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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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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라면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 지인에게서 특별한 라면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세상에서 제일 매운 라면이라는데, 맵기의 척도를 재는 스코빌 지수가 일반적으로 맵다고 알려진 라면보다 4~5배 정도 맵다고 한다. 하지만 평소 매운 걸 좋아하는 식성이라, ‘매우면 얼마나 매울까?’라는 생각에 시범적으로 하나를 끓여 시식했다.
그런데, 이건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측정하는 무한도전 수준이었다.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눈물과 콧물에 더하여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음식을 누가 비싼 돈 내고 먹느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상품이라고 했다. 괴이한 일이다.
평범하고 맛난 음식을 두고 이렇게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 사람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두 번쯤 별식으로 먹는 음식이라 다행이지 자주 먹었다가는 틀림없이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묘한 맛에 이끌려 두어 번 라면을 다시 먹게 되었고, 그 이후에 생긴 후유증이 있다면 웬만큼 매운 것은 매운 것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극적인 행위가 연속되면 사람은 무감각해진다. 무감각이 반드시 나쁜 현상은 아니다. 매사를 고민하고 걱정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취향이나 일시적 자극 행위가 아닌, 연속적인 자극으로 범죄와 관련된 사건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오는 사고가 생긴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인간성까지 상실하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공감했다.1960년대 초에 부산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전에도 그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고, 불명예스럽다고 하여 지명까지 바뀐 예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엽적인 문제로 끝났다. 그러나 당시 사건은 대중매체가 일반화되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사람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 소식을 들은 국민은 경악했다. ‘이런 살인자는 그냥 사형시킬 것이 아니라 바늘로 찔러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 해야 한다’라며 열변하던 라디오 방송 해설가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살인도 그렇지만, 범인을 바늘로 찔러 죽여야 한다는 끔찍한 해설에도 많은 국민이 공감할 정도로 분노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처럼 분노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 토막살인 정도는 예사로 일어나는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1970년대 후반에는 ‘정효주 어린이 유괴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든 적이 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에 불과하던 정효주라는 어린이가 괴한에게 유괴되었고, 국민의 초관심사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했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 ‘아이를 돌려보내 주면 법적으로 최소한의 책임만 묻겠다’라는 특별담화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행히 정효주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어린이 유괴는 너무 흔한 일이 되어 대단한 기삿거리도 되지 못하고, 대통령이 나서는 일도 없다. 사람들도 놀라기보다는 그저 아이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비는 정도이다.이처럼 사건 사고에 대한 무감각증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면서 사회적 병폐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도 사회에서는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이런 사건 사고의 이면에 인간성 상실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치유 방법을 찾지 않는다. ‘도덕’은 학교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지식일 뿐 행동의 지표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삼강오륜’은 옛이야기에서나 나오는 말일뿐, 어른과 아이의 위아래가 없어지면서 질서가 무너지고, 이기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가족의 개념이 깨어지고, 가식적인 사랑이 놀이처럼 변색하면서 남녀 간의 만남과 헤어짐이 다반사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람 몇 명 죽는 것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을 잃어버렸다.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태국을 비롯하여 이웃 여러 나라에서 반정부 시위로 수없이 많은 인권 유린이 있어도 분노할 줄을 모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남의 일이고, 전쟁이 불러올 3차 세계대전이나 핵폭탄 사용도 두렵지 않다. 심지어 국가 존폐를 뒤흔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놀라지 않는다.
폭탄이 날아다니는 중에도 정치가들은 정쟁에 바쁘고, 사람들은 식도락을 즐기거나 야외 놀이를 다닌다. 이전 같으면 주식이 폭락하고 사재기를 하겠지만 이제 북한의 도발 정도는 한낱 가십거리로 전락했다.
그뿐만 아니다. 환경 오염으로 빙하가 녹았다고 해도 먼 나라 얘기로 여긴다. 빙하가 녹아 백신도 없는 고대 바이러스가 되살아난다고 해도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 코웃음 친다. 생선 배 속에서 플라스틱을 비롯한 쓰레기가 나와도 놀라지 않고, 먹거리가 발암 물질로 오염되었다고 해도 예사로 먹고 마신다.
환경 파괴로 인한 인류 종말론은 그냥 학자들의 지나친 기우로 치부한다.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같은 기후 재난 영화가 나와 경종을 주지만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오락용 볼거리일 뿐이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플라스틱을 비롯한 일회용품 사용을 제한하면 불편함부터 먼저 호소한다.
작금에 일어난 국가나 세계적 재난은 지도자가 잘못한 것이지 개인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쓰레기를 만들고 함부로 버리면서, 환경 파괴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책임은 애써 무시한다.처음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는 곧 세상이 망할 것처럼 두려워하다가도, 이제는 곧 더 무서운 질병이 생길 것이라는 경고에도 걱정하지 않는다.
집단 감염의 원인이 되었던 대규모 모임이 다시 시작되었고, 한동안 감소했던 확진자가 겨울로 접어들면서 점차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마스크를 벗겠다고 야단이다. 3년 동안 백신과 마스크 속에 살면서 질병이 가져다주는 무서움에 대해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대형 사고도 그렇다. 삼풍백화점이나 대구 지하철 참사는 전설이 되어버렸고, 세월호 이후에는 웬만한 대형 사건도 놀라운 일이 아닌 무감각한 세상이 되었다. 그런 무감각증이 이태원 참사를 불러왔지만, 이후에도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안전사고에 대한 정부의 임시방편적 대처에 분노하는 사람도 드물다. 이처럼 몇 번의 큰 사고를 겪고 나니 이제 웬만한 대형 사고는 사고 축에 들지 않는다. 바로 곁에서 폭탄이 터져도 도망가기는커녕 구경하기에 바쁠 만큼 다들 강심장이 되었다.이제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아프리카에 눈이 내렸다고 해도 놀랍지 않고, 북극에서 수영을 즐겼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차라리 긍정적 마인드라면 좋겠다. 일의 전후를 따지는 최소한의 지각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감각을 잃어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감각증 환자인 줄을 모른다. 아파도 아픈 줄 모르는 무감각증이 심해지면서 어느 새부터인가 미래에 대한 기대감 상실도 함께 왔다.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젊은이들은 인구 감소로 국가가 없어진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아무리 환경 보호가 중요하다고 외쳐도 현재의 편리를 위해 미래를 포기한다. 미래를 위한 생산과 비축보다는 현재를 위한 소비를 더 중요시한다. 이러다가는 정말 지구 종말이 올지 모른다. 아니, 오늘 당장 인류 종말이 오더라도 이상할 것도 없다.
이제 더 이상의 파괴는 멈추어야 한다. 기후 변화를 불러온 환경 파괴를 멈추어야 하고, 핵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전쟁을 끝내야 하고, 인간성 파괴를 불러온 이기심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자신의 무감각증을 알고 깨어날 때이다. 기회가 있을 때 회생의 시계를 돌려야 한다. 도덕과 삼강오륜은 고리타분한 전설이 아니다.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고,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진실한 사랑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다. 더 이상 파괴되기 전에 인간성이라는 감각을 되찾고 지구 종말의 시계를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오늘이 시작’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