 학문 공간을 넘어, 나라를 위한 정신적 지주를 길러낸 곳임을 보여준다. 학문과 인격, 나아가 민족적 양심을 함께 일깨운 터전이 바로 학동의 육영재였다. 육영재는 세워진 지 3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건물과 공간에 담긴 정신은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다.
# 육영재기 (심상정 고성향교 전교 번역)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영재를 길러내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하셨다. 가만히 생각하면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많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 가운데 세 번째에 두셨으니 옛날에 영재를 얻음이 어려움이 아니리오. 우리 재실의 이름이 육영이라 한 지 벌써 40년이라 원래 그 뜻은 배우러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에 오르고, 실에 들어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게 하려는 데 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분발하여 밝아지게 하고, 유약한 자는 스스로 이겨내어 강해지게 하며, 게으른 자는 스스로 힘써 부지런해지게 하여, 재능이 없는 자도 재능 있는 자로 만들고자 함이니, 그렇다면 이름의 공이 어찌 크고 위대하지 않겠는가. 임오년(1882년) 여름에 내 벗 권상칠 보가 이곳에 글을 읽으러 왔기에 드디어 육영재 현판을 써 동문에 붙이니 힘써 면려하라는 뜻이 깊고 절실하였다. 이어서 보인문 편액을 남문에 걸어 증자의 ‘글로 벗을 모아 그 벗으로서 인을 이룬다’는 뜻이다. 돌아보건대 재주 없는 내가 외람되이 예를 다하여 동참하나 나이 어리고 학문이 없어 대우의 촌음을 아끼라는 가르침을 헛되이 하고, 공자의 글을 헛되이 읽었으니 실로 상하를 구별치 못하는 부끄러움이 많으니 어찌 육영의 이름이 있었으리오. 슬프구나. 오당 학생은 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며 일취월장해야 하니 선생은 매양 맹자의 삼락지교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며, 제자는 부형들이 강당을 지은 뜻을 잊지 말고 옥을 쪼개고 갈아 구슬을 만들 듯이 깊은 물에 다다름과 같이 두려워하고 얇은 얼음을 밟듯 전전긍긍 경계하고 두렵게 처신하여 풀잎이 빼어나듯 사람의 재능이 이에 이른다면 이 어찌 우리들의 큰 복이 아니리오. 글을 쓰고 지은 권군과 나 또한 조그마한 도움이 없었다고 하리오. 나는 육영의 뜻으로서 보인지도를 실천한다면 곧 권군 또한 사양치 않으리라. 후손 정진 삼가 쓰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09월 26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