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이야기 담은 도시 전체가 박물관
신라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배수시설 한 눈에 호국과 왕권강화 염원한 불교 예술의 극치 연구와 발굴로 신라 1천 년 역사 복원 박차
경주는 그 자체가 박물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도시다. 신라 천년의 고도인 경주는 불교유적과 왕경유적이 1천5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담은 경주역사지구는 불교미술을 간직한 남산지구, 신라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왕과 귀족들의 고분군이 밀집한 대릉원지구, 신라불교예술의 정수를 담은 황룡사지구, 왕경방어의 핵심인 산성지구 등 5개 지역으로 구분돼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유적의 밀집도와 다양성이 뛰어나다는 평과 함께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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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불교예술의 극치로 꼽히는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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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 구름을 마시고는 내뱉는다 해서 토함산이라 한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오르면 만나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 불교문화의 찬란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불국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다. 이 기록에는 신라 법흥왕 15년인 서기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이 발원해 불국사가 세워졌고 이로부터 약 50년 후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절집을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 10년인 751년 재상 김대성이 개수하며 탑과 석교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국사 사적’에서는 100여 년 앞선 눌지왕 당시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경덕왕 때 김대성이 3창했다고도 전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역시 같은 시기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런 기록을 볼 때 창건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경덕왕 때 재상을 지낸 김대성이 불국사를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불국사가 완성될 당시 대웅전은 25칸, 다보탑과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 등 80여 종의 건물 2천 칸의 웅대한 가람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불국사는 의승병의 기지였다. 의승병의 활약에 기를 펴지 못했던 왜군은 이 장대한 가람에 불을 지르고 부수는 만행을 저질렀다. 2천 칸의 장대한 가람은 모두 불타고 파괴됐다. 1604년 조선 중기에 들어서야 복구와 중건이 시작됐다. 1805년 비로전 중수 이후 중수와 관련된 기록은 없다. 이후에도 불국사는 건물이 파손되고 성보가 도난당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66년 부분보수를 시작해 1973년에 이르러서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국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60~70년대 당시 신라시대의 사찰 양식이나 건축기술에 대한 자료는 부족했다. 신라시대 고찰인 불국사는 고려와 조선의 사찰 건축양식을 빌어 복구됐다. 통일신라시대의 대가람이 조선시대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이보다 앞선 1924년에는 다보탑의 해체보수와 법당의 중수가 진행됐다. 유물에 대한 복원이나 보존에 대한 지식도 없고 검증도 되지 않은 채 시작된 공사는 오로지 일제의 문화정책 전시물일 뿐이었다. 이 때 사라진 다보탑 속 사리장치는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 한반도의 기나긴 역사를 함께해온 불국사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 석가탑과 다보탑 신라시대 불교예술의 극치를 꼽으라면 누구나 제일 앞에 가져다붙이는 것이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불국사 자하문과 대웅전 사이 마당에 동서로 자리한 두 탑은 석가탑이 10.29m, 다보탑이 10.75m로 키가 비슷하다. 서쪽에 있는 석가탑은 탑신에 별다른 조각이나 장식이 없이 간결하고 안정적이다. 석가탑은 신라시대 석탑의 표본이라고도 한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다. 1966년 해체, 복원 중 2층 탑신 가운데 사리공에서 금강사리함과 유물들이 발견됐다. 이 중에는 8세기 초 목판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도 있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여겨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770년경)’보다 20여 년 앞선 것이다. 동쪽 다보탑은 석가탑에 비해 훨씬 화려하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같은 위치에 서있는 것은 현재의 부처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과거의 부처 다보불이 옆에서 옳음을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보탑 역시 부침이 많았다. 1925년 경 일제는 다보탑을 완전히 해체하고 보수한다. 이때 탑 속에 있었을 사리, 사리장치와 수많은 유물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보수공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다보탑 기단의 돌계단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만 앉아있다. 원래는 네 마리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세 마리는 일제가 약탈해간 후로 아직까지 되찾지 못하고 있다. 1966년에는 보수공사를 하던 중 2층의 옥개석을 들어올리다가 나무전신주로 만든 도르래가 부서지면서 추락해 탑이 망가지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서 사고를 지켜본 스님들은 탑을 보며 통곡하고, 200여 명의 관광객들은 격분해 인부들에게 달려들었다. 성보를 보수하다 말고 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진압해야 했다. 조각난 다보탑을 보고 사람들이 또다시 분노할까 봐 가마니로 덮어뒀다고 한다. 약한 나라, 부족한 지식과 기술 때문에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걸작인 두 탑은 자칫 볼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 석굴암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은 같은 토함산에 있어도 10여 분 떨어져있다. 처음 만들어질 때는 석굴사였다지만 지금은 작은 암자다. 불국사를 중수했다고 하는 김대성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굴암은 방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평면과 구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본존불은 물론이고 벽면에 조각된 38체까지도 걸작이 아닌 것이 없다. 백색 화강암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여래좌상 본존불은 문무대왕암이 있다는 동해를 굽어본다. 석굴암 본존불 앞은 유리벽으로 막혀있다. 훼손을 막기 위한 방편이다. 유리벽 너머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님은 도저히 1천 년도 훨씬 넘은 것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석굴 벽을 둘러친 금강역사와 보살상들도 그 유려한 선에 감탄이 흐른다. 수 세기가 지나며 석굴암은 점차 잊혀졌다. 수리와 관련된 마지막 기록도 1891년었으니 1907년 일본이 석굴암의 존재를 알게 되기까지 16년간 석굴암은 방치됐다. 일제가 발견했을 때 본존불은 코가 깨지고 연화대가 갈라져 파손됐으며 천장이 망가져 흙이 흘러들어오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8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천250여 년 전에 살았던 신라인들은 본존불을 습기로부터 지키는 냉각기술을 갖고 있었다. 석굴암은 샘물이 솟는 암반 위에 조성됐다. 샘물은 석굴 바닥을 차게 만들어 인공적 결로를 일으키고, 습기가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원리다. 일제는 석굴암을 보수하기 위해 시멘트를 사용했다. 그리고 바닥의 샘물은 습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막아야할 것이 됐고, 배수를 위해 아연관을 설치했다. 당시로서는 시멘트도 아연관 배수시설도 최신이자 최고의 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바닥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석굴 벽면에 결로와 이끼가 생겼다. 습도가 높아지자 시멘트에서는 탄산염과 칼슘염이 배출됐다. 화강암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참담한 결과였다. 10년 후 일제는 이번에는 누수와 습기를 잡는다며 천장 방수공사를 시작했다. 아스팔트를 바르고 아연관 배수시설의 방향을 바꿨다. 그래도 습기는 잡히지 않았고 또다시 10년이 흘러 1927년과 1934년 푸른이끼를 없앤다며 증기세척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매끄럽지 않은 처리로 인해 본존불은 물론 석굴암 내부 조각들이 마모됐다.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석굴암은 1976년 훼손을 막기 위한 유리벽이 설치돼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벽 내부에는 공기순환설비를 가동하고 있다. 유리벽 밖에서 보는 본존불이라도 그 위엄, 신라 불교미술의 우아함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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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가 살았던 동궁과 안압지로 알려졌던 월지의 야경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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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궁과 월지 해 질 무렵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흔히 안압지라 불리던 곳이다. 동궁을 마주보는 울타리 너머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하다. 동궁과 월지의 매력은 해가 져야 알 수 있다. 야경은 SNS에서 그야말로 핫플레이스로 꼽힌다. 오후 7시 40분쯤, 해가 떨어진다 싶은 순간 건물벽 아래에서, 나무 아래에서 조명이 켜진다. 조경석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던 이들에게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신라의 왕자가 살았던 동궁은 왕이 살던 월성의 동쪽에 있어 이름 붙었다. 동쪽은 봄을 관장하는 청룡의 방위라 춘궁(春宮)이라고도 불렸다. 동쪽은 봄을 관장하는 청룡의 방위이기 때문이다. 동궁과 월지에서는 금동판불 같은 것들이 발견됐다. 월지가 만들어진 때는 나당전쟁 시기였다. 김유신의 사망 후 지진과 반란이 이어졌다. 게다가 호랑이가 궁궐에 출몰하는 등 흉흉한 시절이었다. 이로 미뤄볼 때 국난극복을 위해 종교적인 의례를 치른 곳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동궁에서는 나라의 경사나 귀한 손님을 맞아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1975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동궁과 월지에서는 3만3천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됐다. 기와나 벽돌, 건축부자재 등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던 것들은 물론이고 불상과 숟가락, 배, 주령구(주사위), 금동가위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유물들은 통일신라의 건축과 불교미술은 물론 생활상, 왕족과 귀족의 오락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수많은 부속건물들을 거느린 동궁과 월지는 신라의 왕좌를 이어받을 왕자를 교육하고 귀한 이를 모셔 대접하며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이던 공간이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한 후 고려는 신라의 역사 지우기에 나서 전각들을 허물어버렸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현재 동해선인 동해남부선 철도가 동궁의 유구 일부와 겹쳤다. 세월이 흐르면서 월지는 경주 시내에서 유일한 호수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물은 흐르지 못하고 탁해졌고, 시민들은 낚시터로 취급했다. 70년대 중반, 월지 정리가 시작됐다. 준설작업 중 앞서 말한 3만 개가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흥미로운 발굴결과도 꽤 많다. 2017년 수세식 변기가 바로 여기,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됐다. 8세기경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수세식변기는 양쪽에 넓은 석조발판이 있고 아래에 변기가 있다. 무려 화강암이다. 물을 흘려보내는 요즘의 변기와는 다르지만 일을 본 후 항아리의 물을 부어 변을 아래로 씻어내리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까지도 수로와 배수시설이 없어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는데 신라는 그보다 1천 년이나 앞서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동궁 주변은 긴 화강암 배수로가 존재한다. 땅 위에서도 일부 볼 수 있지만 땅 아래 조성된 배수로는 월지 내부까지 이어져 신라의 뛰어난 건축, 배수 기술을 보여준다. 경주시는 신라왕경조성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이 중 동궁 내 정전과 회랑을 복원하고 선착장을 발굴, 구조물을 정비, 미조사지역 확대발굴 등의 복원사업이었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사업비 630억 원을 들이는 대형사업으로, 2015년 7월 발주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유네스코에서는 이 복원이 명확한 기록,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반대했다. 동궁과 월지 복원사업은 결국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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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서도 용이 돼 신라를 지키겠다 유언한 문무왕의 장례를 치른 대왕암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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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대왕릉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지의법사에게 자신이 죽거든 시신을 불교식으로, 고문 밖에서 화장해 유골을 동해에 묻어달라 했다. 그리 하면 자신은 용이 돼 신라를 지키겠노라 했다. 재위한 지 21년만에 문무왕이 세상을 뜨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왕의 유골은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장례를 치렀다. 감포는 경주시내에서 30여 분 거리, 산을 넘어야 겨우 닿는다. 문무대왕릉이 있어 지명조차도 문무대왕면이다. 남아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왕암은 문무왕의 장례를 치른 곳이라는 점은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대왕암 가운데 큰 돌이 유골을 놓고 덮은 것인지 그래서 진짜 수중릉인지, 아니면 유골을 뿌리기만 한 산골처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죽어서도 용이 돼 신라를 지키겠다는 뜻은 받들어졌고, 대왕암은 유골이나 부장품의 유무와 상관없이 상징적인 왕릉이다. 대왕암을 위에서 보면 큰 바위에 동서남북으로 물길이 나있다. 바닷물은 동쪽물길을 통해 중앙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는데, 중앙에는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늘 잔잔하다. 십자 형태의 수로는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서쪽수로를 동쪽수로보다 더 낮게 깎아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다. 대왕암 안쪽의 튀어나온 부분을 정으로 깬 흔적도 있다. 가운데는 대석이 놓여있다. 이런 흔적들을 보면 이 바위섬이 단순히 문무왕의 전설 같은 것이 아닌, 문무왕의 장례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왕의 장례가 치러진 곳이라 그런지 유독 주변은 무속인들이 굿을 자주 벌인다고 한다. 현장취재한 날도 알 수 없는 굿이 대왕암을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거친 파도를 뚫고 대왕암까지 가고자 한다니 안타깝다.
# 감은사지 문무왕은 부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하고자 했다. 문무왕 때 시작된 진국사(鎭國寺) 공사는 아들 신문왕 대에서 완공됐다. 문무왕은 절을 완공하기 전 세상을 뜨고 만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진국사를 완공하고 이름을 감은사로 정한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돼 신라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용혈을 금당 아래에 동쪽으로 물길을 냈다.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경주시내에서 대왕암에 도착하기 직전, 왼편에 두 개의 탑이 서있다. 요란한 장식 없이 단순하면서 웅장한 모습이 신라의 탑 같기도 하고 백제의 탑 같기도 한 모습이다. 감은사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며 세웠던 절은 자취를 감추고 두 기의 탑과 금당의 흔적만 자리하고 있다. 감은사는 2탑 1금당의 통일신라 대표적인 가람배치형식을 가졌다. 감은사지의 두 석탑은 통일신라시기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크다. 신라는 석탑문화가 강하지 않았다. 백제의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아마도 감은사의 석탑 또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서탑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구가 출토됐다. 수레모양인 이 사리기는 화려함의 극치다. 얇은 동판 위에 연화문을 정교하게 새기고, 네 모서리에는 여덟 개의 감실이 있는데 팔부신장이 안치돼있다. 중심에는 작은 보주형 사리탑이 있고 네 모서리에는 네 명의 여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동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암에서는 사리기 2층 연꽃봉오리에서 수정사리병과 사리 55과가 나왔다. 두 사리장치 모두 화려함과 섬세함을 보여주는 불교예술의 극치다. 대왕암이 있는 봉길해수욕장과 가깝기는 하지만 바로 옆은 아니니 물길이 감은사까지 통하려면 꽤 큰 공사였을 것이다. 당초 감은사지 수로는 바다가 아닌, 앞을 흐르는 대종천과 연결돼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2007년 한 방송사에서 감은사 앞 땅을 파 토양분석을 의뢰해보니 창건 당시 절 바로 앞까지가 바다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금당터를 비롯한 절터 이곳저곳에서는 희한하게도 태극무늬가 발견된다.
# 포석정 포석정은 신라의 멸망을 가져온 곳으로도 불린다. 포석정은 63개의 화강암을 다듬어 전복 모양의 물길을 만들고 물 위에 술잔을 띄울 수 있게 했다. 귀족들이 술잔을 띄워 유희를 즐기며 술을 마셨다고 하니 얼핏 화려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포석정은 다른 문화유적에 비해 초라한 지경이다. 포석정은 비운의 역사가 전하는 곳이다. 경애왕 4년,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왔다. 그때 경애왕은 비빈, 종친외척들과 포석정에서 연희를 즐기던 중이었다. 우왕좌왕하던 왕과 일행들은 붙잡혔고 견훤은 경애왕에게 자결하라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나 몰라라 술을 마시며 놀던 왕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걸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음력 11월, 얼음이 얼었을 한겨울이라는 점도 이 신라 멸망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된다. 일부에서는 포석정이 연희를 위한 곳이 아니라 화랑들이 훈련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나라가 어려울 때 제례를 위한 곳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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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계림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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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림
7천300㎢ 면적의 계림은 물푸레나무와 홰나무, 휘추리나무, 단풍나무 등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가운데는 작은 개울도 있지만 장마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말라있다. 개울 주변의 나무들은 굵은 모양새로 봐서 꽤 오래된 모양이다. 나무들이 우거져있어서인지 두어 발짝 차이인데도 길가의 훅 끼치는 더위에 지친 몸이 금세 서늘해진다. 신라는 계림이라고도 불렸다. 신라 초기 제3대 탈해 이사금부터 15대 기림 이사금까지는 계림이 공식 국호였다. 삼국통일 후에는 한반도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당나라에 의해서다. 계림은 월성지구의 대표적인 유적이기도 하다.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얽혀있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기록돼있다. 탈해 이사금 9년, 왕이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에서 들리는 닭의 울음소리에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숲속에는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궤에서 영롱한 빛이 나오고 흰 닭이 나무 아래서 울고 있었다. 묘하게 여긴 그는 왕에게 이를 고했고 왕이 직접 시림을 찾아 궤를 열었다. 황금빛 궤에서는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가 바로 김알지다. 그때부터 시림은 닭이 우는 숲, 계림(鷄林)이라 칭하고 국호로 삼았다. 탈해 이사금은 금궤에서 나온 아이에게 ‘김’씨 성을 붙여주고,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난 아이에게 ‘알지’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슷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수록돼있다. 휘황한 탄생설화가 전하는 숲 치고는 규모가 크지 않다. 입구에는 거대한 회화나무가 밑둥만 남긴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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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대형고분들이 밀집한 대릉원은 인생사진 명소가 됐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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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
대릉원 내에는 모두 23기의 고분이 밀집해있다. 미추왕릉과 황남대총, 천마총 등 익히 알려진 고분들도 대부분 대릉원에 있다. 지금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사적 40호)으로 지정돼있었다. 2011년 들어서 문화재청은 인근지역의 역사성과 특성 등을 고려해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를 통합해 대릉원을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했다. 대릉원은 경주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바로 옆 쪽심지구 발굴 당시에는 신라시대의 도시 기반시설, 건물터가 발견됐다. 그러나 대릉원에서는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경주가 오랜시간 신라의 수도였고 이후에도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대릉원은 신라시대부터 개발이 제한된 구역 아닐까 싶다. 대릉원에서는 문자 기록, 비석 등이 출토되지 않아 정확한 편년을 알기 힘들다. 다행인 것은 고분들이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조성돼 도굴이 어렵다는 점이다.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들의 연대를 측정해 조성년대를 4~6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대형고분들이 밀집돼있다. 입장해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미추왕릉이다.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신라의 제13대 군주인 미추 이사금은 김알지의 6대손이자 기록상 최초의 김씨 이사금이다. 미추왕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친 왕으로 기록돼있다. 부유한 자보다 늙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고, 궁궐을 고치는 일이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며 거절했으며 백성들이 농사에 어려움이 없도록 농사에 방해가 되는 다른 일들을 없앴던 성왕이었다. 학계 일부에서는 미추왕릉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설도 있다. 경주 김씨 문중이 오랫동안 지금의 미추왕릉 앞에서 제사를 지내 지금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라 한다. 대릉원에서 가장 유명한 천마총을 찾았다. 능은 주인이 밝혀진 경우, 총은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고분이라고 하니 천마총의 주인은 아직도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출토 유물들로 볼 때 왕 중 하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천마총은 내부로 들어가 부장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돌을 쌓아올린 돌무지덧널무덤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리벽 안에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허리띠 등이 전시돼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와 죽제금동천마문 말다래등 말을 탈 때 썼던 다양한 부장품들이 전시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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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모전석탑은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은 독특한 모습이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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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선덕여왕은 진흥왕과 진평왕을 잇는 정통성을 가진 왕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성별은 왕권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계가 되곤 했다. 선덕여왕은 강력한 왕권을 갖고자 했다. 백제는 물론이고 당나라마저 여왕이라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신라는 부처의 선택을 받은 나라임을 알려 민심을 모아야하는 상황이었다. 분황사는 국가사업으로 세워진 절이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됐다. 원효대사가 대장경 일부와 불전장식물 등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돌아오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했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무는 동안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을 남겼다. 원효가 죽은 후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실적이었던지, 설총이 아버지를 그리며 예불을 올리니 원효 소상이 고개를 돌려 보더라는 이야기까지 전해온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하고, 경덕왕 때는 30만 근이 넘는 약사여래입상도 만들어 봉양했다는데 수많은 유물들은 불타거나 빼앗기거나 사라져버렸다. 창건 당시에는 규모가 아주 컸다고 하는데 지금의 분황사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신라고찰 치고는 단출하다. 보통의 사찰은 중건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지기 마련인데 분황사는 2차 중건 때 5분의 1로, 3차 중건 때는 그의 3분의 1로 규모가 더 작아졌다. 분황사는 모전석탑이 가장 유명하다. 보통의 석탑은 당연히 돌을 깎아 만든다. ‘모전’은 전탑 모양을 흉내냈다는 뜻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짙은 회색의 단단한 안산암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았다. 절집 입구 들어서자마자 모전석탑을 마주한다. 인도의 영향을 받았겠으나 얼핏 중국의 모전석탑 같기도 하다. 원래 분황사 모전석탑은 9층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과 왜구의 침입, 전쟁을 치르며 파손돼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있다. 석탑 기단 끝에는 수사자가 내륙을 바라보고, 암사자 6마리가 동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중 2마리는 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 1층 감실 안에는 머리없는 불상이 있는데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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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흔적만 남은 황룡사지 9층 목탑의 심초석. 목탑은 높이 80m에 이르렀다고 한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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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지
분황사 바로 옆 너른 들판은 농지도 아니고 공원도 아닌데 자꾸 눈이 간다. 황룡사지다. 현재까지 밝혀진 황룡사지의 면적은 2만5천 평이다. 평방미터로 환산하면 8만2천645㎡에 이른다. 고성에서 가장 큰 사찰인 옥천사가 4만7천500㎡인 것을 생각해보면 황룡사의 엄청난 규모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건립기간만 100년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 영화로운 대찰은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다. 황룡사 지붕 기와 끝을 장식하던 망새는 높이가 186㎝, 너비는 105㎝에 이른다. 망새 크기가 이 정도라면 그 지붕, 또 지붕 아래 건물의 크기는 얼마나 컸단 말인가.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은 1976년부터 8년간 황룡사지를 발굴조사했다. 이때 쏟아져나온 4만 점의 유물 중 망새가 발견됐는데 망새와 금당처를 연구한 결과 황룡사 중금당은 하층 기단 규모만 해도 55mX30m에, 금당의 크기는 경복궁 근정전의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게다가 금당은 2층 이상의 복층 건물이었던 것이 확인됐다. 한 왕조의 궁궐보다 크고 화려한 사찰이라니, 놀랍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한 황룡사 망새는 경주시내 곳곳에서 조형물로, 등대로 만날 수 있다. 황룡사에는 높이가 80m에 이르는 구층목탑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심초석만 남아 1천400년 전의 영화를 짐작만 하게 한다. 심초석은 하나가 가로 4m, 세로 3m로, 모두 64개가 배열돼있다. 한 면의 길이만 해도 22m에 이르는데 그 위로 목탑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높이가 80m라면 지금 아파트 30층 정도의 높이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9층짜리 목탑을 세우면서 못은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끼워맞췄다는 점이다.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마찬가지로 황룡사를 통해 오랑캐의 침입에서 신라를 보호하고 불교로 국가를 일으키며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자 했다. 신라는 백제의 목공장인 아비지를 불러와 목탑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층마다 왜,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 등 신라를 침입하거나 무시하며 괴롭히던 주변 나라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선덕여왕은 이들을 언젠가 신라에 무릎 꿇게 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입하면서 황룡사 구층목탑은 전소됐다. 고려시대 정치했던 자들의 기행문을 보면 황룡사 목탑은 높이와 전망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관광명소였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서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당대 이전부터 있었던 불교건축물 외에 높은 탑을 만들지 못했다. 황룡사 구층목탑의 80m 기록은 1960년대 말 모 그룹의 82m짜리 빌딩 건축 전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이 기록을 깨는 데 1천400여 년이 걸린 것이다. 황룡사에는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나 되는 범종이 있었고, 솔거가 벽화도 그렸다는데 제대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 황룡사지 복원은 더디다. 황룡사의 구층목탑은 황룡사역사문화관 로비에 원래의 10분의 1 크기로 복원돼있다.
경주는 매력 넘치는 역사의 도시였다. 볼 건 차고 넘치는데 2박3일로는 일정이 부족했다. 눈에 담고 느끼는 것만큼 사진으로 찍어내는 재주가 부족한 것이 너무나 아쉽다. 보는 것과 그 감동만큼 글에 온전히 담아내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32℃의 더위와 80%의 습도에 하루 12~13㎞를 씩씩하게 걷고도 더 보고싶은 것이 남아 또 가고 싶은 도시, 눈 돌리는 모든 곳이 천 년의 유산인 경주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