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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평생을 주걱과 국자를 들 몫이 현생의 운명이라면, 전생에 나는 왕이었을까? 天下珍味로 차린 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받아 입맛만 다시고 그대로 내 치던...

전희순(66세. 동해면 거주)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12월 10일
ⓒ 고성신문
영감이 밭에 가더니 자잘한 배추와 시금치를 한 당새이 걷어왔다. 낫으로 벴는지 뿌리가 뭉턱하게 붙어있거나 이파리를 날린 포기도 몇 보인다. 잠시 빈 시간을 이용하여 시금치를 가린다. 진잎이 노오랗게 물들었고 뿌리는 연분홍으로 이삐다. ‘가을이 깊었으니 시금치 이파리도 물이 든 게지’ 혼잣말을 하다가 씨익 웃는다.
아까 오신 손님이 두고 가신 물건이 있다. 화사하고 알록달록한 무늬의 실크 스카프다. 흘리고 가셨으니 곧 찾아가겠지만, 손으로 한번 만져본다. 나긋나긋, 보들보들하다. 이런 것을 목에 두르고 나가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내 손은 야들야들한 천조각보다 푸릇푸릇한 촉감이 살아 숨쉬는 배추며 시금치와 더 친하다. 밭에서 갓 솎아온 푸성귀들을 보면 그 속에 담긴 생명음이 느껴진다.
해풍을 맞으며 낮게 엎드려 자란 시금치 포기에는 마그네슘과 칼슘, 인과 철이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영양학적인 것은 접어 두고라도 달달하면서도 아삭하게 씹히는 시금치는 고향의 맛이며 부모의 맛이다.
뿌리까지 다듬은 시금치를 뜨거운 물에 알맞게 데쳐서, 간장과 다진마늘, 참기름 한 방울에 깨소금만 치면 맛난 나물이 된다. 식탁을 푸르게 장식하는 효과까지 있으니, 내가 애정하는 반찬이기도 하다.

ⓒ 고성신문
오늘은 모처럼 특별 반찬을 만들었다.
모재기(모자반)과 콩나물을 섞은 설침이다. 갈색의 모재기는 어릴 적에 많이 뜯던 해조류다. 바윗돌에 너풀내던 모재기는 길고 숱이 많았다. 대나무 소쿠리 가득 모재기를 걷어 이고 오면, 소쿠리 사이로 물이 빠져서 목깃부터 시작하여 옷이 다 젖어도 좋았다.
윗목에서 사구에 담겨 검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날마다 손가락 한 마디씩 자라는 콩나물과 궁합이 맞으니 한 동안 반찬 걱정을 덜어도 될만큼 요긴한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소금을 한 숟갈 넣어 펄펄 끓인 물에 모재기를 넣어 금방 건져내면 파아라니 초록이 고왔다. 미리 데쳐낸 콩나물과 반반씩 넣고 액젓과 다진마늘과 깨소금만으로 뽀작뽀작 손맛을 더하면 상큼하니 맛났다. 단순하고 명쾌한 그 맛, 콩나물의 아삭함과 모재기에 동글동글 달린 포자가 씹히는 맛은 그대로 바다의 맛이었다.
옛날에 며느리가 ‘야무치’ 인지 ‘데데바리’인지 구별하려면 모재기 씻겨보면 안다고 했던가? 모재기에서 나오는 부스르기들을 얼마나 잘 헹궈서 깨끗하게 간수하는지를 보면 된다 했던가?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의자를 빼는 소리 탁자에 손 짚는 소리 우당탕탕 야단이다.
밤 새워 비운 속을 달래줄 국물을 기다리거나, 어젯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술꾼들은 눈이 퀭하다. 얼른 차림상을 내기를 기다리면서 연신 부엌쪽을 훔쳐보고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음식 장만을 했는데도 매번 바쁘다.
두어 판 깨트려 실파를 송송 썰어넣고 다진 당근으로 버무린 계란물은 후라이팬서 나직나직 익어간다. 뜨겁게 불을 올리지 않고 중간불에서 천천히 익혀야 달걀말이가 실패하지 않는다. 별 거 아닌거 같아도, 오랜 숙달에도 불구하고, 매번 신경 쓰지 않으면 태우거나 터지기 마련이다.
콩자반은 졸임솥을 자글자글 두드리고 있다. 검정콩이 몸에 좋다하니 매번 빠트리지 않는 메뉴다.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랐기에 콩자반이 없는 밥상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말이 더 맞을랑가?
된장국에 넣을 게는 꼼지락꼼지락거리고 있다. 돌게나 앙살게는 잘 못 다루면 집게를 벌려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하긴, 저들도 곧 된장국에 들어가 빠알갛게 몸색깔을 변화시켜 밥상에 오를걸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랴.
저들에게도 식솔들이 있었겠지. 그 가족들을 바다에 두고 어부의 손길에 딸려왔으니 후회막급할 삶이다. 그러니 어쩌랴? 맛난 식재료를 넣은 밥을 먹고 사람은 그 에너지로 일을 하고 그들의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밥솥은 뜸 들인다고 따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세상에 뜸 들일 때 나는 밥 냄새만큼 꼬솜하고 달달하고 맛난 맛이 어디 있으랴. 평생을 솥두껑 운전을 하며 수십만 번의 밥솥을 열었지만 열 때마다 매번 코를 킁킁이고 눈을 찡긋하게 되는 것이 솥에서 나는 밥내음이다.

손님이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유난히 바쁜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 날이다.
오후 네 시쯤에 문을 닫았다. 오늘 만든 반찬이 모두 동이 났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배 고픈 누가 문을 두드리면, 두어가지 반찬이 떨어져도 밥상을 차려내야 한다. 배고픈 이들은 따순 밥 한 그릇, 뜨거운 국 한 그릇이면 마음이 넉넉해질테니. 배고픈 사람에게 밥상을 차려 드리는 일은 내 평생의 과업이다. 내게 주어진 몫이다. 아니 운명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왜 평생을 주걱과 국자를 들고 남의 밥상을 차려주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전생에 왕비였을지도 모르겠다.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전국의 유명 특산품으로 요리만을 연구하고 만들어온 기미상궁들이 올린 최고의 음식들을 한 두 수저 뜨고 물리쳐야 했던 왕궁의 주인이 아니었을까? 온갖 정성과 손맛을 발휘한 수많은 음식들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물리쳤으며, 매번 다른 상차림을 맛보기까지, 그 상을 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길과 노력을 감내했을까?
그리하여 현생의 나는 그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이토록 많은 밥상을 차려, 전생의 죄를 닦는 것은 아닐까?

ⓒ 고성신문
나는 장기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에는 누구네 집에도 대여섯의 자식들이 있었고 가난하고 배고픈 나날이었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밭둑에 나가 풀을 한 삼태기 베어 놓는 일은 다반사고, 학교 갔다와서 책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까꾸리(갈퀴)를 들고 뒷산을 올라야 했다. 식구들 밥을 지어야 하고 소죽을 끓여야 하고 군불을 지펴야 했으니 늘 나무가 모자랐다. 부모님들은 논과 밭으로 나가셔야 하니, 자잘한 일들은 모두 아이들의 몫이었다.
언니가 버지기에 보리쌀을 들고가서 손가락이 닳도록 문지르는 동안, 나는 걸레를 두드리거나 양말을 빨았다. 언니가 물동이에 물을 이고 오는 동안, 나는 머리에 얹은 버지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똬리꼬리를 이가 아프게 물었다.
마당을 쓸고, 돼지에게 먹일 뜨물을 얻어오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학교에는 가는둥 마는둥 하다가 졸업을 했다. 동해초등학교 37회가 내 학벌이다.
사는 형편이 나은 친구들은 동중학교나 고성여중으로 유학을 갔다. 부러웠지만 부모님께 나도 유학을 가겠다고 떼를 쓸 형편은 아니었다.
19살에 검포 사는 총각한테 시집을 왔다.
“너무 집 머슴도 살아봤다카이 니 밥은 안 굶길끼다.”
부모님의 지엄하신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집은 더 가난했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신랑은 부지런했지만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장기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 마산의 한일합섬이나 자유수출에 취직하여 돈 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이 들썩이고 마음에 바람이 차올랐다. 명절에 고향에서 만난 친구가 들쑤셨다.
“순아, 기차 다리 밑에 방 얻어놨다. 돈 3천원만 갖고 온나. 항꾸네 취직하여 돈 벌자.”
내 마음이 마산에 가 있는데, 덜컥 아이가 생겼다. 내 나이 스무 두살, 첫딸 경아를 낳았다. 딸이 생겨도 콩밭에 간 내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을 졸랐다. 마산에 가서 돈 벌어 올테니 돈 3천 원만 구해 달라고 떼를 썼다.
“경아옴마야, 1년 안에 집 사께. 만일 약속 못 지키모 내가 약을 무끼다. 그라모 니는 경아 큰 집에 맡기고 도망가삐라. 여객선이 돈막과 좌부천에 닿는다. 그 배 타면 가고 싶은데 오데라도 갈끼다. 그러이 제발 1년만 내 믿고 지둘리라.”
남편은 미친 듯이 일했다.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고, 논밭을 가꾸었고, 남의 일을 거들었다. 상머슴처럼 일하고 또 일했다. 나도 거들었다. 1년 만에 200만 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작은 집을 샀다. 100만 원을 빌리면 60만 원을 이자로 줘야 하던 시절이었다.
집을 샀으니 남편을 거역할 이유가 없어졌다. 마산으로 돈 벌러 가는 꿈은 영원히 접었다.
‘그래, 내 살 곳은 여기 동해면 검포다. 이 곳에 뼈를 묻어야지.’
소죽을 끓이고, 송아지를 빼고, 염소와 개를 키워 팔고, 뼈빠지게 일하여, 딸 경아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초등학교 앞에 두 번째 집을 샀다. 조금 더 넓은 땅에, 조금 더 큰 집이었다.
거기에 문방구를 차렸다. 아이들이 와글와글 하던 시절이었고 장사가 잘 되었다.
어느 날, 초등학교 선생님이 라면을 끓여달라고 하셨다. 김치를 곁들어 내 드렸더니 맛있다며 하숙을 하겠다는 청이 왔다. 시작했더니 중학교 선생님이 또 찾아오셨다. 그렇게 하숙생이 늘어나면서 나는 밥집 아지매가 되었다.
선생님 반찬을 함부로 낼 수 없었다. 나는 날마다 공부하는 자세로 갖가지 반찬을 만들며 연습을 했다. 한 가지 재료로도 무쳤다가 쪘다가 볶았다가 탕을 만들었다가 수십번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반찬을 자꾸 만들어 나갔다.

그 시절, 나는 한달에 열흘은 가게나 식당에서 잤다.
졸임은 진득하게 오래오래 졸여야 맛이 났다. 김치는 간하고 씻고 물을 빼고 양념을 만들고 치대기까지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몇 가지 반찬을 만들고 가게를 정리하느라 시간은 쏜살같이 나를 앞질러 갔던 것이다.
돈을 모아 논을 사고 밭을 사고 산을 샀다. 가난에 한이 맺혀, 돈이 모이는대로 인근에 나온 땅들을 샀다. 돈이란게 그렇다. 버는 것 보다 안 쓰면 모이기 마련이다. 가게를 하고 하숙을 치느라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앞으로 살면서 내 새끼들은 남한테 괭이 한 자루 안 빌리러 가게 해 놓을끼다.”
어릴 때 이웃에 괭이 빌리러 갔던 애환이, 그 슬픔이, 그 안타까움이 얼마나 깊었을까?
“우리 둘다 못 배웠으니 우짜끼고, 자식들 대학 문턱 디디모 소원이 없다 아이가. 자슥들이 못 배우모 이 담에 도시가서 살 때 전세계약서라도 못 쓰모 우짜노?”
남편의 악착같음에 기대어 남매는 대학도 갔고 취직도 했고 잘 살고 있다.
“살다보모 평지 올끼다. 참는 기 이기는기다.”
신혼때 너무 힘들어 친정으로 돌아간 날, 나를 앞에 앉혀놓고 내 아부지가 해 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누군들 가난과 어려움을 모르고 살던가? 기와집 지붕 밑에도 물 새는 처마가 있고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는 것을.

ⓒ 고성신문
우리 가게는 손님으로 북적댄다. 시골 밥상 그대로의 맛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 밥 한 상을 놓고 열심히 먹고 간다.
“제 어릴 때 받았던 밥상 그대로입니다. 유년의 추부모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
“이 가게 사장님 손은 인간문화재 손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지 손을 보면 압니다.”

곧 김장을 해야 한다. 고무장갑을 껴 본 일이 없는 남편은 맨 손으로 배추를 뽑고, 소금을 쳐서 간을 하고, 배추를 씻고, 양념을 만들 것이다. 그 맨손에서 우러나는 고향의 맛, 부모의 맛, 가난과 성실의 맛, 기다림과 감사의 맛까지 모두 넣어서 김장을 담글 것이다.
굳은 살 투성이인 인간 문화재의 손으로.
세상에 밥 보시(布施)만큼 큰 은혜가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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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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