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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독서에 빠진 할매, 흐드러진 봄꽃을 보고 또 봅니다 내 생애 몇 번이나 더 저 봄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일을 향해 걷습니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6월 23일
↑↑ 집 앞 꽃시장에 나가서 이번 봄에 데려올 식물들을 살피고 있다.
ⓒ 고성신문
유월 초, 딸과 단 둘이 이태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의 설레임은 접어두고 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생각 중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의 회한을 얘기 해야겠다. 나는 지금도 내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고 숨통이 막힌다. 세수를 하다가, 차를 마시다가 울컥해져서 앞가슴을 두드리곤 한다.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어머니를 건사해 드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회한이다.

나는 고성읍내 덕선리에서 태어났다.
창원정씨, 상자, 묘자 아버지는 남매를 낳고,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다.
증조부모님, 조부모님이 살아계신 집, 새파랗게 젊은 내 어머니는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묵묵히 견디셨다. 농사가 많았고 일도 그만큼 많았다.
여고생이 될 즈음, 나는 문학소녀가 되었다. 세계명작을 읽으며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토스토이의 ‘안나까레리나’와 ‘전쟁과 평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작품들은 내게 많은 생각을 주었다. 밤이 깊도록 소설에 빠졌고 존재의 이유, 생과 사, 혈육의 정을 떠올리며 인문학적 사유(思惟)가 넓어졌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 올렸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흑백 사진 속에서 빙그레 웃고 계신 아버지 뿐이셨다. 부재의 그리움이 아무리 짙어도 내 어머니에 비할까?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잡고 단단히 타이르셨다.
“여자도 공부를 해야한다. 그래야 제 몫을 찾으며 살 수 있는 게지. 어떻게 해서라도 학비를 대 주마. 너는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려무나.”
그 당시 분위기는 고졸도 감지덕지였다. 어른들은 나의 대학 진학을 탐탁치 않아 하셨다.

전주 최씨 가문의 여식이셨던 어머니는 영민하고 지혜로운 분이셨다. 남편도 없는 집안에서 딸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셨다. 여간해서는 허락을 받기 힘들겠다 싶으셨던지 정씨 집안의 대학생들을 우리 집으로 불러들였다. 방학이면 회화면 출신의 서울대학생이었던 오빠, 부산대 대대장을 하던 아재, S언니로 여고시절 내내 나를 돌봐주셨던 남산밑 영자 언니까지 불러들여 증조부님과 할아버지께 대학생들과의 면담을 주선하시었다.
“조부님, 그리고 아버님, 도시에서 대학물 먹은 청년들은 어딘가 다르지요? 저도 딸과 아들을 저렇게 훤훤한 대학생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처음엔 반대하던 조부님께서도 청상과부로 열심히 살아가는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다. 하여 나는 부산사범대 1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 2학기가 되자 우리 과는 교육대학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시위와 집회를 벌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결국 부산교대 제1회 졸업생이 된 것이다.
대학 다닐 때 고성향우회 모임에서 멋진 오빠를 만났다. 부산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사법고시 합격률이 더 높다는 동아대 법대로 전학한, 인물 잘 생기고 똑똑한 남학생이었다.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킬 결심으로 눈빛은 형형히 빛났고 포스가 남달랐다. 우린 동향이었고 객지의 외로움을 서로 나누면서 정이 들었고 급기야 사랑에 빠졌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오빠, 내 심장을 내줘도 아깝지 않을 오빠, 죽음도 불사할 사랑이었다.

↑↑ 1966년, 신혼여행 갔을 때, 이런 세월을 건너 여든이 넘은 할 매가 되었으니
ⓒ 고성신문
첫 부임지를 함안으로 받았다. 월급을 받아 할아버지께 맡겼다.
연애 4년째, 교사로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때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결사 반대하셨다. 출근하기 전 할아버지 방 앞에 꿇어앉아 결혼 허락을 청했다. 보다못한 어머니가 나섰고 큰외삼촌을 모셔와 사돈댁 살림의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사실 큰외삼촌은 그 댁을 다녀온 적이 없었음에도 사랑에 목을 매는 조카가 안쓰러웠고, 여동생인 엄마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우셨기에 거짓이라도 고해, 허락을 받고자 하셨다.
“사장어른, 그 댁을 살펴보니, 뒷곁엔 나락 가마니가 켜켜로 쌓였고, 마루 밑에는 장작이 그득합디다. 우리 조카 둘선이 밥 안 굶기고 살만합디다. 젊은 청춘들이 저렇게 서로 좋아하니 허락을 해 주시지요.”
그렇게 하여 나는 7남매의 장남인 남편과 혼인식을 올렸다. 내 나이 스무 네 살이었다. 세상은 핑크빛이었고 내겐 사랑만이 전부였다. 사랑 앞에서 가난 따위는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신행 기간 친정에 있다가 임신한 채로 시가에 들어갔다. 곳간에 항상 곡식이 차 있던 친정과는 달리 시가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쌀이 없어 수제비를 끓였고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나날이 내 앞에 펼쳐졌다. 시부님은 돌아가셨지만, 시모님과 여섯 동생이 가난과 뒤섞여 사는 것을 보고 출산 뒤에 학교로 복직했다. 출산 휴가 한 달은 길고도 짧았다.
사랑을 택한 나의 나날은 고난과 외로움과 설움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래도 울고 있을 순 없었다. 내 등에 지워진 가족이란 짐은 버겁고 무거웠지만 나는 당당히 일어섰고 꿋꿋이 걸었다.

결혼 전에 모은 돈으로 할아버지는 내 몫의 논 세 마지기를 사 놓으셨다. 나는 할아버지께 청하여 그 논을 팔아 읍내에 ‘동아직물’이란 가게를 열었다.
당시에는 옷을 직접 만들어 입는 추세고, 천의 소비가 높았기에 부산의 도매상에서 직물을 떼와서 고성의 소비자에게 파는 방법이었다. 소비 트렌드를 잘 읽은 어떤 총각이 나보다 훨씬 큰 가게를 이웃에 열었다. 더군다나 나는 교사직을 병행하면서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더욱 힘든 상태였다. 동아직물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논 서마지기도 날아갔다. 맏이의 삶은 길고도 끝없는 책임과 의무의 길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잊은 채 하루하루 살아있음이 감사한 날들이었다.
다행히 내겐 남동생이 있었다. 하나뿐이었지만 누나에 대한 애정이 깊어 언제나 나를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시간, 나는 혼자 교실에 앉아 남동생이 보낸 편지를 읽곤 했다. 그런 날 서산의 노을은 눈부셨고 바람은 소슬했다. 학교 앞마당의 벚나무엔 꽃이 흐드러졌다가 잎이 선연해졌다가 어느 새 단풍이 들었고 낙엽이 되었다. 벚나무가 보여주는 세월의 흐름을 따라 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다.
서울에서 기술고시를 본 남동생은 직장에서 인정받았고, 몇 년 뒤 자신의 사업체를 차렸는데 승승장구 중이었다. 동생의 편지와 전화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 다녔고 힘을 북돋았다. 나는 그 힘으로 일어섰고, 식구들을 건사했고, 깊은 잠을 맞았다.

내가 마흔 여덟 되던 해, 남편은 임명직 고성읍장이 되었다.
동아대 법대를 졸업한 남편은 고시공부에 매진했지만 몇 차례 고배를 마셨다. 나중에는 경찰공무원직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다며 그만 두었다.
고교 서무과에 임시직으로, 진주농대 서무과에 임시직으로, 수협상호금융에 직원으로, 삼익피아노 이효익 국회의원의 보좌직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읍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읍장으로 재직시 남편은 기본에 철저했다. 직위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 적이 없었다. 5년 동안 월급봉투는 꼬박꼬박 가져왔지만 경제 관념이 없었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좋아했고, 남편 주위에 항상 지인들이 들끓었다.
남편의 성정은 시아버님을 그대로 닮았다고 했다. 시아버님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셨고, 일제강점기에 읍사무소에 다니며 전쟁 뒤의 구호물자를 공정하게 나눔 하셨단다. 사적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으셨기에 가난과 어려움은 가시 덤불처럼 우리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읍장 5년 만에, 나이 쉰 넷에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초등학교 근무 30년, 교무주임직을 맡고 있었다. 사표를 들고 갔을 때 교장선생님은 적극 만류하셨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연금을 포기하는 대신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았다. 그 돈으로 쌍방울 대리점을 열었다.
남편 병수발이 우선이었고, 생계를 위해서 장사를 시작했다. 집과 가게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남편 수발을 들었다. 중풍에는 침술이 좋다하여, 침술사가 우리 집에 기거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식구가 늘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저들끼리 잘 자랐다. 셋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했다.
쌍방울 가게를 5년 동안 하면서 내 몸이 쇠약해졌다.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가게를 접었다. 이후엔 남편 돌봄에 전념했다. 부지런히 운동을 시키고 좋다는 약은 뭐든지 구해 삶고 찌고 다렸다. 처음에는 걷는 것도 어려웠지만 운동의 결과는 보폭이 커지고 점점 나아졌기에 나는 보람을 느꼈고, 더 열심히 보살피기로 했다.
어느 날, 운동 중에 남편이 주저앉게 되었는데 고관절을 다쳤다. 꼼짝없이 드러누워 몇 달을 보내는 동안 남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렇게 병수발로 20년 세월이 흘렀다.
내 나이 예순여덟, 남편은 하늘나라로 떠났다. 병수발 20년 만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나는 삶의 의욕과 목표를 잃었다. 그간의 고생과 수고로움은 내 머릿속에서 백지처럼 하얗게 태워져 버렸다. 아무 생각도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정신과 의사인 큰아들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어머니, 밖으로 나가세요. 친구도 만나고 노래도 부르고 여행도 하셔요. 이젠 어머니의 삶을 사셔야 해요. 그동안 가족들 챙기시느라 너무 애쓰셨어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렇게 하여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울고 싶으면 소리내어 울었고, 노래를 불렀고,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것을 먹었다. 들판 길을 걸으며 곡식의 자람을 관찰하고 비가 내리면 바닷가 찻집에 앉아 뜨러운 커피를 마셨다.
부산 사는 친구가 들려 준 말이 아직도 남아있다.
“둘선아, 외로운게 정상이다. 네가 느끼는 외로움을 그 누구도 100% 알아줄 수 없다. 친구가 암만 많아도 도움이 안 된다. 네가 헤쳐나가야 할 오직 너의 문제다.”
그 말을 듣고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두 발을 뻗고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 말이 옳았다.

↑↑ 2017년 지중해 니스 해변에서 추억을 묻다.
ⓒ 고성신문
여자나이 육십대 후반이면 할 일도 있었고 쓸모도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다.
우연히 전시회장에 들렀는데 서예와 그림과 시화가 빼곡했다. 내가 허송세월 하는 동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던게다. 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고독과 우울증에 빠진 내 모습이 보였다. 내 후배들은 자신의 삶을 즐기고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극을 받았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이지.
영어를 다시 배웠고 불경을 외웠다. 맘마미아 가사를 수첩에 적어서 들길을 헤매며 외웠다. 오카리나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다. 여러군데 봉사활동도 나갔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모두들 반갑게 환영해 주었고 손뼉을 쳐 주었다.

내 어머님은 91세 되던 해 돌아가셨다. 동생네는 오랜기간 서울에서 어머님을 모셨고, 치매증세가 점점 심해지던 때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치매증세는 점점 심해졌고 딸인 나까지 참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할 수 없이 요양원으로 모셨다. 한번씩 외출하여 우리 집에 며칠 계시다가 요양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울부짖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어머니께 불효한 것 같아 요즘도 종종 가슴을 부여잡고 반성하게 된다.

나는 요즘 인문학 독서에 빠져있다. 지난 2년간 1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내가 읽은 책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긴 뭣하지만, 톨스토이와 조지오웰의 책을 다시 읽으며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책 속에는 내가 가 보지 못한 수많은 길이 있다. 가 보지 못한 여행지도 있고, 사고와 교양과 철학과 삶이 있다. 책 속의 세상은 무궁무진, 흥미진진하다.
오늘은 은파합창단 모임이 있다. 혼성4부 합창단의 화음은 화려하고 따뜻하고 감미롭다. 요즘 연습하는 곡은 ‘별’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문화원의 오카리나 앙상블팀도 공연을 앞두고 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화요일엔 영어공부를 하러 간다. 10년이 다 되어간다. 필리핀 갔을 때 원어민과 대화도 재미있었다.
이 나이에도 오라는 곳 있고, 불러주는 사람들 있어 행복하다.
베이지색 바바리에 같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걸치고 나는 오늘도 집을 나선다. 랄라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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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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