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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슬옹 고이장례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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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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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복잡하고 번잡한 장례식은 고인을 조용히 보내드릴 수가 없다. 누가 오고 가는지도 모른 채 인사에 바쁘고, 상주와 가족들은 손님 치르느라 정작 고인과 이별에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할 수가 없다. 충분히 슬퍼해야 보내는 마음이 덜 힘들다. 고이장례연구소 송슬옹 대표도 이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창업으로 이어졌다.
“스무 살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절하느라 정신없고, 누가 왜 왔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의례 절차가 불필요한 형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 생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탓에 저는 커다란 죄책감과 우울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미안하고 고마웠던 마음을 온전히 전해야 일상으로 쉽게 돌아갔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겪었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송슬옹 대표는 스스로 질문해봤다. ‘나의 엄마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를 보내드린 방법처럼 장례를 치러야 할까?’. 답은 ‘절대 아니다’였다. 그럼 누구든 새로운 장례문화, 바람직한 장례문화를 제시하고 실천해야 했다. 송슬옹 대표는 내가 해보자, 싶었다.
# 고인을 더 잘 보내드리는 일 송슬옹 대표의 아버지 송호준 씨는 장례지도사, 어머니 김민정 씨는 꽃집 준플라워를 운영하며 근조화환을 판매한다. 어린 슬옹이는 엄마 가게에서 근조화환을 만드는 걸 보며 자랐고, 철이 들면서는 아버지를 따라 장례식장에 근조화환을 배달하기도 했다. 그러니 장례는 익숙했다. 다만 업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송슬옹 대표는 고성에서 나고 자라 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거창 대성고에 진학했다. 공부를 잘하기도 했고 재미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고성신문 학생기자로 2년 연속 활동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선, 삶의 이면을 보는 눈도 키웠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했고 경제학과 벤처경영학을 전공했다. 기업이 탐낼만한 인재로 성장했다.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탄탄한 직장에 들어가 보장된 성공을 노리고 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이별은 청년 송슬옹의 생각을 바꿔놨다. 나의 부모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생각은 스타트업 창업으로 이어졌다. “젊은 사람이 장례업체를 창업한다고 하니 의아해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자주 장례식을 접한 덕분에 터부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장례절차를 잘 모르는 우리 세대가 나중에 가족의 죽음과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잘 보내드리려면 그 정보와 절차를 상세하게 알려줄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의미있는 장례식, 고인을 더 잘 보내드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벤처회사에 근무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그리고 할머니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장례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해보자 싶었다. 부모님께 그런 생각을 전했다. 장례업체를 창업하겠다 하니 부모님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모르면 모를까, 늘상 장례식장을 드나드는 부모님은 아들이 힘들까 봐 걱정이었다. 어머니 김민정 씨는 “처음 창업하겠다고 했을 때는 놀랐죠. 반대도 했어요. 하지만 아들이 모든 상황에 대해 상의해주니 아들을 믿었습니다. 아들이 선택했다면 그만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자라온 환경이 이렇게 무섭구나, 싶기도 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아버지 송호준 씨는 더 반대했다. 꼭 이걸 해야겠냐고 몇 번이나 묻기도 했다. 자식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편안하게 살길 바라는 건 당연한 부모 마음이니. 하지만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가능성을 말하며 확신에 찬 아들의 도전을 지지하기로 했다. 아들이 자기 길이라면 그게 맞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부모님이 가장 든든한 지지자다.
# 포기하지 않으면 돌파구는 있다 송슬옹 대표는 2021년 9월 장례 스타트업 ‘고이장례연구소’를 설립했다. 송 대표와 20명의 임직원 모두 20~30대의 청년들이다. 베이비부머 이후 세대는 장례절차에 대해 잘 모른다. 상조회사에 맡기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러니 막상 일이 닥치면 우왕좌왕하게 된다. 한 달에 장례 관련 검색은 65만 건에 달할 정도로 수요가 높지만 장례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는 없었다. 고이는 여기에 주목했다. 고이장례연구소는 단순한 장례서비스 제공이 아니라 데이터셋 40만 개, 철저한 분석과 다양한 정보를 통해 큰일을 앞둔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준다. 이런 전략은 별도의 광고 없이도 사이트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홍보하는 기회가 됐다. 상조업체들 중 일부가 선수금 보전의무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으면서 일명 사금고가 돼버리는 일이나 폐업하면서 환불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송슬옹 대표는 이런 위험에 대한 고객들의 우려를 애초에 차단하는 ‘100원 상조’도 출시했다. 선수금을 받아 돈을 굴려 기업이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것이다. 실제 비용은 장례 후 산정해 청구하는 형태라 고객들의 부담을 덜 수 있어 반응이 좋다. “지난해 10월 결혼했는데 9월 30일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나니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잠시 막막하긴 했어요. 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포기하지 않으면 돌파구는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대표는 업체와 직원을 책임지는 사람이에요. 책임을 지는 것과 책임에 눌리는 것은 다른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임지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러려면 실행해야 해요. 아직도 부족하죠. 하지만 우리 팀의 힘을 믿으면 못할 건 없습니다.”
# 장례문화의 변화 이끄는 청년 창업인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성을 떠나 있었지만 마음이 지칠 때면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든든합니다. 고성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자연이 주는 넉넉한 여유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일을 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래서 저는 늘 고향 고성을 떠올리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송슬옹 대표는 고성신문과도 인연이 깊다. 거창 대성고에 진학하기 전 철성중학교에 재학하면서 학생기자로 2년 연속 활동한 적이 있다. “기자단 활동은 특별한 기억입니다. 기자라는 직업의 본질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죠. 중학교 때부터 학생기자로 활동하며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도 숱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공부할 때도 그랬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끊임없이 탐구했다. 성적이 좋은 것을 원하기보다 야무지게 알아야 속이 편했다. 그런 습관들 덕에 창업 전에도 숱한 모델들을 만들고 분석한 후 계획을 세우고 고이장례연구소를 창업할 수 있었다. “회사 이름에 ‘상조’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것만으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말이 주는 힘은 대단히 큽니다. 그래서 상조산업이라는 틀에 우리 회사를 가둬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가진 더 큰 꿈,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고향인 고성은 초고령사회입니다. 제가 고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예요. 언젠가 고향에도 힘이 되고 싶습니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장례식도 변하고 있다. 조문객이 오면 상주는 절하고, 조의금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의 삶을 정리하고 추억하는 장례로 바뀌고 있다. 고성 청년 송슬옹 대표가 이루고자 하는 일 또한 이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깊은 슬픔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되짚어보고 함께 추억하며 아름다운 마지막을 공유하는 것, 말이다. 송슬옹 대표의 이름은 ‘슬기롭고 옹골차다’라는 뜻이다. 송 대표의 말처럼 ‘말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그는 슬기롭게 세상의 변화를 읽고, 옹골차게 미래를 준비한다. 그의 삶이 곧 이름이지 않은가. “갑자기 창업하겠다는 아들을 믿어준 부모님, 결혼식 앞두고 통장 잔고도 없는 남편을 믿어준 아내, 모두 사랑합니다. 누군가의 믿음만큼 큰 힘이 되는 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아직까지 아주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않았더라도 늘 함께해주는 사람들,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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