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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을 거슬러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우는 역사도시 고성 2.]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안동 병산서원, 도산서원
선비정신과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한국의 서원’
재도전 끝에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05월 20일
▣ 글 싣는 순서
① 역사와 문화의 가치, 세계문화유산도시 고성
②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③ 과거부터 미래까지 생태환경의 지속가능성, 한국의 갯벌
④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⑤ 천 년의 하늘이 들려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경주
⑥ 다시 피어나는 역사의 숨결, 백제역사유적지구
⑦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⑧ 살아있는 불교 정신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유산
⑨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잠들다, 조선왕릉
⑩ 조선의 정신을 깨우는 종묘와 종묘제례악
⑪ 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⑫ 춤에 담은 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처용무와 강강술래
⑬ 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 화성
⑭ 우연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⑮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 제주의 해녀문화와 칠머리당영등굿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며 지역민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양반들은 세력 구축을 위해 향촌 사회를 활용했다. 교육과 교화를 위한 기관이 필요했다. 그 구심점이 서원이 됐다.
조선시대 서원은 600개가 넘기도 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후 남은 서원은 47개에 불과했다. 이 중 북한에 있는 11개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후 남은 강원도 김화의 충렬서원, 철원의 포충사 등 2개소를 제외하고 현재 남아있는 서원은 34개다. 
이 중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안동 도산서원, 경북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북 안동 병산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 9개의 서원이 ‘한국의 서원’으로 2019년 연속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의 서원은 재수 끝에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서원은 당초 2016년 4월 국제기념물유적협의가 반려하면서 세계유산 등재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다양한 자문을 통해 논리를 보강하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 기술, 비교연구 보완, 연속유산으로서 논리 강화 등을 통해 결국 등재에 이르렀다.
등재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보편화된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자 성리학의 지역적 전파에 이바지했다는 점에 대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면서 “전체 유산과 각 구성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계획 등도 요건을 갖춘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 무너진 유학을 다시 세운 소수서원
↑↑ 영주 소수서원
ⓒ 고성신문

소백산 아래 서원이라 하니 고즈넉하고 조용할 줄 알았는데 웬 걸, 입구부터 차들이 줄줄이 들어가더니 주차장은 이미 만차다. 입장료 3천 원까지 준비했는데 ‘오늘은 무료’란다. 게다가 매표소에서부터 신나는 통기타와 노랫소리, 환호소리가 들린다. 상상했던 서원과 전혀 다른 분위기다.
“예 앉으시게. 그래, 무엇을 보고 느끼고 왔는가?”
TV 속 사극에서나 들었을 법한 말투가 들린다. 돌아보니 사모관대 차림의 한 양반이 뒷짐을 지고 관람객들을 맞이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처녀귀신이 자기 좀 구해 달라며 글자 한 자 쓰라고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난리법석이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이번에는 퇴계 이황이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며 서원을 설명한다.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에는 3년 만에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2022영주한국선비문화축제가 열리는 중이었다.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조선 명종으로부터 사액(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기 전 이름은 ‘백운동서원’이었다.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이 땅에 들여왔던 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백운동서원은 퇴계 이황의 건의로 1550년 명종이 손수 ‘소수서원’이라 쓴 현판을 내리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명종은 현판과 함께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노비도 함께 내렸다.
‘소수(紹修)’라는 이름은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나라가 인정했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에는 안향과 그의 후손으로 순흥 안씨의 대표적 학자인 안축, 안보 그리고 안향의 뜻을 기렸던 주세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학공간, 제향공간을 앞뒤로 배치하는 것이 흔한 서원들과 달리 소수서원은 동쪽에 강학공간,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했다. 정문인 ‘지도문’을 지나면 동쪽에는 유식공간인 ‘경렴정’이 있고, 강당인 ‘명륜당’은 동쪽을 향해 있다. 서쪽이 으뜸으로 취급되는 예를 따른 배치다.
원생들이 지내면 동재와 서재는 일신재, 직방재로 명륜당 북쪽에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또 그 동쪽에는 지락재와 학구재가 ㄱ자로 자리잡고 있다.
주세붕이 지은 역사서 ‘죽계자’에는 소수서원의 규칙인 원규가 실려있다. ‘제사를 경건히 모실 것’, ‘어진 이를 받들 것’, ‘사당을 잘 보수할 것’, ‘물자를 아껴 모을 것’, ‘서책을 점검할 것’ 등이 기록돼있다. 이 원규는 후에 건립된 다른 서원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전통과 현재가 함께 호흡하는 남계서원
↑↑ 함양 남계서원
ⓒ 고성신문

고성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남짓이면 닿는 함양 남계서원은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로 건립됐다.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며 지역사림이 뜻을 모아 1552년 세운 서원이다. 강익, 박승임, 정복현 등 함양 출신 유학자들이 주도해 지역 유림들이 쌀, 곡식을 부조해 건립됐다. 1566년 명종이 ‘남계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리면서 소수서원, 임고서원, 수양서원에 이어 네 번째 사액서원이 됐다.
16세기 후반, 남계서원은 의병활동의 거점이었다. 이에 왜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5년 서원을 불살랐지만 전쟁 후 함양의 사림들은 서원을 재건했다.
서원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자리해 신성한 구역임을 알린다. 정문인 풍영루의 좁은 나무계단을 오르면 정면 3칸(5.4m), 측면 2칸(3.6m)의 누각마루가 펼쳐진다.
강당인 명성당은 중용에서 그 이름을 따 참된 본성을 밝히는 교학 이념을 담았다. 강학공간 앞에는 수련이 뜬 작은 연못 두 개가, 명성당 좌우에는 기숙사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배치됐다. 묘한 것은 작은 건물 하나까지 성리학적 의미를 담은 이름이 붙어있는데 정여창을 모신 사당에는 이름이 없다. 이름조차 감히 붙일 수 없이 가치가 높다는 뜻일까.
사당 앞에는 사당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대야를 놓던 관세대, 밤에 관솔이나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힌 정료대가 있다.
남계서원은 성리학의 본거지라는 자긍심을 가진 곳이다. 이런 가치를 젊은 세대에도 알리기 위해 전문해설사 2명도 배치됐고, 다양한 교육체험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앞마당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눈앞의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 등 논어에 등장하는 사자성어 30여 개를 상세하게 풀이한 표지판도 곳곳에 설치해 산책 겸 서원을 찾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든다.
남계서원에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원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며 현대인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현장이 됐다.

# 가식없는 순수한 선비정신, 병산서원 
↑↑ 안동 병산서원
ⓒ 고성신문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제자이자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류성룡은 1575년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지금의 병산서원 자리로 옮겨와 제자들을 키웠다. 1607년 류성룡이 세상을 뜬 후 광해군 5년인 1613년 유림들은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병산서원은 이렇게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됐다. 이후 250여 년이 지난 1863년, 철종 14년에 이르러서야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병산서원 입구 첫 번째 문은 ‘예를 다시 갖춘다’는 뜻을 담은 복례문이다. ‘나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는 공자의 말에서 따왔다. 복례문 안에는 사대부들이 타던 사인교와 짐을 나르던 교자가 얹혀있다. 복례문을 지나면 두보의 시 ‘푸른 절벽은 마땅히 늦은 오후에 봐야 한다’에서 따온 만대루가 있고 그 왼쪽에는 ‘광영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전통 연못 형태인 ‘천원지방’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뜻이다.
만대루를 지나서 돌계단을 오르면 교실과 교무실 격인 입교당이 있고 그 사이로 강학이 펼쳐지던 대청이 있다. 그 맞은편에는 유생들이 머물던 동직재와 정허재, 그 아래에는 정료대가 있다.
입교당 옆 쪽문을 지나면 희한한 건축물 하나를 만난다. 동그란 달팽이 모양으로 담장이 있다. 도대체 그 정체가 뭔가 싶었더니 유생들의 일을 돕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뒷간’이란다. 지붕도 없는 뒷간이지만 달팽이처럼 담장이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밖에서는 일을 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병산서원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보수되기도 했다. 강당은 1921년, 사당은 1937년 다시 지어졌다.
병산서원은 볕이 쨍한 여름이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찾는다. 서원 곳곳에 붉게 흐드러지는 배롱나무가 장관이라고 한다. 배롱나무는 줄기의 껍데기가 매끈해 가식이 없다는 뜻이며 학자들이 그런 뜻을 받아 가식 없이 살겠다는 뜻으로 집주변에 많이 심는다. 그러니 서원이나 향교에서 배롱나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직 초여름도 되지 않은 시기라 아쉽게도 배롱나무가 보여주는 장관은 만나지 못했다.

# 학문과 공론의 장, 도산서원
↑↑ 안동 도산서원
ⓒ 고성신문
옛날 분홍색 천 원짜리 지폐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중 으뜸으로 꼽힌다.
1976년 안동댐이 준공되면서 서원 주변 풍광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도산서원은 퍽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원 앞 너른 마당에는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서원도 서원이지만 앞마당의 두 그루의 왕버들은 수묵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마냥 죽죽 뻗어가는 수형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도산서원의 5월은 작약이 수놓는다. 돌계단 사이사이에는 짙은 분홍빛의 작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이 그 시작이다. 퇴계가 세상을 뜬 뒤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며 도산서원을 세웠다. 제자들은 색칠, 장식이 없이 수수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그대로 두고 광명실, 전교당, 상덕사를 지었다. 이듬해인 1575년 선조가 현판을 내리면서 사액서원이 됐다.
퇴계가 세상을 뜬 후 선조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 1610년에는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과 함께 문묘에 모셔졌다.
전교당 처마에 걸린 도산서원 사액 현판은 명필 한석봉이 썼다. 전교당 앞에는 기숙사 박약재와 홍의재가 마주보고, 그 위에는 퇴계와 그의 제자 조목을 모신 상덕사가 있다.
도산서원은 교육기관으로 유생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출판사 구실도 했다. 서고인 광명실에는 모두 907종 4천338권이 보관돼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공론을 만인소에 적어 중앙에 알리기도 했다. 이런 공론은 나라에서도 받아들였으니 이는 곧 도산서원의 대표성, 상징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정조는 퇴계 이황의 업적을 기리며 관료를 시켜 향사 제물과 제문을 보내는 치제를 했다. 과거도 열었다고 한다. 1792년 퇴계의 학덕을 기린 과거시험 ‘도산별과’를 신설해 지역 인재를 선발한 것을 기념하며 앞서 이야기한 시사단을 만들었다. 응시자가 워낙 많아 서원에서 과거를 치르지 못하자 강가에서 과거시험을 치른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도산서원 안 곳곳에 걸린 도산서당, 암서헌, 완락재, 농운정사, 시습재, 관란헌 같은 건물이나 마루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이름짓고 친필로 글씨를 새겼다. 이를 두고 우암 송시열은 “따뜻하고 편안하며 화목한 의중이 필묵에 드러나 있다. 옛사람들의 덕성을 어떻게 언행과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라 하기도 했다.
한국의 서원들은 시대의 흐름에도 건물은 그대로지만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대인들에 맞는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변화도 맞고 있다. 선비문화의 정수인 서원은 학문의 공간이자 자연과 건축미가 어울린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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