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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내 삶의 가지마다 여러 개의 이름이 달렸다 농부였고, 오광대 춤꾼이었고, 궁사였고, 고엽제 피해자였고, 참척의 아픔을 겪은, 농민운동가다

이호원(48년생 / 76세 / 마암면)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2월 10일
↑↑ 부친의 호는 석천, 나는 해암이다. 부친이 거주하셨던 집 대청에 앉아 간사지 들녘을 내려다본다.
ⓒ 고성신문
# 오늘도 걷는다
바람이 맵다. 온몸에 따끔따끔 바늘처럼 찌르는 칼바람이다.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오늘은 7천보를 걸었다. 한 달 전에는 날마다 만보 이상을 걸었다. 석달간 93만 보를 채웠을 때 발바닥에 극심한 통증이 왔다. 그래도 걷기를 멈출 수 없다. 누죽걸산(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 시작하여 축구장, 역도장, 궁도장, 야구장, 새마을복지회관을 지난다. 가끔은 근처의 찻집에 들러 달착지근한 대추차를 한 잔 마신다.
차를 마시며 창 밖을 내다본다. 햇살이 온 세상을 공평하게 비춘다.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떤 세월을 딛고 내가 여기까지 와 있나?
중풍을 세 번이나 맞았다. 한번 맞아도 쓰러지기 쉽상인데 세 번의 풍을 마주하고도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세상 모든 일,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 두호마을의 민주동산에는 고성 농민의 투쟁과 운동의 역사가 비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 고성신문
# 나는 이 땅의 농부다
평생을 땅을 파고 볍씨를 뿌리며 살았다.
나는 마암면 두호리에서 태어났고, 한번도 안태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6대째 살고 있으니 우리 집안은 족히 200년을 두호부락에서 살아온 셈이다.
장남인 부친은 2남 4녀를 낳았고, 나는 맏이로 태어나 고향의 붙박이가 되었다.
삼락초와 고성중 고성농고를 다니는 동안 땅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간사지 위쪽과 가장자리를 메워 논을 만들었고 벼를 심었다. 농지위원들이 그 땅에서 수확된 벼를 판매하여 공동 분배하는 등의 일을 맡았고, 눈이 밝으셨던 부친이 그 일에 참여하셨다.
당시 고등학교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생은 면 단위에서는 몇 명 정도만 가능했다. 나는 복 받은 학생이었던 셈이다. 공부를 하면서 꿈을 키웠다. 변화된 농촌을 희망하는 꿈. 내가 농촌을 바꾸고 싶다는 꿈이었다. 축산특활부서에 들어가서 “옷에서 소똥 닭똥 돼지똥 냄새 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축산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축업을 시작했다. 병아리를 성계로 키워 내는 일은 부지런함과 인맥이 필요했다. 잘 키워서 제대로 팔아야만 돈이 되었다.
그러다가 갇힌 닭장이 아닌 넓은 들판으로 나가서 칼바람을 맞으며 일하고 싶었다. 들판으로 나갔다. 그 곳은 사방이 뚫리고 틔여 햇살도 바람도 비와 태풍도 정면에서 맞는 곳이다.

# 나는 고엽제 피해자다
군대갈 나이가 되어 해군에 지원하여 의무병과에서 근무했다.
해병대는 의무병과가 없었고, 해군은 해병병과가 없어 교대근무를 하며 지내다가 월남전 파병 군인을 뽑는다는 소식에 응모했다.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파병되었다. 고엽제의 두려움을 그 당시 군인들은 아무도 몰랐다. 이가 끓던 시절이었고 밀림의 모기는 지독했다. 비행기에서 고엽제를 난사하면 동료들이 서로를 부추켰다. “모기약 뿌린다. 나가서 맞아라!” “이 잡는 약 뿌린다. 한 방에 해결된다. 퍼뜩 나가자.” 웃통을 벗어제치고 고엽제를 온 몸으로 철철 맞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고엽제 피해가 나타났다. 피부질환은 2세와 3세까지 나타났고, 각종 질환이 뒤따랐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긴장했다. 누구든지 고엽제 피해자였으니까.
10여 년 전, 뇌경색이 왔을 때 고엽제 피해 신고를 했지만 ‘해당사항 없음’ 이란 통보를 받았다. 다시 협심증으로 스텐트를 2개 박고 보훈청에 재신청을 했다. 보훈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고엽제 피해 6급 이하’ 판정을 받았다. 매월 보상금도 나온다.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전쟁터에는 결코 나가지 않을테다. 전쟁의 피해는 오오랜 세월을 두고 나타나는 망령이다. 내 몸을 돌던 고엽제의 후유증이 내 자식들에게는 전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고성신문
# 나는 오광대 춤꾼이다
78년 오광대에 입문했다. 체질적으로 다혈질에 에너지가 넘치던 젊은이였다.
심부름꾼으로 시작하여 일했다. 악기를 챙기고 춤판에서 빈 공간이 생기면 즉시 투입되었고 젖광대로 분위기를 돋우는 일도 했다.
새벽부터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짓다가 해거름녘이 되면 오광대 춤판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못다푼 신명이 남았고, 저항의 춤이 사위를 이어갔으며, 함께 몸과 마음을 교류하는 기운이 있었다. 나의 존엄을 깨달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사색과 철학의 시간이 깊었다.
오광대의 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이야기다. 그 갈등을 해학과 위트로 풀어낸다. 결국은 화해와 용서를 통하여 함께 사는 세상의 동반자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주로 접양반과 원양반을 맡았다. 양반의 오만하고 도도한 자세 이면의 나약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살리려고 노렸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지금은 명예보유자가 되어 끈을 이어가고 있다.

# 나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기부와 바꾸었다
27살에 창녕처자와 결혼했다.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아 길렀다. 여느 집처럼 자식들은 기쁨과 웃음과 보람을 주고, 실망과 눈물과 반성을 주는 존재다.
나 또한 그렇다. 바깥 일에 바빠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고 학업을 챙기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비다. 낳았으니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농사지어 배불리 밥을 먹이고, 학비를 제때 주는 것이 아비의 몫이라 여겼다.
2010년, 둘째 아들이 산업재해로 세상을 떴다. 청천벽력이었다. 1억원이란 재해보상금이 나왔다. 자식의 목숨값이었다. 미련없이 그 돈을 고성농민회에 쾌척했다. 그 당시 농민회에서는 ‘경제사업’이란 불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여할 턱도 없다.
최근에 진주 남성한약방의 김장하란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줬으면 그만이지!’ 그렇다. 줬으면 그만이지, 더 이상 이런저런 말이 왜 필요한가?

# 나는 궁사다
국궁을 접하여 활을 잡은지 20여 년이 되었다.
집중하여 과녁을 겨냥하고, 활시위를 당기면 나는 어느 시공간이든 여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신라시대의 화랑이 되기도 했고, 고려의 호부남랑(戶部南郎)에서 활을 쏘던 군졸이 되기도 했다.
활을 쏘면서 집중과 일념을 배웠다. 지천명의 세월을 지나면서 삶이란 도도한 물결 같아서 내 운명을 스스로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시점이었다.
모든 인간사에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있으며,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들어맞았다.
국궁장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감정적인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쌈닭이 되어 수십 년 농민운동에 앞장서서 느꼈던 울분과 설움과 화를 활에 담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그렇게 한량으로 남은 내 생을 살고 싶어졌다. 그러나, 모든 일은 마음 먹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 동안 중풍을 세 번이나 맞았다. 지금은 팽팽한 활시위를 당길 힘도, 기력도 없다.
활 대신 걷는 중이다. 활처럼 탱탱하지도 곧지도 튕기듯이 나가지도 않지만 천천히 걸을 뿐이다. 내 발걸음이 바람을 가르고 시간을 가르고 세월을 가를 것이다.

# 나는 농민운동가다
농민운동은 내가 평생을 통해 공들여왔고, 내 삶의 과업이란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1977년, 내 나이 스물아홉 되던 해였다.
몸으로만 짓던 농사가 아니라, 마음과 의지와 뜻을 담아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다음 해 마암면에서 제일 먼저 대농기구(콤바인, 트랙터)를 구했다. 6명 정도의 두호마을 청년들과 영농단을 구성했다. 재래식 기구의 농법에서 대농기계화로 전환한 농업은 지도자 사업과 함께 농업 경영의 변화를 이루어냈다.
1978년, 강원룡 목사가 운영하는 ‘내일을 위한 집’에 입소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농민운동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일제 잔재 농업 중 농민에게 수탈을 요구하는 규정부터 없애는데 앞장섰다. 농민은 벼를 수매장에 내놓으면 그 다음의 상황에 참여할 수 없었다. 출하자가 입고 비용을 물었다. 그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고 농민이 수매장부터 입고까지 할 수 있도록 규정 변경을 요청했다.
다음은 농지개량 조합의 수세 폐지 운동이었다. 농민에게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저수지 물값이 수도세보다 비싸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던 시절이었다. 빗물과 자연수를 받은 저수지물은 당연히 농사에 사용해야 하는데, 그 물값을 농민들에게 걷다니. 이게 될 말인가?
농업은 민족 먹거리의 중심에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식량은 인류에게 무기화가 될 것인데 식량의 자립화를 위해 농민들은 궐기하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리고 선조들이 지켜온 이 나라의 농심을 바로 세워 나가자.
이런 주장을 하며 카톨릭 농민회에 입회하여 농민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벼수매 입출고 해결, 농지세(갑류, 을류) 폐지, 수세 폐지의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1985년, 수입소가 과다하게 도입되어 축산농가에 큰 위기가 닥쳤다. 이에 두호부락 농민들의 시위를 필두로 ‘소몰이투쟁’이라 불린 농민의 생존권 투쟁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재벌은 돈 밭에, 농민은 똥 밭에”, “양키 소 몰아내고 한국 소 살아보자” 등의 구호를 플래카드와 소의 잔등에 부착하고 ‘경운기·소몰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투쟁은 최초의 ‘소몰이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와 한국농민협회 3개 단체가 합쳐 전국농민회 총연맹을 만들었다. 총연맹은 정책 입안에 집중하고, 카농과 기농은 생명농업 중심으로 사업을 펼쳤다.
1991년, 나는 도연맹회장이 되었다.
전국농민회 총연맹은 우루과이라운더부터 WTO협상까지 지속적으로 농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농민운동을 시작한지 어언 45년이 흘렀다. 지금 한국 농민의 현실은 부끄럽게도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세계 경제의 흐름상 어쩔 수 없는 수입자유화의 측면도 있겠지만 쌀값은 가장 더디게 오르고 천대받는 중이다.
2023년 1월 27일 한국농어민신문의 글은 우울하다. 「다시 주저앉은 농업소득… 20년 전으로 후퇴」 사람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물가가 오르는데 쌀값은 내려가고, 20년 전에 비해 쌀소비량은 절반으로 줄었다지 않나? 근시안적 농산물 수입으로 국산은 갈아엎고 수입산이 밥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러나 나는 이제 힘이 없다. 뒷방 노인이 되어 남은 여생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 걸을 뿐이다. 내 걸음걸음마다 농민들을 위한 격려와 응원과 기원을 담는다.
농민들이여, 힘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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