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역사와 문화의 가치, 세계문화유산도시 고성
②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③ 과거부터 미래까지 생태환경의 지속가능성, 한국의 갯벌
④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⑤ 천 년의 하늘이 들려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경주
⑥ 다시 피어나는 역사의 숨결, 백제역사유적지구
⑦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⑧ 살아있는 불교 정신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유산
⑨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잠들다, 조선왕릉
⑩ 조선의 정신을 깨우는 종묘와 종묘제례악
⑪ 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⑫ 춤에 담은 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처용무와 강강술래
⑬ 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 화성
⑭ 우연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⑮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 제주의 해녀문화와 칠머리당영등굿
2009년 9월 30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강강술래와 처용무,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등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5건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한꺼번에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대표목록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강강술래와 처용무를 비롯한 5종목에 대해 전 세계의 문화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인류의 창의성을 증명하는데 기여했고, 정부가 해당 유산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 보호조치를 위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등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 역병을 몰아내고 경사를 부르는 처용무 처용무는 궁중무용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궁중무용 중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탈을 쓰고 공연한다.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5명의 무용수가 공연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들어서 변화한 것이다. 고려시대까지 처용무는 한 명의 무용수가 등장했다. 음력 섣달 그믐 묵은해의 역신과 사귀를 쫓는 나례의식에서 춘 것으로 전해진다. 처용무는 설화에서 유래했다. 통일신라 말 헌강왕이 울산 인근 개운포에서 운무낀 하늘을 보고 연유를 물으니 동해 용이 부리는 조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한 절을 짓자 먹구름이 걷히면서 용이 일곱 아들과 함께 춤을 추는데 그 중 처용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헌강왕과 동행해 경주로 왔다. 어느 날 처용이 집으로 돌아오니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 하고 있었다. 이때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역신은 처용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 후 사라졌다. 이때부터 처용은 악귀와 역병을 몰아내는 상징이 됐고 이것이 처용무로 전해오고 있다.
이런 의미는 처용의 탈에도 담겨있다. 처용탈은 피부는 팥죽색이고 검은 사모에는 모란 2송이, 복숭아 7개가 꽂혀있다. 팥과 복숭아는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 하얀색 모란은 경사스러운 일을 끌어들이는 진경을 상징한다. 처용무의 음악은 춤과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처용무의 음악은 ‘윤회’라는 이가 세종의 명으로 봉황음이라는 음악을 고쳐 만들었다고 돼있다. 3악장의 봉황음은 조선왕조와 함께 문화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최초 작곡자나 작사자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처용무에는 다양한 음악이 사용되는데 영조, 정조 시대에 들어서는 불교의식 음악이 사용되기도 했다.
처용무에서 악공은 67명에 이르렀고, 악기 또한 가야금과 거문고, 당피리, 대금, 동발, 장구, 아쟁, 퉁소, 해금 등 20종이었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유교철학와 함께 남성들이 추는 궁중춤이라는 점, 사람형상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이자 벽사진경의 의미 등 그 특성이 뚜렷하다. 무용수들은 허리를 구부렸다가 펴고, 팔을 하늘 높이 들었다가 무릎 위에 놓는 동작을 반복한다.
통일신라시대 설화를 시작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1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처용무는 전통적 가치를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 처용무는 인류 문화 다양성의 원천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인류의 창의성을 증명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를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을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했다는 점 등을 들어 2009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서울 서초동 (사)국가무형문화재 처용무보존회(회장 이진호)는 100여 명의 이수자가 공연은 물론 문헌탐구, 심포지엄 등을 통한 처용무의 학술적 연구 등 활동하게 활동하고 있다. 보존회는 전수교육을 통해 젊은 예술인들을 계속해 양성하는 것은 물론 처용무의 원형을 연구하고, 이를 공연으로 일반에 알리고 있다.
# 풍년 자손번창 주술적 의미 가진 강강술래 강강술래의 역사는 2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시대 농촌풍습에서 강강술래의 원형이 확인된다. 강강술래는 여성의 놀이다. 남성이 중심이던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큰소리 내는 것은 의사소통일지라도 부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단 하루, 추석만큼은 휘영청한 보름달 아래에서 손을 맞잡고 뛰고 춤추며 노래할 수 있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행위와 연결되며 주술적인 의미도 갖는다.
벼농사를 주로 했던 호남지역에서 추석은 수확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큰 명절이었다. 이때 행해진 강강술래는 풍년과 관련된 놀이로 보고 있다. 강강술래는 자손번창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동시에 여러 명의 여성이 함께 호흡을 맞춰야만 놀이가 완성되는 강강술래는 집단생활을 하던 시기 그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행위의 의미도 갖고 있다.
# 명량대첩 승리로 이끈 강강술래 현재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주로 전해온다. 강강술래보존회(이사장 최성재)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왜의 수군을 대파했던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우수영에 둥지를 틀고 있다. 보존회가 자리잡은 우수영관광지에서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망금산이다. 이름대로 망을 보는 산이었던 망금산은 꼭대기에 망터가 남아있고 그 아래에는 강강술래터가 있다. 강강술래터에서는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 보인다.
임진왜란 명량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인근의 부녀자들에게 군사들의 옷을 입히고 밤에 모닥불을 둘러싸고 강강술래를 하도록 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일본 수군은 어른거리는 그림자 때문에 병력을 과대평가했고 섣불리 뭍에 발을 딛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강술래를 이르던 ‘강강수월래(強羌水越來)의 의미가 ‘강한 오랑캐가 물을 넘어온다’인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60년대만 해도 해남과 진도 각 지역이 개별적 특성을 갖고 강강술래를 행했으나 70년대 이후 진도의 강강술래가 사라지면서 현재는 해남에서 주로 전해지고 있다.
# 젊은 예술인 확보가 강강술래 보존의 관건 “젊은 예술인의 부족은 전통예술의 쇠퇴를 가져올 겁니다. 모든 전통예술이 같은 이유로 위기를 맞고 있어요. 특히 우리 강강술래처럼 성별이 한정된 데다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분야는 후계자 확보가 시급한 문제입니다.” 차영순 기능보유자(국가지정 무형문화제 제8호)는 50여 년째 강강술래에서 소리를 맡고 있다. 1970년 결혼과 함께 해남 문내면으로 온 그는 처녀시절 고향마을에서 보던 강강술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33명이 한 조였던 친정마을의 강강술래에 비해 문내면의 우수영강강술래는 105명이 뛰는 대규모였다. 한창 많을 때는 250명이 뛰기도 했다. 차영순 예능보유자는 1965년 먼저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우수영 출신 김길임 선생에게 소리를 배웠다. 1972년 전남대 지춘상 교수가 우수영강강술래를 무대공연용으로 각색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 차영순 예능보유자가 강강술래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강강술래는 전국민속예술축제나 경연에서 상을 휩쓸면서 전성기를 누렸고, 그만큼 참여희망자도 넘쳐났다.우수영강강술래는 인근 10개 마을의 여성들이 참여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학교 운동장 하나를 통째로 쓰면서 연습해야 했다.
“강강술래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물론 세계인이 함께 지켜야 하는 유네스코 무형유산입니다. 해남과 진도 강강술래도 맥이 끊길뻔 했던 위기가 있었어요. 선대 예인들이 지켜낸 덕분에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대에서 이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젊은 보유자를 발굴해내고, 그들이 예술활동으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강강술래보존회는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서, 각종 행사에서 시연하는 것은 물론 인근지역 학교에서 강강술래를 지도하고 보존회 전수회관에서 전수교육도 하고 있다.
해남군 역시 강강술래의 보존과 대중화, 문화관광상품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대공연에 그쳤던 강강술래를 놀이로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지난 2013년부터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별로 다양한 형태의 강강술래 놀이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또한 동작에 따라 다른 음원 4가지 형태도 개발됐다.
예를 들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강강술래는 전래동요를 응용하는 것은 물론 신체활동을 유도해 강강술래에 등장하는 남생이 등 동물들의 특징을 어린이들이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강술래는 태평가나 농부가 등에 맞춰 밭에 씨를 뿌리고 땅을 다지며 농사짓는 동작을 넣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서 가치를 높이려면 단순히 옛형태를 전승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원형과 그 가치에 대해 연구하고 알려야 해요. 그리고 전승과 보존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강강술래를 비롯한 전통예술에 젊은 전문 예술인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