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4년째를 맞으며 사투리 채록과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3년 0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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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고향 사투리 채록을 남아있는 내 삶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성 바닷가의 말들을 원형질 그대로 옮겨 덩어리글로 남기고 싶은 꿈을 꾼 지는 오래 되었다. 이 화두를 주신 분은 내 할매다. 할매가 살아계실 때 나는 어렸고, 능력부족으로 아무 일도 행하지 못했다. 땅을 치고 싶을만치 후회스럽다. 할매의 목소리와 평소의 언어습관을 그대로 채록해 놓지 못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이다.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으로 여기며, 이 일을 남은 내 생의 소임으로 받들려 한다. 그 결심으로 고성신문에 사람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게 되었고, 만 3년을 지나 4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첫 1년 간은 매주 한 분을 인터뷰하였고, 2년~3년 간은 격주로 이야기를 실었다. 가장 힘든 일은 인터뷰이를 선정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70세 이상 되신, 가능하면 덜 유명하신, 우리 이웃의 친근하고 평범한 분들의 삶을 조명하고 싶었고, 고성신문사와 관계된 분들의 어떤 조언도 거절했다. 순전히 작가의 선택으로 인터뷰이를 찾았고, 작가의 눈으로 대상자의 삶을 글로 써 내렸다. 어떤 분은 반가이 응해주셨지만 많은 분이 거절하셨다. 자신의 생애가 활자화되어 남들에게 읽혀지는 건 얼마간의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니까.
사투리는 80세 이상, 文盲의 어른들게 채록하는 것이 가장 진실하다. 글과 표준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는 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야말로 원형질의 사투리 그대로이다. 그 분들은 대체로 삶과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말에 꾸밈이 없고 행동도 말처럼 실행하시는 분들이다.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아오신 분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힘들었을지 미루어 짐작한다. 그동안 내가 인터뷰한 100여 분의 어르신들을 통해 느낀 깨달음으로 내 삶은 더욱 감사하고 훈훈하다.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 분들의 육성을 그대로 채록하여 글로 남기고 싶다. 그런데 3년 동안 내가 만난 어른들 10여 명이 돌아가셨다. 물론 연세가 있으셨으니 삶의 정해진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분들의 삶을 더 길게 기록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어부의 맏딸로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받았다. 노동의 언덕에서 손가락 굵어지도록 호미와 갈쿠리와 쪼새를 쥐었지만, 그 모든 경험들이 내 정신과 의식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맏이란 책임과 의무도 무거웠지만 부모님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복도 얻는 법이다. 인생이란 매번 공평한 위무의 순간들이 영속되는 드라마 아니던가! 2016년 11월, 84세의 아버지는 동해면 막개 우리 집 거실에서 자연사 하셨다. 연명시술 받지말고 편히 돌아가시게 돕자고 옴마께 간청했다. 맏이에 딸이니까 가능했던 청이었다. 그간 인터뷰하면서 사람에게 가장 큰 아픔은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일이다. 오죽하면 참척(慘慽)의 고통과 단장(斷腸)의 슬픔이라 칭했을까. 내 부모님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싫다. 우리 부모님의 자손이 스물 넷(6남매, 손주 12명)이나 되는데 이 험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아는가? 하여 나는 아버지가 84년을 살아오셨으니 노환으로 돌아가심이 당연한 삶의 끝이라는 냉정함을 지녔다. 그런데, 생과 사를 객관적인 이론으로 잴 수 있단 말이던가?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 생각이 더 나는 중이다.
# 2 이성희 어른이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호형호제 하던 사이셨다. 부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적적하게 사시다가 요양원에 가신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뜨신 것이다. 부고를 접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엉엉 울었다. 내 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면서 제대로 울지 못한 회한의 눈물이 성희 아재의 죽음을 접하고 한꺼번에 차 올랐다. 평생을 어부로 사시면서 한 번도 떠나지 않은 동해면 큰막개에서 미더덕 어장을 하는 둘째 아들의 보살핌을 받으시다가, 아름다운 봄 날 홀연히 먼 길 떠나셨다.
(8회, 20년 7월, 이성희, 동해면, 당시 80세) 제목: 내는 다시 태어나모 큰 어장을 해 볼끼다. 사나이 가슴에 태평양을 품어야제. 그기이 내 꿈이다.
* 시작하며 묻는 말 아재, 평생을 우찌 사셨는지 말씀 좀 해 주이소예. 저도 어부의 딸로 바닷가에서 자랐지만 모르는게 천지삐까리라예. 그만큼 알고 싶은 것도 많고, 그 모두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예. 살아오신 세월 굽이굽이가 삶의 역사 아입미꺼? 한번도 바다를 안 떠나셨으니 은자는 눈 감고도 물길을 읽지예? 어부의 삶을 한 마디로 뭐시라 쿠까예?
* 아재의 대답 야가 와 깨깡시리(새삼스레) 그런 거를 물어삿노? 내야 일평생 바닷바람 흠뻑 마시고 괴기(생선) 잡아서 톰방톰방 썰어 회쳐묵고 짜작하게 끼리(끓여)묵고 봉창이 히끗하모 마루 밑에서 장화 꺼내 신고 갯가로 나갓제. 통발에 자망에 주북에 안 해본 어장이 없다 아이가. 괴기는 달 안 뜨는 시꺼먼 밤에 시거리(야광충)로 보제. 껌껌한데 시거리가 번뜩거리모 거기 괴기떼가 뭉친 기라. 그물을 던지모 불통(그물망)이 터지도록 잡힌다 아이가. 너무 많아서 지치(감당)를 몬하는기라. 그 때가 만수판인기고, 온 천지에 비늘이 뒤비(뒤집어)지제. 아적질(아침나절)에 어판장에 내다팔모 줌치(주머니)가 뿔룩한 기라. 기분 조으모 술이 취해가꼬 주모한테 홀빡 뒤집어쓰기도 함시로 항꾸네 웃었제. 운젠가(언제), 가뭄에 해포(파)리만 한빨티기(가득) 들믄 집어쌋삐리(집어던지)제. 퍼뜩 그물을 훌치(모아)가이고 마당에 터억 부라(내려놓)는 기라. 물 속에 들안았던 어장을 말캉(모두) 걷어와서 벼깔(볕쪼이)을 시키제. 굴껍데기, 쩍, 파래들을 몽창시리(전부) 떼내모 물비린내가 코를 찔러 그러코롬 한 세상을 살아온기라. 내사마(나는) 도안(진동만 일대) 바다밑이 명경(거울)겉이 훤~하다. 이짬치(어느지점) 여(해저 암반)가 있는지, 전어는 오데로 댕기는지 안다. 샛바람(동풍) 불모 숭어가 뛰고, 마파람(남풍)에 메가리가 몰리오는 기다. 내야 평생을 바다만 치다보고 살았응께 다른 거는 모리제. 고마 한 해 두 해 살다본께네 이 나이가 되뿠네. 항꾸네(함께) 어장하던 성님들은 다 돌아가싯뿠네. 내는 다시 태어나모 큰 어장을 함 해 볼끼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가슴에 태평양을 품고 살아야 안 되긌나?
# 3 황제연 어른(동해면 덕곡 출신, 1922년생)이 돌아가셨다. 이 분은 100수를 누리시고, 효성 깊은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으시다 먼 길 떠난 분이다. 장례를 치를 때 조문보를 만들어 드렸고, 문상객들이 조문보를 통하여 망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 제목: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한 보따리 풀어 놓고 유월 땡볕과 푸른 나뭇잎을 백 번째 봅미더 ~
큰 며늘아, 내는 니 없으모 몬 산다. 하루도 더 몬 살고, 한 시간도 더 몬 산다. 니가 아니면 여기가 내 집인지, 남의 집인지, 내 이름이 뭔지, 아침인지 밤인지 암것도 모린다. 그라이 니는 내 떠날 때까지 내 옆에 꼭 붙어 있어라. 니는 내 맘 알제? 내가 아무 말 안해도 알고 입 닫고 있어도 알제? 그래, 내 장손 홍표는 언제 온다 카더노? 아아레 왔다 갔다꼬? 그래도 보고 집지. 왼종일 보고 있어도 좋기만 하제. 싫증 안 나는기 자식 목소리고 손주 얼굴이더라. 내는 동해면 전도에서 태어나 택호는 내산댁이다. 그 시절 우찌 그리 가난하고 형제들은 많았을꼬? 9남매의 장녀로 태어났으니 말 안해도 알것제? 쌔빠지게 일만 했다. 낮에는 밭 매고, 논둑 베고, 갯가에서 개발하고, 빨래하고, 보리쌀 삶고, 소죽 끓이고, 다듬이질 하고, 나무하고, 밤에는 삼베 짜고, 새끼꼬고, 가마니 짜고 일도 일도 우찌 그리 많이 했을꼬?
(중략)
# 4 (21년 3월 게재, 동해면 이종순, 당시 87세)
제목: 서른 아홉에 혼자 되어도, 내 살아온 뒤끝은 이리 밝소! 먼저 간 영감이 손해 아니것소? 그라이 내가 용서해야지! 내는, 동해면 검포부락에 사는 이종순 이요. 내곡리 전주이씨 집안, 머슴도 셋이나 있던 제법 살림 따뜻한 집에서 첫째로 태어났소이다. 일하던 사람들이 디딜방아도 찧어주고, 물지게로 들통을 양쪽에 묶어 물도 길어주고, 부엌 아궁이의 재도 쳐주고, 마당이며 골목도 쓸어주고, 흙먼지 날리지 말라고 물도 뿌려주는 통에 자분자분 안살림만 챙기면 되는 처자로 살았소. 친정 논은 ‘성날 마을’ 안쪽 참새미골에 있었는데 가을에 추수를 하면 온 골짝 논에 누렇게 벼가 깔렸소. 내는 어메를 도와 허연 쌀밥에 마늘쫑을 달달 볶고, 정구지 김치에, 머윗대와 어묵을 볶고, 삐드거리하게 마른 호래기를 지지고, 멸치조림을 짭쪼롬하게 졸여 상추쌈을 곁들여 점심을 차렸소. 온 동네 사람들이 ‘맛있다!’라며 고봉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도 걱정이 없었소. 벼 낟가리를 풀어서 홀태로 낱알을 훑고 도정하면, 뒤주에 쌀이 그득 차곤 했소. 그런 살림이니 동네 사람들 쌀밥 한 끼 푸지게 퍼 드리는 건 시피(쉬이) 봤던 기요. 내 나이 17살 되니 중신아비가 왔소. 글줄도 읽었고 살림도 따숩고 스무네 살 된 총각이 훤칠하게 잘났으니 양가가 서로 기우는데가 없다 캅디다. 친정에서 살림을 바리바리 싸서 달구지에 실어 시집으로 나릅디더. 그리고는 혼인잔치를 하고 시집살이 왔지요. 와서 보니, 듣던 말과는 많이 다릅디더. 신랑이 야당 정치에도 이런저런 관여를 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심이 많아서 입은 박사인데 농사일은 어중개비였소. 아침에 일어나 밥하러 부엌에 나와 보면, 물통도 비었고 쌀독도 비어있고 아궁이에 재는 그득 쌓여 있었소. 친정에서는 머슴들이 해 주던 일을 아무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다 했소. 새벽같이 일어나서 물 긷고, 디딜방아 찧고, 낮에는 농사일을 쉬지도 않고 했소. 처음에는 논 네 마지기에 밭 일곱 마지기가 있었는데 신랑은 정치 바람이 들어서, 그 논밭을 야금야금 팔아 치웁디다. 내가 앞날을 걱정이라도 하면 눈을 부라리며 ‘걱정 마라, 니 안 굶긴다.’ 큰 소리 치는 통에 주눅이 들어서 더 이상 암말도 못하겠습디다. 첫아를 배속에 품었을 때 영장이 나와서 신랑은 군대에 갔소. 신랑이 없으니 밭농사 일은 내 차지가 되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소. 쑥털털이라도 해 먹으려고 쑥을 캐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어덕 밑에 숨었소. 혹시라도 지나가던 사람이 내 꼴을 보고 거지같이 산다꼬 친정에 소문이라도 낼까봐서 심장이 펄떡거렸소. 하루는 하도 힘들어서 눈물바람으로 터벅터벅 걸었더니 나도 모르게 친정집 대문 앞에 서 있습디다. 그래, 옴마가 맨 발로 뛰어나와서 나를 델고 새밋가에 가서 얼굴을 씻기고 먹을 것을 줍디다. 그란데 친정아부지가 냉정하게 내쫓디요. “옷섶에 뼈를 싸도 그 집에서 살아야 된다. 니는 그 집 사람이란 말이다.” 그 말씀을 듣고는 방에 발도 못 디디고 바로 시댁으로 걸어왔소. 그 생각하면 지금도 섧고 눈물이 나요. “고생이 돼도 자식 키우고 살아야지. 살다보면 옛말 할 때가 있을끼다.” (중략)
# 5 (12회, 20년 8월 게재, 이도갑, 회화면 봉동리, 당시 93세) 제목: 대숲에 이는 바람처럼 흘러가 버린 세월, 구만면 촌길 걸어 처가 가던 때가 생각나오. 할멈, 아침에 며느리가 오이냉국을 맹글어 상에 올립디다요. 미역도 자잘하게 썽글어 넣고 땡초도 한 개 다져 넣었는지 맵사리함서 씨원합디다. 이거 여름 되모 할멈이 자주 해 주던 음식 아인가요. 내는 국이 엄서모 밥을 못 묵는다는거 아인께네. ‘날 뜨거버모 불 옆에 서서 음식 맹그는 기 을매나 힘드는 줄 아나’ 지청구함스로도 매 끼니 때마다 국 끓여댄다꼬 욕봤소. 어제 큰며느리가 옴서 장어국캉 소고기국캉 봉다리봉다리 싸와서 냉동실에 넣어놨소. 조석으로 한 봉지씩 끓여서 밥하고 김치하고 멸치 볶은 거 하고 무모 돼요. 큰아들 내외는 아침에 일찍 일나서 붉은 고추 따서 말란다꼬 마당에 엎디려 있습디다. 있는 밭인께 묵히지도 몬하고 해마다 고추를 심어서 1년 양념하고 김장에 쓰고 형제들 농갈라 주고 합디다. 올해는 장마가 하도 길어서 온 세상이 꿉꿉하요. 마당 구석 물이 잘 안빠지는 데는 이끼도 끼고, 고인데는 장구벌레도 씨리샇으니 내가 아침마다 마당을 잘 쓸고 있소. 혹시라도 자빠지지 않도록 단도리 잘 하고 있응께 걱정은 마시오.
할멈. 내는 회화면 봉동리 동촌부락에서 7남매(아들 둘, 딸 다섯)의 맏이로 태어났소. 내 아부지 고향도 여기라쿵께 대대로 살아온기요. 아부지가 부지런하셔서 일을 많이 쳐냈다 카디요. 남의 집 일도 엄청시리 해 주고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논과 밭을 일군 분이시오. 어렸을 때부터 아부지 일하시는 것 봤응께 내도 보고 배운대로 살았소. 새벽에 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신 아부지는 지게 지고 들로 나가시었소. 밭둑을 거니시며 소꼴을 베시고, 논두렁콩이 얼마나 잘 크는지 보신다꼬 논둑에 나가셔서는 발자국 도장을 콕콕 찍으시었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고여서 나락이 잠길까 싶어 봇도랑으로 물꼬를 틔우시고, 가뭄이 심하모 웅덩이 물을 떠올리신 기요. 내는 큰아들인께 아부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했소. 아부지가 낫질을 하시면 따라서 풀을 베고, 아부지가 봇도랑을 치면 따라서 도랑을 쳤소. 그 때는 미꾸라지도 많았고 민물게도 많았소. 암매도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이 그기서 나온기 아인가 싶소. 도랑물이 고여 물풀들이 자라는 뻘구덩에 미꾸라지가 살았소. 내 어무이는 미꾸라지를 삶아서는 호박잎을 비벼 넣은 추어탕을 자주 끼리 주시었소. 묵을 끼 없던 시절이라 미꾸라지탕이 을매나 맛나든지 입이 깨금을 뛰디요. 몇 마리 남겨뒀다가 부침개를 굽어 주시었소. 참 맛나던 음식이었소. (중략)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의 사투리를 더 많이 받아서 채록하는 일.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3년 0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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