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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세월은 구름같이 바람같이 흘러갔고, 내 삶은 송학고분이 우뚝한 무학마을에 머물러 있네

제건자 (84세, 고성읍)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1월 20일
↑↑ 청춘은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모래처럼 어느새 흘러 사라져버리고, 언제 이 나이가 됐는지 아득합니다.
ⓒ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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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제 나이가 어머니 돌아가실 때의 연세보다 훨씬 지나왔습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언제 이 나이가 되었는지 아득합니다. 제가 어머님 뒤를 따라 산이며 들로, 시장이며 읍내길을 나비처럼 폴폴거리고 다닌지가 엊그제 같은데 제 머리카락은 은발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어머님은 쪽진 머리에 은비녀가 잘 어울리셨던 분입니다.동백기름을 조금 따뤄내 왼 손바닥에 칠하고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머릿결 방향으로 바른 뒤, 참빗으로 곱게 빗질하시고, 은비녀 꽂으시고, 비단 치마저고리 입으시고, 코 높은 버선을 날렵히 신으시고, 흰고무신 차림으로 나들이하시던 모습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 여인네들은 그렇게 차림하여 나들이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우셨테지요? 

그 때 어머님의 모습은 콧대 높은 漆原諸氏 가문에 시집오신 마나님이셨습니다. 기와집 마당엔 사시사철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기품과 태도를 이어받고 싶었으나 부족함이 많은 여식이었습니다. 더구나 아직도 마음 속에 한 가지 회한을 가지고 있으니 엎으려 절하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어머님이 어린 저에게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여식은 공부보다 살림을 제대로 배워 시집 가서 일부종사 하면 되는 게다. 괜히 공부한답시고 나서면 팔자만 사나워질 따름이고. 한글 깨쳐서 제 이름 쓸 수 있고, 살림 사는데 필요한 더하기 보태기만 하면 되는게지.’ 

어머님의 말씀이 제게는 그대로 법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님이 목청 높여 울며 식음을 전폐한 사건이 기억납니다.오빠 한 분은 총각 때 돌아가셨고, 또 한 분은 군대에서 돌아가셨지요.울다가 혼절하시는 어머님을 뵈면서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 참척의 고통인 줄도 알았습니다. 

제가 나이 들었을 때 어머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눗지 못했음이 안타깝습니다.저도 어른이 되고, 시집을 가고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어머님의 속마음을 한번만이라도 더 짚어보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머님 살아오신 내력을 터 놓고, 저 또한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으신 어머님이 야속했다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아버지
아버지는 대가면 자실(척정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뼈대 있는 가문 칠원 제씨들은 조상님의 은공으로 살림이 따뜻했다고 합니다. 목수셨던 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셨습니다. 저는 3째이면서 독녀로 일본에서 태어나 2살 때 귀국했다고 들었습니다. 범띠였던 큰오빠와는 열세살 터울이 났습니다. 어렸을 때 일들은 가물가물하지만 큰오빠가 방앗간을 하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합니다. 

아버지는 목수셨고 일을 맡아 바깥으로 자주 나가셨습니다. 집에는 머슴이 있었고 어머니가 머슴과 덕이 어멈을 데리고 농사일을 지휘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셨던 아버님 덕분에 기와집 아래 따순 살림살이에 고생 모르고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주로 밖으로 도는 일을 하셨으니 큰오빠가 우리 집 살림을 챙기는 편이었습니다.

소달구지에 곡식을 싣고 와서 물레방아를 돌려 알곡을 찧어내면 힘은 들었어도 품삯이 제법 나왔던 모양입니다. 방앗간 주위에 왕겨도 쌓이고 미강도 쌓이면 그것들도 따로 모아 팔았을테지요. 그 당시에는 송아지를 얻어서 어미소로 키우고, 그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으면 키운 집에서 갖게 되는 방법이 있었다 합니다.

그런 집에서 왕겨며 미강을 귀하게 구했으니 방앗간 집은 제법 살만했던 게지요. 사촌 오라버님이 저한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건자야, 공부 잘하면 은행에 취직도 할 수 있단다. 크게 보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그 때 제가 다른 길을 걸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과는 다르게 살고 있을까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주 팔자가 있다 하더이다.저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조신하게 살림만 하다가, 조용히 시집을 갔고, 자식들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삶,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크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조용하고 나직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 남편, 결혼 생활
제 나이 스무 네 살이 되니, 중매가 들어왔습니다.“하일면 수양리에서 태어난 최씨 가문의 착한 사람이다.” 제 부모님은 믿을 만한 사촌 언니가 중매한 사람인데다 ‘착한 사람이다’에 반한 모양입디다. 혼인하여 시댁에서 5개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손위 형님은 매사에 딱 부러지는 성격에 말씀을 참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경우 바르고 뒤끝 없는 성정이셔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안의 법도며 내력을 익혔습니다. 

둘째 아들인지라 6개월째 신접 살림을 따로 나왔지요. 가난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남들이 흔히 말하는 ‘숟가락 두 개에 이불 한 채’뿐인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종시숙님이 저수지를 파고 둑을 쌓는 일을 하셨는데 거기에 취직을 했습니다.남편은 본격적인 기술을 익히기 전이라 사무직으로 일을 시작했지요.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서 일을 하러 나갔지만 월급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월급을 받으려면 면허증을 따고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나요? 새색시인 저도 나섰습니다. 종시숙님 사무실 인부들의 밥을 해 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기본 인부들은 5~6명 이었지만 더러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두어 번 지나가는 시외버스가 있었지만 시간에 늦어 차를 놓치면 걸어야 했습니다.

큰 아이를 업고 학동골에서 임포까지 장바구니를 이고 걸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남편은 알뜰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이웃에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매달 월급을 받으면 하루도 늦추지 않고 생활비를 봉투에 넣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명절 때의 일입니다. 시댁 동서들과 모이면 저마다 할 말이 많은 법입니다. 말도 잘 하면서 나붓나붓하고 애교 넘치는 동서가 이렇게 말합디다. “형님은 한 달에 생활비로 얼마나 쓰세요? 아주버님이 두둑히 벌어다 주시지요?” “나는 아직도 요타서(따로 받아) 쓰고 있다네!” “어머나, 왜요? 봉투째 받아서 저축도 하시고 알뜰살뜰 살림도 불리셔야지요?”

아마 그 말을 남편이 들었던 모양입디다. 지금까지 받던 생활비에서 삼십만원을 더 얹어 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속으로 그 동서가 얼마나 고맙던지요. 주부들은 남편 몰래 돈 쓸데가 제법 있답니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불쑥불쑥 뭉텅이 돈이 들기도 하니까요. 

 # 아이들 
 하이면 학동 골짝에서 큰 딸을, 하이면 석지에서 둘째인 아들을, 영현면 연화리에서 셋째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꼭 공부를 시켜야겠다’ 이 결심은 바래지도 변하지도 않고 내 주장이 되었습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고성읍내로 이사를 했고 넷째인 딸을 성내리에서 낳았습니다. 내가 못 배운 설움을 주지 않으려고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첫 애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둘째부터는 저절로 따른 듯 했습니다. 첫째는 둘째에게 전과를 물려주고, 둘째는 셋째에게 교과서와 문제집을 물려주면서 따르듯이 때로는 경쟁하듯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중학교는 넷이 모두 고성에서 다녔지만, 두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어 마산으로 떠났습니다. 

큰딸은 부모 옆에서 고성여고를 다녔고, 막내딸은 진주로 떠났습니다. 자식 넷이 부모보다 키와 마음이 큰 어른이 되는 동안 저와 남편은 늙어갔습니다. 넷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큰딸이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깨고 일해주길 바랬지만 남편을 내조하며 집안에 들어앉은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저마다의 삶이 있는 것을요.

둘째인 아들은 서울의 큰 신문사에 근무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신문에 관심이 많습니다. 신문을 통해 세상을 보고 사회를 읽습니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사회 현상을 파악합니다. 셋째는 토목일을 하는데 바쁘지만 고성 집에도 자주 들리는 인정 많은 아들입니다.

“큰 딸 상공부 그대로 다녔으면 어머니는 용돈도 많이 받았을낀데 서운하시지요?”  “큰 아들 멀리 서울로 보내놓고 얼굴 못 봐서 서운하시지요?” “자식이 여럿이라 전국에 흩어지니 전국구, 좀 좋아요?” 이렇게 우스개 소리도 자주 하고, 맛난 것도 사 줍니다. 넷째 딸은 중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업을 맡아서인지 딱 부러지고 곧은 성격의 막내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저한테 살갑고 착착 감겨드는 딸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일 열심히 하면서, 제자들에게 좋은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야말로 대만족입니다. 제 앞가름 잘 하면서 제 길을 스스로 찾아서 걷는 막내딸이 고맙고 대견합니다.

# 취미생활, 그리고 여행
남편은 여행을 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시간만 나면, 아니 시간이 안 나도 훌쩍 떠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세계 여행을 다닌 국가만도 135개국이 넘습니다. 어찌보면 남편은 여행을 하려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부지런히 따라 다녔습니다. 일본에서는 온천을 즐겼고, 발목까지 눈이 빠지는 후지산도 걸었습니다. 한 병에 기십만원이라고 하는 사케도 맛보았고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스시도 먹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대륙의 광활함과 큰 스케일에 놀랐습니다. 사람도 많았고 산도 건물도 다리도 모든 것이 크고 휘황찬란했습니다. 태국에서는 뾰족한 첨탑과 뾰족한 장신구와 뾰족한 손톱을 끼고 추는 춤 구경을 했습니다. 싱가폴의 야간 분수와 공원,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를 보며 벌금이 엄청 많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갔습니다. 역사에 남은 희망봉을 보고 케냐의 구석구석도 다녔습니다.

# 병과 함께 살기
제게 허리 아픈 병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에도 가고, 약물 치료며 주사를 맞아도 나아지지 않아 민간요법을 실행키로 했습니다. 전라남도 순천에 가서 1달간 살았습니다. 가벼운 운동을 하고, 뜸을 뜨고 침을 맞고 온열치료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좋아졌고, 제 몸에는 민간요법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도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70세가 넘으면서 요로결석이 생겼고 십여 년 전에는 신장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올해 87세가 되셨으니 안 아픈게 이상하지요.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셨으니 노환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작년부터 신장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투석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해 드릴 일은 옆에서 수발을 들어드리는 일입니다.싱겁게 간한 반찬을 챙기고, 몸에 좋은 음식을 적당량 드리고, 약을 챙기고, 병원에 갈 시간에 맞춰 옷을 챙겨 드립니다.나이가 드니 움직임도 둔합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시장에 나가서 생필품을 사 오고, 아프면 의원에 들러 주사를 맞고 약을 타 먹는데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좋은 옷, 새 옷을 사도 입고 갈 곳이 없습니다. 옷장에 가득 들어찬 옷도 닳도록 다 입지 못하고 언젠가는 떠나게 되겠지요. 예전에는 노인정에도 나가서 남의 말도 듣고 세월을 보냈지만 요즘은 그렇게 못합니다. 영감님 병구완 하며 하루 온종일 곁에서 지켜봅니다. 입에 맞는 음식 대신 몸에 맞는 음식을 소식하며 삽니다. 혈압을 재고 혈당을 체크하게 됩니다. 저혈당 쇼크가 무섭다 하니, 사탕도 항상 옆에 둡니다.

# 오늘 나는
저는 하루종일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영감님께는 잠시도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아끼며 살아왔으니 마지막까지 함께 잘 마무리를 해야지요.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온 한 평생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학이 날아와서 평화로움과 장수를 주었다는 마을에서 영감님과 저도 오래 살았지요.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 볕을 쬐고 바람을 맞이하며 잘 지낼게요. 고맙습니다.
↑↑ 남외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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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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