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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사각지대 없는 세대 통합, 같이 돌봄의 가치4] 동갑내기 세 할머니의 향기로운 인생 “함께 돌봄은 함께 사는 것”

경기도 여주시 노루목향기
이혜옥 이경옥 심재식 씨의 공동생활
마을주민과 함께하는 문화 프로그램
옆동네 아이들을 돌보는 생활공동체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4년 08월 23일
ⓒ 고성신문
ⓒ 고성신문
고성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거쳐 꼬박 4시간을 달린다. 경기도 여주시에서도 금사면. 은빛모래라는 이름이 참 예쁘다. 주록리, 사슴이 뛰어놀던 곳이라 노루목이라고 불리는 동네에 이혜옥·심재식·이경옥 씨가 은모래 같이 반짝이는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 서로 일상을 나누는 돌봄
고성의 여름을 알리는 월평리 찰옥수수를 내밀었더니 “안 그래도 어제 옥수수를 먹고 싶었다”라는 말부터 시작해 옥수수와 토마토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날 있었던 일, 동네 누구와 나눈 담소, 밥을 누가 샀다는 등등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도 세 사람의 이야기는 재미나다. 이제 갓 젖을 뗀 아기고양이 축복이도 어느새 다가와 세 사람을 거쳐 기자에게까지 온몸을 부비며 인사를 나눈다. 1953년생 동갑내기 이혜옥·심재식·이경옥 씨의 보금자리, 노루목향기는 언제나 유쾌하다.
‘노루목향기’라는 이름은 마을공동체활동에서 나왔다. 2018년 어느날, 마을행사가 비가 오는 바람에 취소된 적이 있다. 당시 따복공동체지원센터(현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를 통해 작은음악회를 개최했다. 제목은 마을이름을 따 ‘노루목향기에 물들다’였다. 여기서 노루목향기가 시작됐다.
“노인정을 보면 각자 방을 가질 수가 없는 구조예요. 자기 생활이 없는 거야. 그러면 개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나는 눕고 싶은데 옆사람은 일을 하고 책을 본다면 내가 원하는 걸 해결할 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다툼이 생기는 거예요. 공간이 주는 문제잖아요.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나도 저기서 살고 싶다, 하는 공간이 필요한 거죠.”
노루목향기에서는 세 명의 독립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도 공동생활의 중요한 요소다. 각자 공간에서 원하는대로 생활하고, 공동작업이나 회의 등이 필요한 일은 거실에서 함께 한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경계없이 공동생활만을 강조하면 노루목향기는 오래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함께 살면서 서로 이해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게 돼요. 서로 성격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니 조금 이해하고, 서로 선을 넘지 않는 것도 중요하죠. 세 명 중에 두 명이 자식이 없으니 자랑거리가 없는 것도 큰 부분이긴 해요. 자식이 있으면 우리 애들이, 손자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서로 못견딜 텐데 우린 그런 게 없으니 자랑거리가 없는 거야.”
이혜옥 씨와 심재식 씨는 비혼이고 이경옥 씨만 자녀가 있다. 그러니 애초에 자식자랑 같은 건 성립이 안 된다.
이경옥 씨의 손자가 노루목향기를 찾으면 세 명의 할머니들은 공동돌봄을 시작한다. 이혜옥 씨와 심재식 씨는 손자를 돌보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고 재미다.
“이 집에서는 그냥 생활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기쁨을 나누고 함께 돌보는 거예요. 돌봄이라는 게 아주 특별한 정책이나 지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일상을 나누고 함께 사는 일이라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죠.”

# 공동경제활동 ‘주식회사 노루목향기’
“우리 나이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잖아요. 연금 가지고 사는 거예요. 사실 혼자 살려면 연금만 가지고는 힘들어요. 하지만 한 명당 50만 원씩 내서 셋이 살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어요.”
이혜옥 씨와 심재식 씨는 50년이 훌쩍 넘은 친구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교류해왔어도 같이 사는 건 다른 문제였다. 사소한 생활 습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이경옥 씨가 합류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은 같이 지내자 했지만 친구 하나 없는 서울에 사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는 이야기도 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각자 가지고 있던 집은 노루목향기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팔아 조그마한 아파트를 사 임대료를 받는다. 연금까지 하면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 꽤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고 경제활동을 아예 접기에는 체력도 아이디어도 아까워 ‘주식회사 노루목향기’를 만들었다. 주식회사 노루목향기는 사회적기업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예비사회적기업 신청 당시 법무사의 착오로 정관이 일부 누락되는 바람에 결격사유가 돼버렸다. 오히려 잘됐다 싶은 것이, 제도권 내의 사회적기업은 행정적 처리가 복잡하고 그들은 굳이 골치 아픈 일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 할 수 있는 소박한 것들을 하면 될 일이었다.
노루목향기에서는 예전에 사회적경제교육에서 배웠던 솜씨로 직접 수를 놓은 행주 같은 생활용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주록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고즈넉한 농촌의 일상을 느낄 수 있는 농촌민박도 운영한다. 행정적인 복지나 사업 등의 지원 없이도 이들은 충분히 서로 돌보며 살 수 있다.

# 특별한 돌봄보다 평범한 어울림
행정이 주도하는 노인 돌봄 서비스가 하지 못하는 공동체 활동이 노루목향기에서는 노인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직접 찾아내고 활동하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들은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결속하게 했다.
주록리는 고성의 농촌마을처럼 대부분 고령 주민들이 살고 있다. 독거노인도 많다. 보통의 노인들이 그렇듯 시간이 생겨도 노는 방법을 모르니 노인정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일쑤였다. 노루목향기 세 친구들은 동네 노인들이 외롭지 않고 즐거운 노년을 보낼 방법으로 ‘함께 어울림’을 택했다.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좋지만 사실 진짜 동행을 위해선 일상을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마을분들과 활동을 많이 해요. 그런데 그 활동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는 분들이 몇 계세요. 프로그램에 참여하라 하는 자체가 부담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럼 그냥 커피 마시러 오시라 해요. 그럼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활동도 하면서 놀다 가는 거예요.”
볕이 잘 드는 집안 곳곳은 프랑스자수나 미술 프로그램의 공간이 되고, 철마다 다른 꽃들이 색색으로 물들이는 잔디정원은 요가나 천연염색을 위한 공간이 된다. 선생님은 세 친구들인 마을교실이다. 어차피 다 같은 노인들이니 배우는 속도가 느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기다린다. 평생 땅만 일구고 살았던 노인들이 뒤늦게 큰 활력과 재미를 찾았다.
“그분들은 혼자 살아도 다들 자식이 있고 돈도 있고 집도 있고 다 있어요. 단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러니 활동이나 돌봄에 참여하는 게 시작은 힘들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그냥 같이 지내자, 하는 거잖아요. 있는 공간에 그냥 마음 편히 와서 밥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함께 구경도 가고 그런 거죠. 남들이 보면 노인들이 다른 노인을 돌본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린 특별히 돌봄을 위해 뭔가를 하기보다 같이 지내는 거예요.”

# 아이 돌봄은 공감대와 제도개선이 필요
2021년에는 옆동네의 아동돌봄공동체인 산북작은놀이터와 협약해 새로운 손자들도 생겼다. 당시 경기도에서는 엄마들이 아동돌봄공동체를 만들면 행정이 공간을 지원하는 형태의 사업을 추진했다. 소문을 듣고 사업 현장에 세 할머니가 가보니 아이들은 많은데 공간은 좁았다. 노루목향기에 아이들이 찾아오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언제든 와서 놀다 가라고 했다. 할머니 셋이 모여살던 노루목향기는 ‘오다가다 학습관’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할머니집’에 와서 그림도 그리고 물총놀이도 하고 간식도 나눠먹으며 숙제도 하고 놀기도 했다. 농촌이자 산골인 주록리의 넉넉한 자연과 할머니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간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가끔 엄마아빠가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때에는 아예 노루목향기에 와서 며칠씩 지내고 가는 아이도 생겨났다. 많을 때는 16명까지 노루목향기를 찾아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세 할머니들은 물론 동네 전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야 아이들이 와서 왁자지껄하니 좋았지. 그런데 엄마들은 마음이 달랐던가 봐요. 아이들이 할머니들한테 폐 끼칠까 봐 불편했던가 보더라고요. 우린 그저 함께 놀아주고 챙겨 먹이는 게 즐거웠는데 엄마들은 차라리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기관에 맡기는 게 마음이 편했던가 봐요.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죠.”
아이들의 진학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언제까지나 놀게 할 수는 없으니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도시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당장 고등학교, 대학교가 걸린 문제이니 한편으론 이해도 됐다.
“우리가 아무리 잘 돌보고 좋은 공간을 제공하고 같이 놀이 프로그램을 한다고 해도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지역 노인이 지역 아동을 돌보는 건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완전한 지역공동체 실현은 힘들 수 있어요. 단순한 돌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거죠. 그러니 지역에서 노인과 아동 돌봄을 동시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감대와 환경, 제도적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역소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노인이 외롭지 않고 아이들이 행복한 것이다. 세 할머니들의 공간, 노루목향기의 마당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지역의 노인이 지역의 아동을 돌보며 지역 공동체가 되살아나고 지역이 활성화되는 것, 노루목향기 마당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4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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