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평생 나의 동반품인 붓을 쥐면 정신은 맑아지고 마음은 평온의 반석 위에 오른다. |
ⓒ 고성신문 |
|
# 고래를 품은 작은 도서관장 도서관 마당에 서면 사방이 훤하다. 왼편으로는 구절산과 철마산이 어깨를 겯고 나란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세월을 셈하듯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른편 당항포 앞바다엔 햇살이 주렴처럼 내린다. 샛바람이 이는지 물결은 배둔쪽으로 쏠리고 요트 한 척이 물미끄럼을 타듯 흔들리고 있다. 닻은 내렸을 테고, 돛은 올렸을 테다. 면사무소 앞마당엔 진달래가 분홍꽃잎을 흔들고, 자목련은 수줍은 웃음을 베어무는 중이다. 사방팔방 둘러보니 봄볕이 꼬솜하다. 참으로 화사하고 따순 계절이다.
|
 |
|
↑↑ 행서와 초서가 나랑 잘 맞아. 글자 한 자 한 자에 자신의 혼을 담을 줄 알아야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지. |
ⓒ 고성신문 |
|
주문한 책이 왔다는 전갈이다. 매달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도서목록을 훑어본다. 연세 드신 분들도 읽으실만한 책을 선정하느라 나름 신경쓰는데, 이즈음은 대출이 빈약하다. 어떻게 하면 면민들이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으려나?
코로나 시국이 길어지면서 모든 일상이 변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변수가 생겼다. 여간해서는 대면을 피한다. 가까운 사람들과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앉거나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는 기회가 줄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지 않던가? 맛난 음식을 앞에 놓고 서로의 잔을 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주 삼던 날들이 그립다.
그 대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내 삶의 기쁨과 보람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생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고래를 품은 작은 도서관 지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젊은 날부터 장년까지의 35년 여를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을 고래로 비유한다면, 내 고향 동해면의 작은 도서관은 고래 입속의 수염 한낱보다 작을테다. 그러함에도 서울살이에 비해 이 곳 작은도서관의 나날이 내겐 봄빛처럼 달콤하다.
관장을 맡은 지 3년 차가 되었다. 올해는 나름대로 준비를 하여 ‘고래를 품은 마을 학교’를 열게 되었다. 아이들이 찾아와서 제비처럼 재재거리며 도서관 곳곳을 들쑤시고 다닐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와야 제맛인 게다. 더욱이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이 와서 떠들고 장난치고 웃음지을 모습은, 저 마당의 봄꽃보다 향그럽고 아름다울 터다.
|
 |
|
↑↑ 부채 바람이 시원하듯이 글씨는 우리의 맘과 눈을 시원하게 맑혀 주는 게지. |
ⓒ 고성신문 |
|
내년엔 어른들을 위한 마을학교를 열어볼 계획이다. 시골에는 아이들이 상상초월의 수준으로 줄어드는 대신 노령인구가 늘어난다. 시골 도서관이 앞으로는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
동화구연을 들려드리고, 시낭송을 함께 하고, 책을 읽은 느낌을 서로 나누고, 그림을 그리면서 어린 날로 돌아가 신나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몸은 노인이 되었어도 가슴 안에는 소년소녀를 품고 있으니까. ‘추억은 힘이 세다’는 말처럼, 누구나의 마음에 잠재된 추억의 빗장을 열고, 그 속에 갈피갈피 숨은 이야기를 꺼내 도서관 벽에 걸고 싶다.
# 동해면 복지관의 서예교실 강사 붓을 잡은 지 40여 년이 되어간다. 붓은 내 평생의 반려품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부님께 받은 선물이 붓이었다.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형이 둘, 누나, 남동생, 여동생까지 있었다. 힘든 일과 어려운 일은 형과 누나들 몫이었고, 자잘한 심부름들은 두 동생들이 알아서 맡아주었으니 나는 중간에서 왔다리갔다리만 하면 되는 저울추 같은 존재였다.
학교에서도 조용한 아이였다. 미술시간에 붓글씨를 쓰게 되면, 벼루가 없는 친구들에게는 먹을 갈아 나눴고 붓 잡는 법도 알려주곤 했다.
군대에 가서 붓글씨를 쓰게 되었다. 경험치를 살려 행정반의 ‘차트사’가 되었는데 남들이 매직이나 후리펜을 사용할 때 나는 붓으로 글씨를 썼다. 군 생활 3년 내내 상장을 쓰고 각종 보고서 차트를 만들었다.
1985년,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취미 부서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퇴근을 하고는 저녁마다 서예학원에 갔다.
이전까지는 붓글씨를 쓰는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드디어 서예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서예는 5체(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가 있는데 각 체마다 최소한 3년 이상을 연마해야만 글체를 익혔다고 할 수 있으니, 5체를 모두 쓰려면 최소한 1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보통은 해서나 예서부터 시작하고 마지막에 전서를 다양하게 해독하고 쓰게될 때 비로소 서예가의 타이틀을 얻게 된다고나 할까?
40년 가까운 서예 습작의 세월동안 국전에 열서너 차례 입선과 특선을 받았고, 초대작가로 추대받았다. 여러차례 합동 전시회를 열었으며 현재는 초대작가전에 출품을 하고 있다.
귀향하면서 생각이 많았다. 지금까지 익힌 서예를 누군가에게 나눌 기회는 없을까? 재능기부를 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나설 요량이었다. 군청 직원들을 상대로 재능기부의 방법을 알아보고, 이웃한 당동도서관에서 나눔할 방법을 타진하던 중 내 고향 동해면에 복지관이 생겼다.
2019년, 복지관 프로그램으로 제일 먼저 서예를 시작했다. 저녁 7시부터 9시 반까지 수강생들과 시간을 보냈다. 열심히 글씨에 매진하다 보면 10시를 넘기기 일쑤다. 서예교실에서 수강생들이 벼루를 갈고 붓을 세워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에도 평화가 온다. 시간이 강물처럼 내 곁을 스쳐간들 조급할 게 무어란 말인가!
화선지를 펴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갈 때 머릿속은 맑아지고 무아지경이 된다. 먹물을 찍어 붓으로 내려쓰는 곳이 처음엔 종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아(自我) 속으로 흡입하듯 빨려든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나와 글씨가 혼연일체가 되고, 붓이 곧 나인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수강생들의 글씨를 복지관에 내걸던 날,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내가 붓을 잡은 40여 년의 세월이 수많은 먹물의 점과 선이 연결된 글씨로 남게 되었으니. 나는 결코 붓을 놓지 못할 것이다. 아니 놓지 않을 것이다. 글씨를 배우겠다는, 서예를 하겠다는 수강생이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 나, 김정룡의 어린 날 나는 동해면 내곡리에서 태어났다. 동해면에서 정치망 어장을 하시던 조부님은 넉넉하고 훈훈한 분이셨다.
어장막에는 일꾼들이 많았다. 조부님을 뵈러가면 사람들이 나를 귀히 여기고 아껴주셨다. 나 또한 그분들께 공손히 인사드리며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혹시라도 조부님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 매사에 신중하고 바른 품행으로 살아야 함을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다고나 할까?
제2대 동해면장을 지내신 ‘김학래’ 조부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람은 나였다. 인심이 후덕하셨으니 이웃의 추대를 받아 면장에 오르셨을 터다. 부친은 농협조합장을 하셨고 군의원도 하셨다.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분이셨는데 그만 사고로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해의 중학교에 진학했다. 진해에는 작은조모님이 살고 계셨다. 조부님은 아끼는 손주 한 명을 작은조모님께 맡기고 싶어하셨는데 조신하고 말 잘 듣던 손주, 정룡이가 낙점된 것이다.
시골에 살던 조용한 소년은 꽃샘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낯선 도시에 발을 디뎠다. 입학을 하고 영어의 ‘에이 비 시~’가 입에 붙을 무렵이 되니 못견디게 고향 생각이 났다. 따끔하게 내 머리통에 닿던 형들의 꿀밤까지 그리워졌다. 모친과 누님의 잔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경화동 가로수에 벚나무가 나란히나란히 뻗어있었고 3월 말부터 꽃송이가 터지면 금방 온 나무가 꽃잎으로 화안해졌다.
밥상장사가 쌀 몇 줌에 사카린을 몇 알 넣은 뒤, 불 위에 받친 둥근 기계를 빙빙 돌려 튀밥을 튀겨내면 몇 배씩 불어나던 것처럼. 벚나무는 한꺼번에 꽃송이를 벌렸다.
벚꽃이 피면 진해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내 고향의 어른들도 조부님의 멸치 배를 타고 진해로 구경을 오곤 했다. 봄날 꽃놀이를 ‘해치간다’란 표현을 썼으며 조부님 어장의 모든 일꾼들도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봄꽃을 보러 진해로 왔다. 내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게 해 준 기억은 해치하러 온 고향 어른들의 귀에 익은 사투리였다.
“귀한 데련님은 공부 열씨미 잘하고 있지예?” “할배를 봐서라도 잘 해야 함미더. 앞으로 크게 될 낌미더!” “사람이 태어나모 서울로 가야된다 안 쿱디꺼. 큰물에서 놀라카모 시골은 이자삐고 도시에서 잘 살아야 됨미더.”
작은조모님은 삼촌과 고모를 낳았고, 나는 진해여고에 다니던 고모와 단짝이 되어 진해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고모는 얼굴이 벚꽃처럼 화사했고 목소리와 행동거지는 잎사귀처럼 싱싱했다. 중학교 3년 동안, 매년 봄이면 내 귀에 닿던 그 목소리들이 오늘은 더욱 간절하다. 그 말씀을 들려주신 어른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소풍 떠나신 지 오래지만, 벚꽃이 필 무렵이면 온 몸에 신열이 오르듯 내 맘에는 열꽃이 핀다.
# 서울살이와 밥벌이 군대를 다녀오고 결혼을 하고, 79년도에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제일은행 사무전산부에서 본격적인 밥벌이를 하게 된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직장생활은 단순하고 변함없는 나날이다. 짜여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듯이 출근하여 일하고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고 월급을 받고 저축을 하고 자식들을 키우고 가끔은 부부싸움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딸 둘을 낳았다. 나는 장손이 아니었기에 득남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내게 주어진 삶을 공손히 살면 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두 딸은 한양대학교에 입학했고, 큰딸은 조지아주립대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뉴저지대 교수가 되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사위는 회계사로 일한다.
작은딸은 서울에서 직장에 근무 중이다. 미국에 사는 큰딸은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나마 작은딸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지금도 직장생활을 하는 둘째의 여섯 살 난 손주를 아내가 돌보고 있다. 손주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고향으로 내려온다고 했으니, 나도 얼른 그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1997년 IMF가 터질 때 제일은행에서 명예 퇴직을 했고, 자격증을 딴 뒤에 건물관리소장일을 12년간 하고는 정년퇴직을 했다. 그러는 동안 귀향에 대한 꿈을 꾸었다. 아니 서울살이를 하면서도 항상 귀향을 꿈꾸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낙향하여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의 건물관리소장으로 8년간 일한 뒤에 드디어 완전한 귀향자가 되었다.
# 고향에서의 나날 2015년까지 부산에 사셨던 큰형도 귀향을 원하시어 고향에 쌍둥이 집을 지었다. 지금은 형과 이웃한 집에서 오순도순 잘 지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한 운동을 하고 9시부터 주식시장을 살핀다. 3시 반까지 세계 금리의 동향과 각국의 경제 지표를 살피며 돈과 자본의 흐름을 파악한다. 앞뒤의 시간에 책을 읽고, 마당의 풀을 매고, 텃밭을 일구고 고래를 품은 작은 도서관을 살핀다.
또한 나를 필요로 하는 단체에 가입하여 고향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고향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나는 지금 평화롭고 안온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고 취미와 특기까지 되짚어내는 현재의 생활에 대만족이다. 다만 한 가지, 아내가 얼른 고향으로 내 곁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객지에서의 생활이 안정적이고 불만은 없었지만 항상 미진한 뭔가가 있었다. 고향의 흙내음, 구절산에서 내려온 바람내음, 당항만의 바닷내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넉넉하고 풍부한 여유시간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돌아올 고향이 있어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어서,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
 |
|
↑↑ 남외경 시인/수필가 |
ⓒ 고성신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