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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화성

2천 년을 거슬러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우는 역사도시 고성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
조선과 동서양 건축기술력 집약한 정약용
대부분 훼손 후 70년대 화성성역의궤 바탕 복원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10월 28일
↑↑ 수원화성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과 정치적 포부를 담아 계획해 축성했다. 사진은 화성행궁의 모습
ⓒ 고성신문
↑↑ 화성성역의궤의 장안문 모습. 이 기록 덕분에 화성의 복원이 가능했다.
ⓒ 고성신문
↑↑ 수원화성 축성계획과 공사기록 등을 담은 화성성역의궤
ⓒ 고성신문
↑↑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의 남수문은 2012년 복원됐다.
ⓒ 고성신문
↑↑ 수원화성의 북수문으로, 수원천의 범람을 막으면서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화홍문
ⓒ 고성신문
▣ 글 싣는 순서
① 역사와 문화의 가치, 세계문화유산도시 고성
②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③ 과거부터 미래까지 생태환경의 지속가능성, 한국의 갯벌
④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⑤ 천 년의 하늘이 들려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경주
⑥ 다시 피어나는 역사의 숨결, 백제역사유적지구
⑦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⑧ 살아있는 불교 정신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유산
⑨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잠들다, 조선왕릉
⑩ 조선의 정신을 깨우는 종묘와 종묘제례악
⑪ 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⑫ 춤에 담은 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처용무와 강강술래
⑬ 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화성
⑭ 우연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⑮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 제주의 해녀문화와 칠머리당영등굿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요즘은 행리단길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행궁동을 찾은 날은 8월, 여름의 한가운데. 가만히 있어도 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날씨에도 사람들은 맛집 앞에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고, 골목 곳곳에서 인생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행궁동은 수원의 명소다. 한쪽 골목이 유독 시끄러워 들여다 보니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영우아빠가 운영하던 우영우김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행궁동은 왕의 의지와 효심 그리고 조선의 기술력이 집약된 곳이었다.

#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역작,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정조의 개혁 의지와 효심, 획기적인 건축기술과 백성을 우선하는 어진 임금의 모습을 모두 담은 역작이다.
할아버지 영조가 애초부터 후계자로 키우려 했던 정조는 당쟁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굴레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을 잊지 않고 기리고자 했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충신과 군사력,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양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새로운 도시로 눈을 돌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에도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에도 수원부가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다.
 
지금도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인 수원은 당시에도 한양과 남쪽을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 중심지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신도시 조성이었으니 거대한 공사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양주 배봉산(현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 현륭원(顯隆院)으로 옮겼다. 이때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다. 그리고 전체 길이 5.74㎞, 높이 4~6m의 성벽이 130㏊를 에워싸는 형태의 성을 축조했다.

처음 예상한 공사기간은 10년이었다. 그러나 젊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등장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화성은 1794년 1월 착공해 중간에 6개월간의 정역을 포함해 34개월만인 1796년 10월 낙성연을 치렀다. 5.7㎞에 달하는 규모의 성을 축조하는데 2년 10개월의 공사기간은 당시의 기술로서는 놀라운 속도였다.

정약용은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조해 1793년 ‘성화주략’을 만들었다. 이는 화성 공사의 지침서가 됐다. 수원화성은 정약용의 거중기가 사용된 첫 번째 공사이자 최고의 공사였다. 거중기 뿐 아니라 활차와 녹로 등 신기술과 기계들이 수원화성 공사 중 발명되고 직접 사용됐으며, 동서양의 축성술이 모두 사용된 건축방식 등을 볼 때 한반도의 성곽 중 가장 독보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성의 외벽은 벽돌이지만 내벽은 자연 그대로다. 성곽의 아래는 돌, 위는 벽돌을 쌓았고 망루간 간격은 화포의 사거리 이내라 서로 엄호가 가능하다. 이전의 성은 외부에 독립된 망루를 설치했지만 화성은 망루가 성 내부에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화공을 위한 장치나 화재방어용 방책, 대포에 대한 대비,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 등을 통해 수원화성이 방어적 목적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하나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성은 남문을 정문으로 삼지만 수원화성은 남문인 팔달문이 아니라 북문인 장안문을 정문으로 한다는 점이다. 정조가 한양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문으로 들어온 탓이다. 임금의 행렬이 지나야 하는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보다 더 크다.

# 사라질뻔한 화성, 기록으로 되살아나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기준의 완전성과 진정성, 보존 및 관리체계까지 충족시키며 1997년 등재가 결정됐다. 그런데 이 웅대한 건축물이 실은 한국전쟁 당시 부서지고 깨져 원형이 사라졌다가 70년대 들어 대대적으로 복원된 건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원화성은 복원한 것이므로 이 기준에 맞지 않았다.
화성은 1800년대까지는 꾸준히 보수하며 원래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화성행궁은 파괴되고 방치됐다.
여기서 화성의 수난이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수원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수원 시내에서도 수시로 전투가 벌어졌고, 수원화성은 수 차례 폭격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수원화성은 몇 개의 시설물을 제외하면 대부분 흔적만 남게 됐다. 화성의 복원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1801년 일종의 화성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그림과 글로 고스란히 담긴 수원화성의 설계도와 상세한 설명 덕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낸 수원화성은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축성계획과 제도, 법식 등 축성과 관련된 전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축성 시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과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과 임금, 시공에 사용된 기계와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까지 수원화성의 계획부터 축성과정, 완공까지 전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있다.

1997년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조사단이 화성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조사관들은 3일간의 현지 조사 끝에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 되지만 성곽 건축물들은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또한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성을 고루 갖춘 건축물의 모범”이라고 했다.

# 정치 경제 효심이 담긴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애초부터 철저한 계획을 세워 신축한 성곽이었고, 거주지로서 역할과 방어용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읍성과 산성을 합해 만든 성곽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축성법에 동서양의 신기술과 지식이 동원됐고, 성 곳곳에 당시 흔치 않았던 방어용 시설을 배치했으며 주변의 지형을 개선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태를 만들어 건축적 아름다움도 담고 있다.

수원화성은 성곽을 이루는 성벽과 4대문, 방어용 시설까지 모두 잘 보존돼있다. 덕분에 방어용 군사시설이자 주거지역이었던 화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완전성을 갖고 있다.
또한 축조 당시 특성이 잘 남아있고, 전쟁 피해를 비롯해 파손된 부분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고증에 의해 전통적 기술과 재료로 복원하며 높은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화성 주변은 화홍문이라 불리는 북수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도 그대로 있고, 현재 도시의 내부 가로망 구성 골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 200년 전 축조된 화성의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성이라는 점 또한 수원화성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 중 하나다.
 
대부분의 성은 도시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다. 그러나 수원화성의 축성을 계획한 것은 군사적, 방어적 목적보다 정치와 경제, 지극한 효심이었으니 이 성곽에 담긴 ‘효’ 사상의 동양철학은 문화·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공간은 576칸 화성행궁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후 1800년까지 수원 행차가 모두 13차례였다.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행궁 역시 수난을 피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관청으로도 활용됐던 행궁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건물은 갖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건물은 제대로 보수되지 못했고, 훼손되거나 방치됐다. 그러다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은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에서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 철저한 보존 및 관리체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유산의 보존 및 관리체계 또한 중요한 심사요건으로 삼는다. 화성은 전체 영역과 팔달문, 화서문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해 국가지정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보호법과 경기도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문화재와 보호구역 경계에서 500m 이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돼있다. 때문에 이 범위 내 지역에서 진행되는 모든 건설행위는 해당법에 따라 사전심의를 받아야만 한다.
 
한국전쟁 이후 수원시민들이 화성 주변에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됐다. 이에 수원시는 지금까지도 이 집들을 사들여 문화재구역으로 편입하고 있다.
수원시는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 운영조례’를 제정해 화성과 부대시설을 관람하고 활용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문화재 현상 변경 처리 기준을 준용하면서 지구단위계획을 통해 성곽 안팎 건폐율과 용적률, 높이를 제한하고 있다.
 
수원시 화성사업소에서는 30여 명의 직원이 배치돼 유산 관리 및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3~4년 주기 전문가의 정밀모니터링을 통해 성곽의 상태나 보수 필요성 등을 확인하고 있다. 수원화성의 관리나 관광활성화, 수익사업을 담당하는 수원화성운영재단이 설립돼 수원시 조례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성곽 내 건물들이 대부분 목조건물이므로 화재 위험에 대비하고자 CCTV와 무인경비장치를 설치하고 상황실을 운영하는 등 24시간 감시 체계가 작동된다. 또한 화성의 문화재수리를 위해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격을 갖춰 공인된 기술자가 수리를 담당해 문화재의 가치를 유지한다.

파괴되고 훼손돼 흔적조차 찾지 못할뻔 했던 소중한 유산은 철저한 기록 덕분에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지자체와 문화재청, 지역민이 함께 이 웅대한 유산을 지키고 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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