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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다음을 설계하다 산청 수해(水害) 현장을 다녀오며

최상림 (재)고성꿈나무장학회 이사장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08월 14일
ⓒ 고성신문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수해를 입은 마을은 마치 퉁퉁 불어 터져 너덜너덜 찢긴 동화책 한 뭉텅이가 진흙더미 속에 처박힌 모습이었다. 벽지와 가재
구는 흙탕물에 잠긴 채 무너져 있었고, 아이들이 읽던 책은 갈라진 장판 위에 뭉텅이로 뒤엉켜 있었다.
삽을 들고 마대자루를 채우며, 하루아침에 무너진 일상을 긁어내는 작업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집 안 곳곳에 밴 진흙 냄새와 무너진 가구, 부서진 그릇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현장에는 말보다 손이 많아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뼈아픈 진리였다.

폭염 속에서 망연함, 좌절, 피로가 뒤섞여 흐르는 현장에서 ‘복구’라는 단어는 그 무게에 눌려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봉사자들은 낯선 이들과도 금세 호흡을 맞췄다. 삽질과 마대 운반, 가재도구 정리 같은 단순하지만 필수적인 노동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복구의 시작은 장비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을.
재난 앞에서 지역공동체의 힘은 특별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평소 일상 속에서 쌓아온 질서를 그대로 이어가는 힘이었다.
이번 경험은 단순히 봉사의 하루가 아니라, 이상기후 시대가 던지는 경고를 실감하게 한 시간이었다. 기록적인 폭우와 폭염, 반복되는 태풍과 산사태는 더 이상 ‘드문 사건’이 아니다. ‘이상기후’는 이미 일상이 되었고, 재난은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상이변을 ‘돌발 변수’로 보던 관성을 버리고, 그에 맞는 체계적 대응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행정의 신속성, 공동체의 결속력, 정확한 정보 체계, 명확한 책임 구조가 모두 포함돼야 한다.
재난 현장에서 느낀 또 다른 교훈은 대응의 본질이었다. 재난 대응은 특정 매뉴얼로 압축되지 않는다. 같은 매뉴얼이라도, 지역과 사람, 상황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지역 단위 대응력은 결국 ‘평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누구와 함께 준비하는가’, ‘어떤 속도로 반응하는가’의 문제다. 따라서 재난 대응의 미래를 설계하려면, 일상의 질서와 공공의 감수성이 교차하는 접점을 정교하게 재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성군이 향후 기후재난 대응력을 높이려면 다음이 필요하다.

통합 지휘 체계(군청·소방·경찰·민간단체의 즉각적 협력 구조), 지역별 대응 거점(읍·면 단위의 물자·장비 비축소와 교육센터), 시뮬레이션 훈련(매년 이상기후 가상훈련을 통해 주민 참여 확대), 정보 공유 플랫폼(재난 상황을 실시간 공유하는 온라인·모바일 체계) 등이다.
수해 현장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 메시지였다. 이상기후로 인한 재해는 한 번의 피해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의 일상과 사회 시스템을 반복적으로 시험에 들게 하며, 제도의 취약성과 공동체의 결속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제도의 규모와 범위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관계 밀도에 비례해 조정되고, 연결 방식은 환경과 조건에 맞춰 진화할 수 있다. 행정 역시 제도적 설계와 외부 경험이 맞물릴 때 비로소 기능적 생동력을 갖는다.
따라서 ‘고성의 다음’을 설계하는 일은 곧 유연성을 갖춘 행정, 상시적으로 연결된 공동체, 열린 정보 체계를 만드는 일과 같다.

기후 격변의 시대에 복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는 데만 집중하면, 결국 취약했던 구조로 되돌아갈 뿐이다. 우리는 복구와 갱신을 동시에 설계해야 한다.
갱신이란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재난 전보다 더 강하고 유연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위기 대응 리더십 강화(행정과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리더십 훈련), 친환경 인프라 확충(재해 저감형 도로·하천·주거 설계), 사회적 안전망 확대(취약계층 지원, 긴급 주거·생계 보장 체계), 지역 맞춤형 기후적응 전략(농업·어업·관광 등 산업별 기후 대응 로드맵) 등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복구’라는 익숙한 길만 갈 것인지, 아니면 ‘갱신’과 ‘설계’라는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인지. 불확실성과 기후 격변의 시대를 이겨낼 해답은 제도적 감각과 공동체의 단단한 결속 속에 있다.
‘고성의 다음’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평소의 생활 속 작은 준비, 서로를 연결하는 관계망, 위기 때 곧바로 작동하는 시스템에서 싹튼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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