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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철학을 가진 이는 빈곤하지 않다

흙과 바람과 사람 사이를 떠도는 역마살의 기운으로, 오늘도 거류면 곳곳을 걷는 나는,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장현철이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3월 17일
ⓒ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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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과 사람
고성군 거류면 감서리 898번지, 내 본적이다.
이 곳에서 태어났고, 청년기 20여 년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붙박이가 되었다. 붙박이 다음에 붙을 말이 ‘별’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지금까지의 궤적을 돌아보면 ‘붙박이 이장’이 맞으려나? 올해, 거류면 22개 마을 이장 모임의 장이 되었다. 이름하여 ‘거류면 이장협의회회장’이다. 감동마을 이장을 맡은지 11년, 이장협의회 부회장 10년, 십 년 만에 ‘부’를 뗐으니 긴 시간이 지나간 셈이다.
도시보다 시골에서의 시간은 더디 가는 법이다.

무논을 만들고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는 동안 매실이 익었다. 밭에는 옥수수 모종을 심었고, 거름을 뿌려 비닐을 멀칭한 뒤 이식하고, 공을 들인만큼 열매가 맺혀 점점 익어갔다.
무더위 뒤를 이어 장마와 소나기가 뒤따라 오더니 땡볕은 분별없이 온 세상을 뜨겁게 매질했다. 너와 나, 우리가 지쳐 허덕이는 동안 알곡들은 단단히 여물며 온몸으로 생을 증거해 갔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고, 햇과일을 서둘러 따면서 추석은 감사함을 떠올렸다. 팔월 보름의 달빛을 보며 축제를 열었고, 당동만에 불어오는 바람은 가을에 젖었다.

거류산에 단풍이 들고, 장의사 풍경소리 은은히 퍼져나갈 즈음, 바다에는 전어가 비늘을 반짝이며 꼬신내를 풍겼다.
드디어 북풍이 휘몰아치고, 동부농협 맞은편에 붕어빵 내음이 고소하게 퍼지면 겨울은 소문없이 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모습으로 거류의 일 년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흘러갔고, 어른들은 구부정하게 나이를 짊어졌고, 아이들은 재빨리 자라갔다.
거류면의 인구는 4천200여 명. 고성읍 다음으로 많다.
인근의 가스공사와 조선특구로 지정된 동해면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고성읍과 가까운 거류면에 주거지를 정한 때문이다. 이웃의 다른 면들에 비해 다양한 업태와 직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말은 사람의 입(口)과 비례하지 않은가.

이장은 동민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달하고 처리하고 해결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자연 마을의 이장에 비해, 동민 숫자가 많은 이장들의 고충이 상당하다고 보는 이유다.
나는 동네 이장들을 도와, 마을의 민원을 함께 해결하고 좋은 방법을 찾으려 애를 쓰야 한다. ‘잘 해 봐야지!’ 마음으로는 수십번 다짐 중이다.
무엇보다 올해 ‘옥수수 축제’를 성공리에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웃한 동해면 내․외곡리 옥수수 작목반과 함께 해풍 맞은 쫀달고(쫀득하고 달달한 고성 옥수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 중이다. 좋은 품질의 옥수수를 재배하고, 맛을 보장하여 어떻게 제 값을 받고 판매할 것인가? 미리 준비하고 기획하여 성공적인 축제를 만들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함께 하자 청하는 일은 임무를 맡은 이들의 몫이다.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세상, 그 속에 기쁨과 보람이 꽃 피니까.

# 운명과 사주
초등학교 다닐 때 무시로 외로웠다.
셋째 시간 즈음 창 밖에 소나기가 내릴 때가 제일 싫었다. 다른 친구들은 할배, 할매가 손주들을 마중 오셨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튕기는 물안개가 자욱했고, 비료포대 한쪽을 잘라 커다란 고깔모자처럼 쓰신 어른들 손에는 손주들에게 씌워줄 비닐 우산이 들려 있었다.
나에게는 할배와 할매가 안 계셨다. 부모님 모두 조실부모 하신터라 나를 마중해 줄 어른들이 안 계신 거였다. 까닭모를 설움이 소나기와 함께 오는 물안개처럼 나를 에워쌌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접고 책보따리를 둘러맨 채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비에 흠씬 젖은 보따리를 마루에 던져놓고 설움에 젖어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부모님은 논에서 김을 매거나, 이웃집에 품앗이를 가셨거나, 소꼴을 베러 논둑과 밭둑을 훑고 계셨다. 살기에 팍팍하여 자식들의 젖은 마음을 말려줄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5남매의 맏이, 인동 장씨, 남산파 34세손, 집안의 기둥이었다. 대소간 집안 식구들의 관심과 애정은 많으셨고 사랑을 받으며 자란 편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속에 바람이 들었다. 칠판에 필기를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보다 라디오와 티비에서 듣고 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훨씬 궁금했다.
학교를 가는 대신 시외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나갔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할 나이에 농사일에 허리가 휜 부모님을 걱정했고, 네 명 동생들 학비를 챙기려고 ‘쇠 받으러(돈벌러)’ 나섰다. 공사판에도 가고, 상주 해수욕장에서 민박집 호객 행위를 거들면서 일찍 사회를 경험했다.
책과 공부는 점점 멀어졌고, 돈과 현실은 점점 가까워졌다.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밤을 밝히고, 외양간에 묶인 암소를 우시장으로 끌고 가던 날에도 나는 도시의 골목을 누비며 쇠를 받았다. 공부보다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마음을 더 뺏긴 때문이다.
“역마살이 껴서 바람처럼 돌아댕겨야 하는구먼!”
젊은 어느 해, 폭포암에서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절의 살림을 도우며 불경을 외웠다. 내 사주를 손끝으로 짚으며 스님이 주신 말씀이다.
확실히 내 속에는 스스로도 억제하지 못하는 역마살이 들어 있다. 집에 2~3일 박혀 있으면 의욕 상실에 짜증이 난다. 머리가 아프고, 소화도 안 되고 우울증 증세가 밀려든다.
“밖에 못 나가서 병이 생겼네. 퍼뜩 치료 받으러 나가시욧!”
나를 제일 잘 이해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아내다. 내 병을 정확하게 짚고 있으므로 내가 바깥 활동하는 것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맘 편히 밖을 돌며 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 공부와 철학
2016년, 만학도가 되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경남과학기술대 산림자원학과 1학년이 되었다.
기억은 1분을 머물지 않고, 눈은 침침하고, 교수님 말씀은 자장가처럼 들렸다.
공부는 때가 있는 법이란 말에 동의한다. 이십대의 그 쨍쨍하고 빛나는 순간에 사색하고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교양을 쌓아야 했었는데 늦은 공부는 낯설고 힘들었다.
그러함에도 배움이란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채찍과 활력소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회의 숱한 이치를 이미 깨닫고 있었으므로 나는 암기가 아닌 이해력으로 학습에 매진했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대화의 창구가 열릴 경우, 자연스레 출신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건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대학동창’과 ‘전공’에 대한 화제가 등장하면 입을 뗄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내 속에 잠재해 있던 공부에 대한 열망, 열등감들이 만학도가 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으리라.

서른 일곱 되던 해,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던 친구들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뒤따르려는 나는 가랑이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도시에서 제법 벌어온 돈을, 이웃과 고향 친구들에게 나눠 먹는데 썼으므로, 그동안 고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 곁에 선뜻 다가갈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만고에 진리가 아닐까?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인지, 주머니를 잘 푸는 성격 때문인지, 사회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아졌다. 체육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사무처리에 대한 기본을 익혔고 사람들을 많이 사겼다.
체질적으로 흥이 깊어 농악단에서 사물놀이를 다뤘고 양반 앞소리를 읊었다. 거류의 상원과 하원 마을이 고성 매구의 원조라는 말씀을 어른들게 들으면서 소리사설도 배웠다. 막걸리 두어 잔을 마신 뒤, 사물놀이의 왁자한 가락에 맞추던 농악단의 춤사위는 어찌 그리 재미있던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런저런 자리를 맡았다. 농촌지도자회, 의용소방대, 동광초와 동중의 운영위원장, 주민자치위원회, 이장협의회까지.... 맡았던 직책만도 열 군데가 넘는다.

그 일들을 통해 내가 발견한 철학이 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찾을 때는 무엇인가 부탁을 할 일이 있기 마련이다. 군청에 가서 서류를 떼 달라거나, 옥수수를 제 값에 팔도록 도와달라는 일은 간편하거나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 능력 밖의 일을 부탁받을 때는 상대방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잘 거절해야 한다.
자신의 철학을 가진 이의 삶은 빈곤하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지향성으로 살아갈지 미리 결정하여 그 길을 따라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면 인생길이 단단하다.
사나이는 오십이 넘으면 자신의 내면에 분명한 기둥을 세워야 함에도 어찌 맘대로 되던가.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고 2019년 조합장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아픈 경험은 내게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경험을 통한 배움은 내 남은 인생길에 겸손과 여유를 줄 것임을 확신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나와 인연이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 내 삶의 회람
어릴 때부터 혀가 짧아 말을 더듬거리기 일쑤였다. 내가 혀를 굴러 대답을 하려 애쓰는 동안 상대방의 말은 이미 한뼘씩 나아가 버렸고, 말맞춤이 어려웠다. 남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 서서 말을 쏜살같이 뱉어내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열등감 때문에 학교 공부보다는 딴 데 더 정신을 팔았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어습관을 고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상대방과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개진을 하기 위해, 나는 당당해져야 했으므로 웅변학원에 등록하여 개인 지도를 받았다.
원고를 종이가 너절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미리 쉼표를 찍어놓고 몇 어절이 끝나면 숨 한 번 쉬고, 다시 또박또박하게 읽는 연습을 했다.

또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부산 보림극장 사거리에 서서 큰 소리로 발표를 하고, 볼펜을 입에 물고 말하기도 계속했다.
몇 달이 지난 뒤 달라진 내 모습을 발견했다.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붙었고 탄력이 넘쳤다.
그 뒤로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계속 더 좋아지기 위해 노력을 했더니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보였다. 각종 행사에서 사회를 보거나 뒤풀이의 사회도 도맡았다.
지금은 내가 먼저 고백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태어나서 삼십여 년 간을 말더듬이로 힘들었고 고치기 위해 숱하게 노력했음을 말이다.
 
누군가 앞서가는 사람의 능력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능력을 기르기 위한 부단한 애씀이 있었을테다. 오랜 노력의 결과물이 누군가를 앞자리로 이끌어 주는 법이다. 자신은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면, 하게 된다면, 크게 박수쳐 주고 격려해 줘야 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늘 ‘책’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배움과 지식과 앎을 귀히 여기며 살았다. 생활과 대화 속에서 모르는 낱말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익히려 애를 썼다. 그 결과로 가끔 ‘유식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하니까.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농사를 짓는 일에도 씨앗의 종류와 파종시기와 병충해의 원인과 결과, 그 해결방법까지 알아야 제대로 된 알곡을 여물리게 된다. 어떤 거름을 어떻게 뿌리고 성과를 낼지 알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장년 후반기인 지금의 내 삶은 평화롭다. 어머니가 계셔서 자잘한 농사일을 챙겨주시니 참으로 고맙다. 2012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불효막심한 내 모습이 보인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날에는 밖으로 떠돌면서 부모님께 숱한 걱정을 끼쳐드렸다.
아내와는 늦은 결혼이었으니 더 아끼고 토닥여야 하리라.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가정 경제에 한몫하니 더욱 고마운지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 고등학생 딸은 또 얼마나 이쁜지. 말해 무엇하랴.
통장에서 매달 10만 원 이상의 후원금이 빠져 나간다. 대한적십자사, 초록우산, 굿피플, 천사의 밥, 동중장학금, 엄홍길휴먼재단, 굿네이버스. 아내 또한 여러 곳에 후원금을 내는 줄 알고 있다. 나의 나눔이 비록 몇 줌의 쌀일지라도 세상의 따뜻함에 동참할수만 있다면 참 좋으리!
거류면 감서리 561-3번지. 우리 집 마당에 내리는 봄볕은 고슬고슬 정겹다. 우리 네 식구의 삶이 늘 봄볕처럼 따스하기를!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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