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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학로 135번길, 이 골목에서 평생을 묻었다. 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곳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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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볕에 고실고실 말라가는 고추를 다듬는다. 내 생의 남은 시간도 이렇게 말라가리니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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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분군의 오솔길을 걸으며 삶과 죽음이 늘 곁에 함께 있음을 헤아려본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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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 살아 생전에 이런 호칭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는데 이제사 불러봅니다. 쑥스럽고 부끄럽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맘 먹고 함 불러 보렵니다. 살아오면서 보니, 참 다정스럽고 따뜻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디다. 우리 부부도 금슬 좋기로 이웃에 소문났지만, 모든 게 그립고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우리네 삶이란게 그렇겠지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도 지나고 보면 후회스럽고 미련이 남고, 다시 그 날이 돌아온다면 좀 더 알콩달콩 재미지고 꼬신내 폴폴 나도록 살았으면 합니다. 가는 세월을 붙들 수 없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노을빛으로 지고 있을 저의 지난 생을 천천히 회람해 봅니다.
어제는 고분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가까이 있어도 좀처럼 올라가서 걷지 못하고 우두커니 쳐다만 봤는데 마음을 다잡고 한 바퀴 돌아보니 옛생각이 주렴처럼 흘러내립디다. 제 어릴 때는 독뫼(똥메)라 부르기도 했고, 야산처럼 나무들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성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마치고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스마들은 독뫼를 지나치지 못하고 재작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영감님도 그 머스마들 중의 한 명이셨지요? 저의 초등학교 1년 선배이시니 어쩌면 학교에서 자주 마주쳤을 수도 있겠지요. 그 때는 서로가 이름도 몰랐지만 20여 년이 흐른 뒤에 인연이 닿아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사람의 일은 하루 앞을 예상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무덤이었을 고분을 천천히 걸으며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추면 죽음이고, 활동하면서 생각하고 이렇게 걷는 것이 삶이라면 그 차이를 어찌 이러쿵저러쿵 떠들겠습니까마는, 저는 아직 생명을 소중히 지키며 생의 나날을 걸어가는 중입니다.
잔디도 단풍이 드는지 노르스름하게 변해가더군요. 잘 다듬어진 고분 사잇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니 눈물겹습니다. 흔히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계절을 맞고 보내는데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어디 있을라고요? 농작물이 열매를 맺고, 과육에 단맛이 스며들고, 세상의 나뭇잎은 단풍물이 들고, 그 아름다움이 눈부시게 절정을 이루다가, 조락(凋落)을 맞이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자연의 모든 과정이 우리 인생사와 닮았구나 싶어서 생각이 많아지는 게지요?
그나마 예전의 남정네들은 여인에 비해 용감하고 자기 표현을 하고 살았으니, 가을을 남자의 계절, 운운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성도 가을이 되면 센치멘탈해지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예쁜 옷 고운 옷 입고 나들이 가고 싶어진답니다.영감님,골목길을 들어서면 가끔 눈물이 납니다. 송학로 135번길 50-26, 이 곳으로 들어오는 골목은 차가 다닐 수 없게 협소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좁은 곳에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있으면 사람 살기에 좋은 곳으로 여겼지요. 이웃의 24번지 대문도 가만히 만져봅니다.
30여 년 전, 영감님은 저를 편하게 해 주겠다고 퇴직금으로 세 채의 집을 지었지요. 그 집에서 나오는 월세로 생활하며 고생하지 말라더니, 친구에게 사기당하여 집 한 채를 날리고, 또 한 채는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걸요. 그 시절엔 제법 돈 들여서 잘 지은 집이다 싶더니만, 요즘은 편리하고 밝은 아파트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얼마 전에 딸이 다녀가면서 “엄마, 집이 어두우면 사람까지 어두워질 수 있으니 낮에도 전등을 환히 밝히세요”라더군요. 마당에 야채들을 심어서 날마다 들여다보며 키우는 재미로 삽니다. 쪽파는 줄을 맞춰서 나란히 심었습니다. 바람도 선들선들 드나들고 햇살도 공평하게 받으라고요. 상추는 잎이 무성한데 서리가 내리면 시들겠지요. 그 전에 뜯어서 노인정에 들고 나가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어야 할 텐데,,,, 요즘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누군가에게 주는 것도 살짝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는 것도 일이니까요.
애지중지 하던 장독도 거의 비었습니다. 예전에 아이들도 어리고, 식구들이 많을 때는 항아리마다 된장이며 간장, 고추장이 그득했었지요. 대봉감도 손 타지 않게 항아리 속에 넣어뒀다가 겨울 밤에 하나씩 꺼내 아이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하던지요? 동치미도 두어 항아리 재웠고, 김장김치도 몇 단지나 담궈서 긴 겨울을 났었지요. 고구마를 삶아 국물을 마시며, 동치미 무를 아작아작 씹던 아이들의 재재거리던 소리가 귀에 들릴 듯 합니다.그 시절, 저는 돼지며 소를 키웠더랬습니다.
집 안이 넓었기에 외양간이며 돼지우리를 지을 공간이 있었고, 떡방앗간하던 친정에서 나오는 뜨물이며 떡찌꺼기들이 아깝기도 했고, 공무원이던 남편의 박봉에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은 여러 마음이 합해져서요. 날마다 떡방앗간에 가서 뜨물을 머리에 이다 날랐습니다. 똬배기(또아리)를 해도 머리밑이 화끈거리게 아팠지만, 무럭무럭 자라던 소와 돼지를 생각하면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짐승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먹이를 주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짐승을 키우면 집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그 입들이 배가 고프면 밥 줄 손만 쳐다보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여 저는 하루치를 온전히 외출하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새벽부터 짐승들을 먹이고, 자식들 셋을 챙겨서 학교에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고, 또 짐승들의 저녁을 챙기며 어느 하루 완전한 나들이를 즐겨보질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서운해 하지도 않았구요.그러면서도 부녀회장 일을 17년간이나 했습니다. 3년만 더 일하여 20년을 채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지요. 마을의 절미저축을 독려하고, 농협 저축을 권장하고, 마을에 잔치할 일이 생기면 집집마다 쌀을 거둬 떡을 맞췄습니다. 읍사무소의 전달사항을 일일이 전하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함께 하자 청하고, 예방접종을 맞자고 권유하는, 많은 일들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집집마다 사는 사정을 알고, 사람 사이의 인정과 슬픔을 나눈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꼭 필요한 말조심을 잊지 않으면서요.
영감님, 저는 읍내에서 태어나 고성읍을 한번도 떠나보지 못하고 붙박이처럼 살았군요.삼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제 부친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명랑하고 의리있는 분이셨습니다. 젊었을 때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장관 표창까지 받으신 활동가셨습니다. 감투도 많으셨지요.돈 버는 일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기에 어머니가 가정 살림을 맡아 떡집을 꾸리셨습니다. 일은 고되었지만 식구들 배 곯이지 않았고 저도 그 시절에 여중까지 나왔지요. 중학교 때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친구에게 빌려온 소설책을 밤새워 읽었습니다.
다 읽고 아쉬운 맘에 “친구 집에 가서 소설책 바꿔올게요.” 청이라도 넣을라치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답니다. “야심한데 어딜 간단 말이냐? 내일 날이 밝으면 행해도 늦지 않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인지 저는 숫기가 없는 편이었습니다.떡집 일을 도와야 했고, 어머니가 권해주시는 남정네를 만나 선을 봤고 결혼을 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정신대를 피해 열일곱에 혼인했고, 저와는 열 일곱 살 나이 차가 납니다. 가끔 사람들이 “계모냐?” 라고 묻기도 했지요. 저도 떡집 일에 힘들어 짜증이 나면 “계모라서 일을 이렇게 많이 시키는 거요?” 하며 대들기도 했답니다.
처녀때의 일들이야 제 또래 누구에게나 있지만, 제가 양장점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친구랑 둘이 양재 기술을 배워서 읍내에 양장점을 차렸답니다. 고성여중, 고성여고, 학생들의 블라우스와 치마를 주로 만들었지요. 여학생들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양장점에 들어와서 치수를 재고 가면, 저는 친구와 둘이 옷본을 대고 가봉날에 맞추어 바느질을 했습니다. 옷을 가봉하는 날, 여고생들의 얼굴은 복숭아 빛으로 익습디다. 새 교복을 입고 새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꿈을 꾸고, 희망을 얘기했겠지요.
가끔은 고성읍내를 돌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나면 생각하곤 한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저 얼굴은 내가 교복을 맞춰주느라고 세 번씩이나 만났던 그 소녀일까? 라구요.양장점에 일이 없을 때는 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친구와 감을 수놓을 때는 보까시 실을 이용하여 감잎도 단풍물을 들였고, 풋감에서 익어가는 감빛을 보까시로 표현하는 걸 즐겼지요. 잎을 표현하는 색실들도 어쩜 그렇게 다양하던지요. 저는 짙은 녹색과 감청색의 어울림을 즐겼고, 코스모스와 구절초도 자주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수줍게 피는 제비꽃을 수놓아 면손수건을 교복을 맞춘 소녀들에게 한 장씩 선물하면 얼마나 좋아하던지요. 그 시절이 아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어제 일처럼 선연합니다. 시누님과 단 둘인 영감님께 시집 보내신 어머니의 맘이 짐작됩니다. 워낙 일에 질리셔서 저를 시댁이 단촐한 곳에서 손에 물 묻히는 일 적게 하며 살란 그 마음이 아리게 전해오지요. 그런데도 어머니의 뜻과는 다르게 짐승 키우느라 날마다 바빴으니, 인생이란 얼마나 아이러니 한지요?참, 어느 날 영감님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동네에서 어떤 일을 하고 다니건데, 사람들 입질에 그렇게 오르내리는 거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시는 겝니까? 저는 맹세코 가족에게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습니다.”라고 주저앉았더니 저를 꼬옥 안아주시면서 “그게 아니요. 동네에서 하도 치사를 하길래 고마워서 내가 반대로 말했던 거요. 당신은 참 좋은 아내며, 어머니이며,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하는 훌륭한 주부요” 하셨지요. 그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러고 보면 영감님은 제법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힘들다 말하면 파스도 부쳐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셨지요. 살림에 보태려고 애쓰는 것이 안쓰럽다며 퇴직하면 편하게 살도록 해 주마, 진심으로 말씀해 주신 것 모두 기억합니다.영감님,자식 셋이 모두 중년이 되었습니다.저마다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 삶이 꿈결처럼 흘렀음을 되새깁니다. 짐승 키우는 일을 그만 두니 시간이 참 많습디다. 저는 그 시간들을 배움의 순간들로 돌렸습니다. 사물놀이도 배우고, 사진을 찍고 디카시를 썼지요.
2018년에는 디카시 전시회에 작품 몇 점을 냈고, 선생님께 칭찬의 말씀도 들었답니다. 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잔잔히 몇 줄을 적었지요.단풍물소리에 잠을 깬나무들이 발갛게옷을 갈아 입었네영감님,저의 시간들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중입니다. 눈이 나빠져서 글을 읽기도 힘들고 무엇에 집중하는 것도 힘이 드네요.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 머잖아 영감님이 계신 곳으로 가게 되겠지요.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기라도 할까요?
저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할매가 되었고, 제 머릿속의 영감님은 젊은 아저씨로 남았는걸요. 제게 남은 세월을 천천히 걷겠습니다. 남의 말을 조심, 또 조심하고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조용하고 나직하게, 제게 남은 시간들을 챙길게요.저와 부부로 인연 되어 주셨고,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신 분, 고마운 말씀을 여기에 남깁니다. 2022년 11월 늦가을 어느 날, 아내 김필선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