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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습지는 세계5대 연안습지이자 대한민국 1호 국가정원이며 지난해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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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너무 가까워서 사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10년쯤 전에 낙안읍성을 버스에 실려 다녀오긴 했지만 직접 운전해 간 적이 없으니. 어쨌든 순천은 고성에서 넉넉잡고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도시다.
순천에 들어서는 초입부터 ‘국가정원’, ‘습지’ 안내판이 곳곳에 눈에 띈다. 세계 5대 습지라니, 이미 사진으로 영상으로 수 차례 먼저 봤던 광활한 규모의 갈대밭이 기대된다. 여름볕에 색이 바랜 갈대들은 가을 저녁노을이 비치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홀경이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별다른 것도 없는 구불거리는 시골길은 엄청난 규모의 습지를 숨겨뒀을 것 같지는 않다. 고성 마동호 가는 길이나 순천만 가는 길이나, 싶기도 하다.
공원에 들어서니 여느 도심공원과 비교해도 그리 특색있어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잔디광장을 지나니 흑두루미소망터널이라는 작은 터널이 보인다. 한 발 한 발마다 순천만습지에서 발견됐던 흑두루미 한 마리에 얽힌 사연들이 소개돼있다. 다친 흑두루미를 되살려 왔던 곳으로 돌려보낸 후 희망을 발견한 순천시민들의 이야기다.
무진교에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물길이 보이고, 손님을 기다리는 목선 몇 척이 둥둥 떠있다. 다리 위에 올라선다. 히야아아~탄성이 절로 난다.
초여름의 순천만은 푸른 갈대가 옅은 바람에 흩날린다. 데크 위로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바쁠 것도 없다. 불어오는 순천만의 해풍을 맞으며 갈대밭 풍경에 감탄하고 갯벌 사이로 바쁘게 쏘다니는 수생동물들을 보며 감탄한다. 나무데크 사이로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 순천만의 순한 바람을 맞으며 갈대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 시름이 다 씻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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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에 서식 중인 농게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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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에 서식 중인 짱뚱어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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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5대 연안습지이자 대한민국 1호 국가정원
순천만습지는 세계 5대 연안습지 중 한 곳이자 대한민국 1호 국가정원이다. 지난해에는 순천, 보성, 신안, 고창, 서천 등 다섯 개 지역 네 곳(보성-순창)의 갯벌이 ‘한국의 갯벌(Getbol, Korean Tidal Flats)’이라는 이름의 연속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연유산목록에 등재됐다.
순천만은 한국에서 갯벌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연안습지로, 340여 종의 다양한 식물과 239종의 조류가 공존하고 있다. 덕분에 희귀조류를 탐조하거나 촬영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해안 하구의 자연생태계가 원형에 가깝게 보전된 곳이기도 하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가 둘러싸고 있는 순천만은 순천시내를 질러 흐르는 동천, 상사면에서 흘러나온 이사천이 합수하는 지점부터 하구까지 3㎞의 물길을 따라 5.4㎢(170만 평)의 갈대숲과 22.6㎢(690만 평)의 갯벌이 넓게 펼쳐져있다. 갈대숲은 조류의 서식환경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은신처이자 먹이터이기도 하다.
해양수산부는 2003년 순천만습지를 습지보존지역으로 지정,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동북아 두루미 보호 국제네트워크에 가입, 2006년에는 연안습지로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협약에 등록됐다.
물길 주변에 드문드문 군락을 이룬 게 아니라 빈틈없이 빽빽하게 나있는 갈대밭의 면적만 해도 약 15만 평에 달할 정도다. 순천시 교량동, 대대동, 해룡면 중흥리, 해창리, 선학리까지 모두 다섯 동네에 걸쳐있으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일렁이는 모습도 장관이고 시시각각 햇빛따라 달라지는 색깔도 장관이다.
갈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물억새와 쑥부쟁이는 물론이고 하구의 갈대밭을 지나면 칠면초 군락도 만날 수 있다. 칠면초가 갯벌 위를 붉게 물들이는 것은 늦여름 이후라야 볼 수 있다니 아쉽다.
순천만습지는 흑두루미를 비롯해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희귀조류, 천연기념물 11종이 날아든다. 도요새나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기러기 등 140여 종의 새들도 순천만습지를 겨우내 보금자리로 삼아 지내며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
갈대숲 아래가 분주하다 싶더니 한 쪽 집게발이 유난히 큰 농게들이 갈대 사이를 오가느라 바쁘다. ‘농게와 짱뚱어는 습지 친구’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서있지만 짱뚱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순천만국가정원에서 갈대숲을 지나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용산 전망대를 만난다. 큰 나무 없는 습지니 땀이 배어나려던 찰나 오른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S자 형태의 수로는 둥글둥글한 식물군락과 함께 어울려 우리나라 사진작가들이 선정한 10대 낙조에 꼽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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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순천만의 모습 (자료제공=순천시청)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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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쓰레기가 쌓여있는 순천만 (자료제공=순천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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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시민들의 골재채취반대운동 (자료제공=순천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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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골재 채취로 사라질뻔한 순천만 (자료제공=순천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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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은 지키고 수익은 주민에게 환원
순천만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시민이나 행정 어느 한 쪽만의 역할로는 힘들었다. 지금이야 순천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교통요지이자 산업도시로 자리잡았지만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하천변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많았다. 농민들은 퇴적물이 쌓여 너른 하천변을 농지로 개간해 벼농사를 지었다. 개간했다 해도 일반 농지와는 토질이 달라 매년 갈대가 돋아났다. 당시만 해도 환경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농민들은 독성이 강한 제초제를 사용했다. 독한 농약은 갯벌생물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갯벌과 농경지에 축적된 농약의 독성은 서서히 인간의 삶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행정은 개간된 하천변 농경지에 농사를 못짓게 했다. 농민들은 불만이 커졌다. 몇 년동안 지어온 농사를 왜 못짓게 하냐며 행정을 원망했다.
순천만과 농경지가 연결되는 제방 안에는 잡종지가 있었다. 이 잡종지는 1980년대 제3차 간척 당시 농경지에서 흘러나온 물을 가두는 저류지였고,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순천만 하도정비 및 골재채취사업으로 나온 흙을 쌓아두던 곳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순천만 주변은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게다가 90년대 후반 들어서는 골재채취까지 시작되자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보존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개발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갈등도 있었다.
보존해야 한다는 쪽은 “동천 하류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지역으로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갈대 등으로 이뤄진 습지에는 생물종이 다양하며 어류의 산란지이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개발해야 한다는 쪽은 “홍수가 일어나면 갈대밭과 퇴적토사가 물의 역류를 도와 농경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고, 순천만의 갈대밭과 갯벌에 철새들이 찾는 것은 자연보호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주변 농작물에는 오히려 피해를 준다”는 주장을 내놨다.
대립하던 사람들은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생산성과 가치가 뛰어난 순천만의 환경을 지키되 이익은 주민들에게 환원하는 방법을 택했다. 어느 쪽도 피해볼 일 없고 환경은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 철새 지키려 국가 땅을 매입한 순천시
지금 순천문학관이 있는 곳의 건너편은 논이었다. 절강하단부인 이 지역은 경관도 아름답다. 그러나 문학관이 들어서면 개발이 시작될 상황이었다. 완공 전 공공시설로 전환해야 이 아름다운 경관을 지킬 수 있었다.
2009년까지 쓰레기처리장으로 방치됐던 잡종지를 물새습지로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순천시는 잡종지에 모래톱과 섬, 정수습지를 조성한 담수습지로 복원하기로 했다.
순천만은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들고 난다. 밀물 때는 바닷물 깊이가 2~3m다. 순천만을 찾는 물새들은 수심 20~30㎝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밀물로 육지가 덮여도 새들이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놓고 볼 때 문학관 완공 전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철새 쉼터 조성이 시작되자 민원도 종종 들어왔다. “멀쩡한 논을 새들 놀라고 놀이터를 만든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천시도 환경보전이 필요하다는 시민들도 한 번 개발된 곳은 원형으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고, 지금의 철새쉼터와 환경보전은 순천만과 순천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순천만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주변지역부터 잘 관리해야 한다”며 지치지 않고 설득했다.
순천만 주변은 사유지가 상당했다. 순천시는 사유지의 소유자를 찾아 보상했다. 철새를 지키기 위해 지자체가 국가의 땅을 매입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땅을 매입한 후 순천시는 국비를 지원받아 철새 쉼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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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 흑두루미 경관농업단지(자료제공=순천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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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이득보다 자연의 소중함을 택하다
2009년 4월. 순천만 포구 제4수문 옆 전봇대가 뽑혀나갔다. 당시 흑두루미를 비롯한 새들이 전깃줄에 걸려 다치거나 죽는 일이 많았다. 순천시는 순천만 농경지 인근의 전봇대를 철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전에서는 철거를 거부했다. 순천시는 방향을 틀었다. 전국 최초로 경관농업으로 이용한다며, 순천만 들판에 흑두루미 모양으로 흑벼를 심어 그림을 그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경관농업’에 어울리지 않는 전봇대를 자연스럽게 철거할 구실이 생겼다.
전봇대 철거를 위해 시는 세부조사를 진행했고 모두 282개의 전봇대와 1만2천m의 전깃줄을 제거했다. 철거행사를 환경부에 알렸다. 환경부 출입기자들도 순천만으로 취재를 나왔다. 사람이 불편해 전봇대를 제거하는 일은 있어도 철새 살리자고 전봇대를 철거하는 것은 세계 최초였다.
농민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는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고 농민들이 흑두루미 모양의 벼를 심어두면 주변 농업인들로 구성된 영농단이 관리했다. 전봇대를 뽑아낸 농경지는 ‘흑두루미 희망농업단지’가 됐다.
순천시정 순천만보전과 관계자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이 지역의 벼는 흑두루미들의 먹이가 되고 있다”면서 “흑두루미들이 먹고 남은 벼는 도정해 흑두루미쌀로 만들어 공방이나 인터넷 판매를 통해 수익금을 얻고 이 수익금은 다시 흑두루미 보전사업에 쓰인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자연과 사람의 공존이자 상생 아닌가.
순천만 뚝방 근처에는 원래 음식점이 있었다. 풍광이 좋으니 농경지와 갯벌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겨울이면 철새들의 군무를 볼 수 있으니 장사도 꽤 잘 되는 식당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수익과 순천만 환경, 철새를 두고 둘 중 하나는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음식점 측에서 철새를 위해 장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옛 음식점은 리모델링을 거쳐 철새탐조대가 됐다. 철새탐조대는 전문해설사가 동행해 1박2일 순천만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봄이면 산새와 물새를 탐조하고, 여름이면 논 생물을 관찰하고, 가을에는 갯벌 생물을 관찰하며 겨울에는 겨울철새를 탐조한다.
순천시청 순천만보전과 관계자는 “순천만이 지금처럼 자연생태를 보전하고 인정받으며 명성을 얻기까지는 행정이나 시민 어느 한 쪽만의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은 환경을 지키기 위해 사람에게 돌아올 경제적 이득을 포기했고, 행정은 지역의 미래를 내다보고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자연과 인간은 공존해야 한다. 아니, 공존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 순천의 사례에서 우리는 공존의 가치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