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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나이가 들면 옛일은 면경처럼 선명하고 어제 일은 깜박깜박 잊음으로 아스라하지만, 송학동에서의 우리 삶은 고분의 그림자처럼 깊고도 아늑하여라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11월 25일
ⓒ 고성신문
제 부친 함자는 강용준, 모친은 신덕김입니다.
부친은 삼산면 삼봉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남의 집 살이를 하다가, 모
세경으로 논 두 마지기를 사 두고 16살에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습니다.
외가는 부산 사상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철도를 건설하는 관리 일을 보셨고, 외할머니는 공사장 근처에서 인부들의 밥을 해 주는 함바식당을 하셨답니다. 큰딸이었던 어머니는 총명하고 똑똑한 분이셨지요. 부산은 일본과 교류하던 항구도시였으므로, 신식 문물이 많이 들어왔고 교류가 많았습니다. 호기심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친척을 따라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공장에 다니시던 아버지를 만나 혼인하셨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도쿄 인근의 가와사키에서 살았습니다. 그 곳은 공업도시였고 무역항이었습니다. 저는 맏이였고, 2남 7녀의 형제자매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일본에서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가, 9살에 한국으로 잠시 나왔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한국 학교에 보내 한국인으로 제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모양입니다. 친척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의 고향인 삼산면에서 1학기를 마치고,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일본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제가 14살이 되던 해, 해방이 되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어수선했고, 우리 가족도 짐을 싸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고성군 삼산면 삼봉리로 돌아왔지만 형제가 많은 대가족을 거느린 모친의 손은 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딸자식도 배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채근에 따라 삼산면 삼봉초등학교에 갔더니 1학년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에서 6학년 다니다가 귀국하였는데, 한국에서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어머니께 한참 아래인 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느니, 지금까지 일본에서 배운 학습을 토대로 혼자서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국어는 조금 부족할수도 있었지만 수학과 자연 등의 다른 과목들은 잘 할 수 있었답니다. 저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챙기고,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랫동네에서 야학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덕이란 아저씨가 가르치는데 전쟁통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 야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제일 먼저 ‘가갸 거겨 고교 구교…’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합한 기초를 배웠는데 공부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식 발음으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지만 국어의 기초를 익히고 나서는 아이들에게 산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일본에서 배운 산수와 구구단이 이렇게 쓰임새 있게 활용하게 되니 기뻤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가스나들이 공부해서 똑똑해지면 뭐할끼고? 얌전히 살림이나 배워서 시집가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하셔서 딸들에게는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지만 저희 부모님은 생각이 다른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 점을 참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나란한 별 세 개가 뜨면 “삼토가 떴으니 공부하러 가자!” 소리치면서 책가방을 챙겨 야학으로 갔고, 돌아올 무렵이면 별들은 하늘 가운데까지 솟았습니다.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움의 즐거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집에는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두 남동생의 죽음이었습니다. 한 명은 갓난쟁이일 때 경기를 일으켜 죽었고, 또 한 명은 국민학생일 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 일이 부모님께는 큰 상심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일곱이나 되는 딸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도 보내야 한다며 슬픔을 딛고 일어나셨습니다. 동생들 중 명자, 경자, 윤자는 중학교까지 보냈답니다.
함바집 운영만으로는 식구들 생계와 여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어 생선장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솔섬 바닷가에는 생선이 많이 잡혔습니다. 새벽이면 어머니는 큰 다라이(대야)를 들고 선창으로 나갔습니다. 어부들이 잡아온 갈치는 은비늘을 번쩍였고, 꽁치와 정강이는 뱃전에서 뛰어올랐습니다.
봄이면 멸치와 공멸치로 젓을 담갔고, 여름에는 게와 문어를 받아 고성장으로 나가셨습니다. 가을 전어와 줄돔, 겨울이면 메기와 대구가 어머니의 다라이에 담겨 팔렸습니다.

여동생들이 어머니의 노동의 대가로 중학교 공부를 할 때, 저는 살림을 맡았습니다.
보리방아를 찧고 절구질을 하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습니다.
된장 간장을 담고, 김치를 버무리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했습니다.
제가 살림을 도왔으니 어머니는 돈이 될만한 일거리를 찾아 쉼없이 손을 놀렸습니다. 남의 집 바느질거리를 맡아 두루마기와 치마저고리를 만들고 초상이 나면 상옷을 지었습니다. 작고 가녀린 몸피로 부지런히 동동거리시는 제 어머니는 사내 대장부와 맞먹는 능력의 소유자셨지요.
저는 어머니께도 배웠지만 제 스스로도 여자로서의 덕성을 쌓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느 집이나 첫째는 순하고 말을 잘 듣는 편입니다. 지 알아서 눈치껏 형편껏 부모 힘들지 않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동생들 돌봐주는 것이 맏이의 소임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동생들은 집안 일에 열심인 저를 위해 학교 문고에서 책을 빌려와 주었습니다. 그 때 참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소공녀, 소공자, 몽테크로스토 백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들의 내용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너무 재미있는 환상의 이야기에 빠져서 책장이 닳도록 읽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중학교에 가고 공부를 계속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공부에도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 그 뒤에 다시 시작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저는 학교 못 간 설움을 책을 읽으며 다 풀었습니다. 여동생들의 교과서를 뒤적여보았는데 특히 국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몇 번이나 읽고 외우기까지 했습니다.
안다는 것, 지식을 쌓고 지혜를 모은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무지막지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김몽무’
쌍거풀진 눈매가 선하고 말이 별로 없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혼인을 하고 신랑각시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신랑은 6.25 참전 용사였고, 우리 집 대문에는 ‘국가 유공자의 집’이란 문패가 따로 걸렸습니다. 전쟁이 나면 젊은이들은 징집 영장을 받았고, 국가의 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영예로운 죽음으로 기록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 조상님 음덕으로 복을 만났으니 더욱 조상님을 잘 모시라는 암시로 알았던 세월입니다.
신랑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나무를 잘 만졌으므로 김대목으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삼산면에 살다가 그 동안 모은 돈으로 고성읍내 무학동으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고성읍 송학리 306번지 (송학로 135번길 40-4)의 이 집은 100년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55년을 살았으니 이 집의 나이도 꽤 되는 셈입니다.
처음에는 초가 삼칸의 작은 집이었습니다. 갈대 담장 너머로 마당이 훤히 보이던, 볼품없는 대문도 신랑의 야문 손끝에서 새로워졌습니다. 대목인 신랑이 여기저기를 손 보고 조금씩 고쳐가면서 점점 쓸모있는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집을 크게 짓지 않았으니, 기둥과 서까래를 그대로 둔 채 헐고 틔우고 넓혀가는 손만 보았으니 새로 지은 대궐 같은 집들에 비해서는 볼품없고 작지만, 저희 부부는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신랑은 야무지고 매착 있으면서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공치사하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나붓나붓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찬찬한 대목이었습니다. 흔히들 남정네들이 손대던 화투를 하지 않아서 믿을만했습니다. 술을 몇 잔 잡숫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했지요. 술은 음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대목일을 하다보면 무거운 목재를 옮길 일도 있고, 돌이나 흙을 나를 때도 있고, 힘 쓸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집을 짓는 일이 느긋하게 세월아네월아 하며 시간을 보낼수도 없고, 설계대로 일을 진행해야 하니까 마음과 몸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일이라고 합디다. 힘든 일을 끝내고 막걸리 몇 잔, 소주 몇 잔의 휴식과 평화로움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제 신랑도 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분이셨습니다. 밖에서 대목 일을 하는 분들과 드실 때도 있지만 집에 와서 밥상머리에서 술을 드실 때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고등어자반도 노골노골 굽고, 해물을 잔뜩 얹은 파전도 구수하게 구웠습니다. 녹두를 갈아 넣은 빈대떡은 얼마나 즐겼는지, 아이들도 빈대떡을 참 좋아했습니다.
날마다 집안을 쓸고 닦으며 열심히 살림을 살았습니다.
이웃의 진선생댁은 이렇게 자주 말을 걸었습니다.
“이 집 아저씨는 나갈 때는 공무원처럼 깔끔하고, 집에 들어올 때는 먼지를 뒤집어 쓴 노가다로 오시는데, 입성은 대강 차리고 내보내도 되는거 아이가?”
그러나 저는 신랑이 꾸지리하게 나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작업복도 반듯하게 다려서 깔끔하게 입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신랑을 그렇게 챙기고 위신을 세우는 것이 각시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신랑은 이런 말로 내 복장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방정시리 털고 쓸고 닦으모 돈이 안 붙는다. 대충해야 찾아오는 기다. 임자처럼 그렇게 먼지털이로 탈탈 털어내는 것은 오는 복을 쫓는 것과 같은 기라. 대강 하소!”
그러나 제 성격이 어디로 가겠는지요? 저는 평생을 깔끔하게 정리정돈 하면서 살았습니다.

큰아들 인태는 초등학교부터 우등상을 받아왔고, 입댈 구석이 한곳도 없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작은아들 영태는 성격 좋아서 친구들과 잘 사귀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아이였습니다.
고명딸 한선이는 똑 부러지는 야무치였습니다. 숙제며 준비물이며 미리 해 놓고 빈틈없이 내일을 대비하는 아이였습니다.
저는 모범생인 인태와 매사에 철두철미한 한선이에 비해 영태와 성격이 잘 맞았습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인태는 엄마에게 척척 안기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곧잘 했습니다. 장 보는데 따라나서기도 했고, 머스마가 부엌에 들어오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하던 시절에, 그릇도 날라주고 반찬도 들어주던 다정다감한 아이였습니다.

김대목은 10명 넘은 목수를 데리고 다니며 집을 지을 때도 있었습니다. 항상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기에 같이 일하는 목수들이 김대목을 믿고 따른다고 했습니다.
‘김대목이란 사람은, 인건비 받을 건 있어도 줄 것은 없다!’ 이 문장이 보증수표였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식속들을 챙기고, 그들이 먹고 살만한 월급을 보장해 주려 애썼습니다. 오죽했으면 같이 일하는 새끼 대목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재는 돈 못 버요. 일을 그렇게 꼼꼼하게 하모 우찌 돈이 되끼요? 더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대충 끼어 맞출때도 있어야 돈이 될낀데. 우짜모 남의 집을 그렇게 뚜드려감서 짓는단 말이요.”
이 말을 들은 김대목은 자신의 속마음을 이렇게 드러냈다고 합디다.
“60년 살 집이라면, 100년 넘게 살도록 지어야지. 김대목이 지어줬으니 잘 산다, 이런 말 들어야지. 우찌 얼기설기 일을 한단 말이요?”
김대목은 그런 사람이 맞습니다. 살면서 점점 존중과 존경심이 대나무 기둥처럼 자랐고, 참으로 변치않는 소나무같은 사람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희 부부도 세월을 따라 흐르다보니 나이를 먹고 이제 아흔이 넘었습니다.
영감은 기억도 가뭇가뭇하고, 무엇인가 물으면 빙그레 웃음으로 대신합니다.
저도 몸이 편치 않아서 제대로 걷지를 못합니다. 주로 앉아서 생활하는데 아직 정신은 초롱처럼 맑고 옛 기억은 어젯 일처럼 선명합니다.
저희 부부의 생활을 도와주는 박여사가 참 고맙습니다. 박여사는 손끝이 야물고 음전한 사람입니다. 집안을 반질반질하게 윤기 나도록 닦고 씁니다. 끼니 때가 되면 조물조물 나물을 무치고 부글부글 찌개를 끓여 맛난 밥을 챙겨줍니다. 마당도 자주 쓸고 물청소를 해 주니 온 집안이 깔끔합니다.
무엇보다 저의 말벗이 되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늙은이들이 어디에 대고 말을 하겠던지요? 자식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있으니 날마다 찾아와서 우리를 돌봐주는 박여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제가 오래 전의 이야기를 꺼내면 이렇게 말합니다.
“모친, 그 이야기 몇 년 전의 일인가요?”
“하마, 육십 년도 넘었제? 아니다. 칠십 년이 넘었나보우.”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쏟고 받아줄 말벗이 있어서 날마다 웃고 삽니다.

저희 부부는, 고성읍 송학동에서 6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이 곳은 별로 변하지도 않고 옛날 함께 살던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서 이웃입니다.
인근에 100세가 넘은 노인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 노인 다음으로 우리가 나이가 많답니다.
세월이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겠지요. 순리를 거스릴 수 없으니 기꺼이 따르렵니다.
저희 나름대로는 욕먹지 않게 살려 노력해온 삶이지만, 혹시라도 잘못이 있다면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세요. 아직 갚지 않은 말빚이 있다면 모두 잊어주세요.
저희 부부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남은 이웃분들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송학동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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