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같이 크고 우람한 고성한우’를 작출하고 싶은 인공수정사 버킷리스트의 완성을 위하여 집중 또 집중!
박권호 (65세, 삼산면, 축산업)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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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고비는 언제나 세월이 지나면 버틸만 했던 일이 되고 팍팍했던 삶도 꽤나 그럴 듯했다 싶다. 나에게는 여전히 려민동락의 꿈이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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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耳順) 이순을 맞고 벌써 다섯 번째 가을이다. 언제나처럼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이슬이 발목을 적시는 들판에 서서 한참 동안 식물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내 나이가 되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자연과 사물의 속엣말까지 들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가 보다. 어떤 말은 잘도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많다. 나를 칭찬하는 말은 걸러서 듣고, 나를 책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새겨서 들을 일이다. 곧 벼수확이 시작될 것이다. 농민들의 깊은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소출은 차치하고라도 인건비와 각종 농자재비는 상당히 올랐다. 정부의 벼 수매가는 농민들의 기대와 소망을 한 번도 만족시킨 적이 없다. 값싼 수입쌀이 창고를 점령하고 1인 가구가 늘면서 국내산 쌀 소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줄 특단의 조치는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와 냉수 한 컵을 마신다. 가슴속에 고요와 맑음이 찾아든다. 벽에 걸린 ‘려민동락(黎 검을 려, 民 백성 민, 犝 송아지동, 犖 얼룩소 락)’을 올려다본다. 이 말은 본디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따온 말이다. 同音異議語를 활용하여 나름의 방법으로 풀어 보았다. 소와 닭을 돌보며 살아가는 검게 그을린 백성이라고나 할까? 나는 평소에 땀 흘리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성실하고 노력하는, 검게 그을린 얼굴의 사람이 좋다. 축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미 잠 깬 소들이 나를 기다리는 중이다. 내 발걸음만 듣고도 먹이통 앞으로 몰려든다. 음메~라며 소리 지르기도 하고, 몸짓으로 반가움을 표현하거나 머리를 흔들어 기다림을 나타내기도 한다. 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먹이를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저들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일상을 같이 살아가는 동지거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름을 붙이는 존재가 어찌 사람에게만 해당되랴.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배고픔을 달래주면서 먹을 것을 나누게 되면 식물이나 동물에게도 정이 생긴다. 그 정으로 시간을 쌓고 더불어 함께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소들과 최고치의 밀착으로 내 삶의 남은 일정을 짜고 있다. 마지막 남은 버킷리스트는 ‘코끼리 같이 크고 우람한 고성한우’를 키워내는 일이다.
# 十代 아버지는 성격이 곧고, 매사에 철두철미하며 목표의식이 강한 분이셨다.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며 의술을 배웠고, 약방에서 조제기술을 익히셨단다. 그런 능력을 인정받아 보건직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 고성군내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발이 닳도록 다니셨다. 자신에게 엄격함은 물론 가족에게도 조금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다. 나는 고성초에 입학하여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더러는 개구쟁이 짓도 했다. 동네 타작마당에서는 비석 치기와 자치기에 빠졌고 팽이를 치거나 연을 날리며 놀았다.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어도 배고픔은 모르고 자랐다. 인정 깊은 어머니는 도시락을 넉넉히 싸 주셨는데, 점심을 싸 오지 못하는 친구들 한두 명의 몫으로 충분했다. 6학년에 오르면서 교육청의 일방적인 학구 조정에 떠밀려 대성초로 강제 전학했다.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아버지께 떼를 썼지만, 정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전학 간 대성초에는 아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우연히 교실 뒷켠학급문고에서 겉표지마저 뜯어지고 없는 낡은 책 한 권 ‘시이튼 동물기’를 만났다. 이 책에는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늑대왕 로보도 있고, 곰 와프도, 영리한 토끼도 주인공으로 나온다. 날마다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의리, 진실, 지혜, 사랑, 모정과 부정, 생명의 근원이 동물에게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동물에게 지극한 관심이 생겼으며, 그들을 눈여겨 살피게 되었다. 중학교 때에는 집 근처 남산을 오르내리며 토끼와 다람쥐들을 찾아다니고, 개미와 벌레들도 관찰하며 지냈다. 공부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온통 노는 데에만 재미를 붙였다. 중3이 되자 고등학교 진학이 눈 앞에 닥쳤다. 나는 수원농전으로 진학하고 싶었기에 공부도 느슨히 했다. 5년을 마치면 대학 편입도 가능하고, 유학도 갈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상상했다. 그런데 그해 8월 말쯤에 수원농전이 S대에 편입된다는 문교부의 발표가 있었다. 진로를 수정해야 했다. 방황하던 내게 담임이었던 송성탁 선생님은 철성고로의 진학을 권하시며 입학원서에 사진을 붙여주셨다. 시험일이 다가왔고, 건성으로 답안지를 작성하고 나왔는데 결과는 2등(차석)이었다. 반장이 되어 학급을 이끌었다. 교련시간을 통하여 리더십을 익혔고, 사람 사는 사회의 조직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배웠다. 고교시절 내내 아버지는 나에게 의사의 길을 집요하게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축산의 길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보건직 공무원으로 살면서 의사란 직업에 대한 선망이 있었을 테고, 장남이 그 꿈을 이루어주길 원하셨던 것 같다. 나는 의사의 길이 싫은지라 방황하면서 취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즈음 아버지가 “네 친구 기주가 진주농전으로 간단다”라며 진학을 권유하셨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친구는 진학을 포기해 버렸다. 그 일은 내게, 지금도 마음이 아리는 빚으로 남아있다.
# 二十代 나의 20대는 진주농전 축산과 낙농전공 학생으로 시작했다. 진주농전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국립학교인지라 도서관에 많은 전문서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교 말미에 공부를 접어버려서 쉽지는 않았지만, 농전시절에는 도서관에 살다시피하면서 거의 모든 전문도서의 열람표에 내 이름을 적어 나갔다. 2년을 졸업하고 22살에 영장을 받았고, 입대를 48일 남기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군대의 힘든 훈련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은 깊었다. 제대 후 선택의 여지없이 농민후계자가 되었다. 잠시나마 돼지와 젖소와 한우를 길러보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친구들의 권유로 인공수정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생소한 ‘한우 인공수정사’의 길은 처음부터 난관이었지만 책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길이 내 인생을 관통하는 주된 직업이 되었다.
# 三十代 나의 30대는 ‘돼지 액상정액’으로 현재와 같은 ‘돼지 인공수정 체계’의 도전이 시작점이었다. 1988년 당시로서는 생소한 신기술이 영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내가 접하게 된 것이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다. 도리없이 책을 펼쳐 들었고 완성하는데 5년쯤 걸렸나 싶다. 지금은 돼지 기르는 사람은 누구나 이 기술을 상용하고 있다. 사실 나는 열 살 때부터 돼지를 키워 봤다. 우리집 처마 밑에 2마리부터 시작하여 6학년 즈음에는 100여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나는 아침이면 동네 집집을 돌며 아버지를 도와 물지게로 잔반을 날랐다. 보리쌀뜨물이나 심지어 행주 씻은 물이라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머지 뜨물들을 걷어왔다. 그때 이미 돼지사육과는 낯이 익었고 익숙해진 일이라 이후에 본격적으로 돼지를 기를 때에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돼지는 의외로 깨끗한 동물이며 똑똑하고 지혜롭다. 그들의 규칙으로 화장실을 형성하는데, 그것을 ‘똥자리’라 부른다. 돼지는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들 삶을 지키고, 새끼들을 낳아 기르는 복스런 동물이다. 제대 후에 시작한 인공수정사의 수입이 보태어져 가족 부양에 별반 어려움없이 평범한 농축산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에 ‘고성군농민회’에 가입하여 제3대 회장을 맡았다. 내가 회장직을 웬만큼 수행할 수 있었던 힘은 많은 회원 동지들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종수친구와 후배지만 친구 같았던 충만이의 역할이 큰 힘이 되었다. 이 두 친구는 임기 내내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다. 94년부터는 직불제 주창에 앞장섰으며, 농민들의 주장과 건의를 정부에 전달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농민들의 한숨과 통탄을 밟고 1995년이 저물어 갈 즈음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되어 말라카시 협정문에 서명, 국회가 비준함으로써 우리 농민의 삶을 옥죄는 WTO 시대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공장 건설과 경제발전, 부동산 개발에 모든 힘을 실어주면서, 지켜야 하는 우리 농촌은 점점 피폐해져 간다. 도시에는 사람과 자본이 모여들지만, 농촌은 젊은이들이 떠나고 농부들의 통장 잔고는 상대적으로 점점 비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 四十代와 五十代 어느새 나는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소의 인공수정업에 돼지 액상정액 제조업까지 보태어져 업무량이 점점 늘어갔다. 미친 듯이 일했다. 가정 살림과 아이들 교육은 가족에게 맡기고 농장일이며, 인공수정일에 매진했다. 바깥 활동에 집중하다 보면 집안에는 소홀하기 일쑤다. 2000년, 내 나이 마흔셋에 우연히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4년제 대학을 마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도교수님의 초청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갔다. 그 후로 아이들의 대학 바라지까지 합쳐보니 나는 8명의 대학 바라지를 한 셈이 되었다. 한집에 살면서 도와주며 지켜보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을지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인 환갑 무렵에야 가늠할 수 있었다. 벌이도 시원찮은 남편이 오지랖만 넓은 데다 네 아이의 양육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내는 반란을 일으켰다. 파경의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아이들은 성장통을 겪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마음이 무겁고 깊은 회한이 나를 옥죄어온다. 모든 일을 잘해 나간다면 인생의 슬픔과 괴로움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런 와중에 양돈협회 고성지부장을 맡으라고 강권을 받았다. 권하시는 분들과의 인간관계를 저버리지 못하여 수락하고, 3년동안 절치부심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때마침 불어닥친 양돈분뇨 해양배출 중단에 대비한 육상 처리시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속된 말로 돼지 똥물을 액비로 만드는 공장을 짓는 일이었다. 3년 동안 변변한 성과도 없이 임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건강상실이었다. 원형 탈모며 대상포진은 약과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3년여 동안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2014년 쉰일곱의 초겨울 아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단장지애(斷腸之哀)의 고통이 찾아왔다. 아들의 차가운 주검을 안고 몸부림쳐 울었다. 아들이라고, 강하게 키우겠다고, 아비의 정과 사랑을 쏟지 못한 후회와 탄식은 자책이 되어 해일처럼 솟구쳤다.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다. 오랫동안 넋 잃은 사람으로 지냈다. 그런 나를 찬수친구가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독여 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을 그렇게 보냈다. 친구의 고마움은 내가 관속으로까지 가져갈 관포지교의 우정이다. 불혹의 사십대와 지천명의 오십대는 삶의 절정기라고 할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성취를 얻게 되고, 어느 정도의 재산도 모으고, 주위에서 인증을 받고, 일가를 이뤄가는 시기이다. 나의 전성기는 그런 호사를 느낄 겨를도 없이 무심한 세월만 흐르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참담함과 상실감은 뼈에 아로새겨지는 아픔과 함께 아무것도 필요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랜 시간 나를 잃고 살던 어느 순간 딸들이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를 추스리려고 억지로 노력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이 닭들과 소들이다. 지금 나에게 닭은 하루를 깨워주는 알람이고, 소들은 삶의 목표를 던져주는 귀하디 귀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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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어야 진정한 동지애로 함께 사는 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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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곧 다가올 나의 七十代 1987년 말, 우정깊던 정훈이 친구의 배려로 삼산면으로 이주하여 돼지농장을 시작했으나 10년 전 찾아온 건강문제로 농장을 정리했다. 몸을 추스르던 어느 날, 우연히 닭을 몇 마리 기르기 시작했고 4년 전부터는 소도 기르고 있다. 농촌의 현실은 피폐하다. 노령화가 가속되면서 빈집이 늘어나고, 산밭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경지구역정리가 되지 않은 천수답과 저수지 물을 댈 수 없는 밭들은 머잖아 황무지가 될 것이다. 십 년 뒤에는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절반 이상이 노동력을 상실하게 될 테고, 그들이 짓던 땅은 수풀만 무성해지지 않을까 싶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막막함이 밀려온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지 30년이 넘었어도 농촌의 현실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다양한 방법의 농촌살리기가 실행되곤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아직도 요원하다. 정책을 짜는 사람들은 농민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더 자주 듣고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내가 농민회에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농민운동, 농촌운동을 같이 해 나갈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어쩌면 패배주의에 빠져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농민회 활동은 어렵고 가난한 자들의 몫이 아닌, 농촌의 리더들이 적극 나서야 하는 일이다. 혼자 걸으면 외로운 길도 서로가 어깨를 겯으면 힘과 신이 날 터인데……. 올해만 아주 여러 통의 부고를 받았다. 내가 가면 흙 묻은 손으로라도 맛난 것을 챙겨 주시던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있다. 소에 달라붙은 가분지를 떼내며, 소와 선한 눈망울을 맞추시던 그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뵐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 이웃의 모든 어른들이 내 부모고 내 친척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호미와 낫을 쥐고, 이랑을 만들고 거름을 내며 우리 땅과 흙을 지키시던 분들이시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자리에 잡초만 무성하다면 그 분들의 흔적은 어디에서 다시 찾는단 말인가? 나는 이 땅의 주인으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 옹의 저서 제목)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 서로 함께, 서로 손 잡고, 발 맞추며 신바람 나게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시 또 생소한 책 한 권을 펼치고 있다. 내 삶의 마지막 도전을 시작했다. ‘코끼리 같이 크고 우람한 고성한우’를 키워 내겠다는 소망을 담아서, 동료들의 동행을 촉구하고 있다. 25년 전인 90년대 말부터 짬짬이 공부해 오던, 한우의 수정란 이식 기술을 고성에서도 상용화해서 고성한우가 전국에서 제일 으뜸가는 한우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 내 농장의 한우에 직접 실험도 해 봤다. 쌍둥이가 태어나는 걸 보고 자신감도 얻었다. 앞서나간 지역에 비하면 조금은 늦은지도 모르지만, 나는 감히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10년 후 쯤이면 ‘한우’하면 ‘고성 한우’로 통하도록 전국에 이름을 알리고 싶다.
이순의 중반에 ‘려민동락(藜 검을 려, 民백성 민, 犝 송아지동, 犖 얼룩소 락)’을 음미하며, 나의 새로운 버킷리스트 쓰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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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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