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마사의 삶, 크고 따스한 등불을 환히 밝혀주고 싶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충만한 그대들과!
윤태호(65년생, 고성읍)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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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마센터 컴퓨터 앞에 앉은 윤태호 씨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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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내가 글을 쓸 때 삼는 가치이자 좌우명이다. 내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 내 마음에 따스한 등불 하나를 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의 삶을 기록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란 지인의 전화를 받고 ‘윤태호’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따끈따끈한 등불이 저절로 켜졌다. 두배나 밝은 등불이.
여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다. 남들은 눈으로 온 세상을 휘이휘이 둘러볼 때 그는 마음으로, 손끝으로, 감각으로, 말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직업은 안마사다. 고성읍내 새시장 근처 2층에 사무실겸 안마소를 마련하여 ‘한국 안마센터’를 운영 중이다. 그와 같이 일하는 안마사는 그를 포함하여 4명, 부부 맹인과 남성맹인 한 분이 함께 일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곱슬머리에 웃음이 선한 그가 환히 반겨준다. 눈이 마주쳤다. 쌍거풀진 두 분이 허공을 바라보듯 열려 있다. 그렇지 ‘눈 뜬 장님’도 계시다지. 내 속의 편견이 요동치듯 움직인다.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는가? ‘맹인의 두 눈은 감겨있어 평생 뜨이지 않을 것이고, 맹인은 활짝 웃는 웃음보다 미소에 익숙할 것이고, 활기찬 걸음보다 조심스런 행동을 하며, 손이 그 누구보다 소중할 것이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가 가졌던 편견이 여럿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와 편안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65년 뱀띠다. 지금까지의 내 인터뷰이 중에 가장 젊다. 60세 이하의 사람은 인터뷰 하지 않을 거란 각오가 있었는데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내 각오는 길을 잃었다. 그를 소개한 지인에게 나이를 묻지 않은 내 불찰도 있었지만 맹인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를 얻기에 쉽지 않을 것이며, 왠지 그는 태어난 시기보다 10년, 아니 20년 이상의 시간을 더 살아온 사람처럼 세월을 곰삭인 나이테를 속에 지닌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성군 하일면에서 태어나 5살까지 살았다. 형과 누나, 그리고 막내로 태어난 그는 조용하고 나직한 아이였다. 5살까지 자란 하일면에서의 기억은 별로 없다. 부친은 잡화상을 하셨고 모친은 조부모님을 공양하며 살았단 말씀을 후일 들었고, 명절에 가끔 태어난 고향에 내려가곤 했지만 그 곳에서의 특별한 추억은 소멸된 듯 하다.
친척 한 분이 부친의 직업을 알선해 주셔서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다. 시골아이의 서울살이는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하나씩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사투리와 표준어와의 충돌이 있고,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친구를 사귀기 쉽지 않고, 외톨이로 살면서 책을 가까이 하게 되고, 나중에는 활자중독의 수준까지 가게 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여 눈을 자주 비볐다. 시력이 나빠서 그런가 하고 안경도 맞췄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 ‘시신경 위축 안구당질’이란 병명을 받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주머니에 쥐약을 넣어 다니며 언제든지 세상에서 튕겨져 나갈지를 예비했다. 장애라는 의미도 몰랐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갈지 방법이 없었고 모든 것이 캄캄했다. 천길 단애, 그 절벽 위에 맨 몸으로 서 있는 추위와 두려움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오진이길 바라며, 그 병명을 받아들이지 못해 전국의 좋다는 의원을 찾아다니며 울부짖었다. 그 때, 냉정하게 사실을 알려주는 의사가 있었다. 심장이 차가운 사람, 뱀처럼 푸른 피를 가졌을 거라고들 생각하겠지만 명확한 진실을 듣고나면 오히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쉽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병원을 다녀도 병명은 이미 정해졌으니 받아들이라.’ 돈 버리고 시간 낭비하고 자신의 감정만 소비되는 짓을 그만하기로 마음 먹었다. 언제든지 절벽 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주머니의 쥐약이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 그 약을 삼키기만 하면 병도 절망도 모두 이별하게 되니까. 그 의사가 덧붙인 말도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 잠자고 일어나 눈을 뜰 때, 온 세상이 캄캄한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을 예비하고 살아야 한다.’ 이 말은, 그 언젠가까지는 완전한 어둠에 침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주 흐릿하게 형체만이라도 어렴풋이 볼 수 있다는 셈이다. 아직까지는 전맹(완전한 맹인)이 아닌 것이다.
스무 살, 맹인학교에 입학하여 점자를 배웠다. 그 동안 부친의 사업이 망했기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도 일하고 총포사에서 총에 에어를 넣고 닦아주고 관리하는 알바도 하며 돈을 벌었다. 스무일곱 살 되던 해, 고성읍내에 정착했다. 이십 여년을 객지를 떠돌며 몹쓸 병만 얻어 귀향한 셈이다. 읍내에서 잡화상을 열었다. 어릴 때 부친이 하시던 모습을 떠 올리며 그 시절 눈에 익었던 물건들로 가게를 채웠다. 벌이가 신통치 않아 삼성화재에 입사하여 보험 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나름 사회성이 있어서 사람들과 친해졌고 진심이 통했는지 보험일에 재미를 붙여가던 중, 手記로 작성하던 모든 계약서를 컴퓨터 작업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컴퓨터에 음성지원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컴퓨터를 못 다루니까 보험 일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친구의 휴대폰 가게에도 나가고, 수많은 직업을 거치는 동안 시각장애인의 설움이 알알이 날아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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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일하는 식구들과 오순도순 정겨운 시간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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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안마 학교에 가서 안마를 배워라. 그 일로 밥은 먹고 살 거다.” 선배가 툭 던진 말이 가슴에 박혔지만, 그 말을 들은지 3년 동안 농땡이를 쳤다. 시각 장애인의 안마가 쾌락과 욕망의 충족에 관한 부분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조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비장애인의 편견은 오죽했으랴~ 며 웃음을 베어무는 그의 눈매가 선연하다. 드뎌 선배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국의 맹인학교 중 침술을 잘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대전 맹인학교’에 입학했다. 열심히 배우고 실습했다. 자신의 온 몸에 침을 꽂고 또 꽂았다. 보이지 않으니 모든 것을 손에 의지해야 하므로 감각을 익히려 손에 눈을 달았다. 시각장애인은 법에 의해 3호침 이하의 침술을 시술할 수 있다. 그가 다루는 것은 안마다. 안마는 경락+맛사지+지압을 통칭하는 말이다. 또한 안마 속에는 활법과 교정이 있는데, 그것까지 설명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단다. 이번에 그의 설명은 경락과 경혈이 주를 이루었다. 사람의 몸은 소우주라고 칭하는데, 각기의 장기와 근육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를 핏줄이 통한다. 그의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단다. 경락은 나뭇가지나 역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그 마디에서 잎이 돋고, 기차가 어딘가로 진행하는 것처럼 또 다른 시작의 곳이라고. 그 나뭇가지마다 싱싱한 잎이 자라고, 떠나는 기차가 막힘없이 제 자리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경혈이 중요하다고. 혈 자리를 기둥과 선로에 비유하는 그의 말이 청산유수다. 가끔 더듬거리며 우물쭈물하는 것조차 그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경락을 받으면 사계를 맛볼 수 있단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시원한 소나기가 퍼붓는 여름날의 활기를, 서늘하지만 상쾌한 가을의 단풍물을, 꽁꽁 언 얼음 위를 걷는 조심스러움까지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경락의 진정한 맛이란다. 그의 말을 들으니 경락을 받아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다. 나는 용기를 내어 요 위에 누웠다. 부부 맹인인 여성안마사가 조용히 내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먼저 왼쪽을 보게 모로 눕히고는 정수리부터 지압을 시작했다. 손가락이 꾹꾹 눌러지는 곳이 혈자리인가 보다. 여성 안마사의 손가락 힘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귀 뒤를, 목을, 어깨를, 팔을 거쳐 손가락 마디마디를 훑었다. 관절이 빠지는 소리가 두둑거리고 못 견디게 아파서 비명이 저절로 나오는 부위도 있었다.
평소에 컴퓨터 작업을 장시간 하는 특성으로 어깨가 안 좋았고, 좌골신경통 증세가 나타났다. 어깨와 좌골이 연결되는 지점을 안마할 때 통증이 지독했고, 아픈 부위가 안 좋은 곳이란다. 누구에게나 있는 직업병이 나에게도 있었다. 평소의 습관이 앉을때 짝다리를 자주 하는 편이었고, 팔을 많이 사용하는 일을 평생 해 온 탓이다. 1시간 동안 안마를 받았다. 사람의 기운이 폐에서 시작하여 한 바퀴 도는데 30분이 걸리고, 그걸 좌우로 나누어 2바퀴 도는 시간으로 계산하여 1시간 동안 만져주는 것이 좋단다. 곁들여 내 몸 중 상태가 안 좋은 곳으로 판명되는 좌골신경 쪽에 침을 몇 대 맞았다. 나는 안마를 받으며, 침술을 받으며 그가 말한 四季를 느끼려고 온 몸의 감각을 열었다.
머리를 지압할 때 봄이었고, 좌골을 만질 때 겨울이었다. 어깨와 등을 누를 땐 여름이었고 손바닥을 안마할 때는 가을이었다. 그랬다. 아직 내 몸의 감각은 살아있었고 예민하게 반응했고 사계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여름과 겨울을 느끼는 부분은 관찰하고 다스릴 필요가 있는. 1시간의 안마에 5만원을 지불했다. 5만원이란 금액으로 따지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사계 속에서 내 몸의 핏줄을 쓰다듬고 다스린다는 입장에서 보면 과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안마를 계속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느낀 사계의 변화가 상쾌하고 유익했다.
그에게도 화가의 꿈을 지닌 어린 시절이 있었다. 크레파스가 그려내는 색색의 그림에 코를 박았고 물감을 파레트에 짜 내며 즐거워했다. 중3과 고1까지 미술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동양화의 평화롭고 단아한 정경이 좋아서 전공은 동양화를 하겠다며 꿈 꾸던 나날이 있었다. 눈이 나빠진 뒤에는 ‘심령과학자’를 꿈꾸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 대신 국제대학교(야간)에서 사회복지사를 공부하여 2급 자격증을 땄다. 안마와 사회복지를 연결하여 자신의 할 일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인 그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장애인을 위한 택시를 이용할 수 있었고, 주위의 많은 분들이 그가 열공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인 그도 기쁘고 행복할 때와 괴롭고 힘들 때가 있다. 아픈 누군가를 안마해 줄 때, 그의 안마를 받은 사람이 개운함과 통증 완화를 느낄 때 보람을 찾는단다. 병원에서 오랜 기간 도수치료를 받던 노인이, 그의 안마와 침술을 받고 몸이 가뿐해져서 또다시 찾아올 때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한다. 오랜 지병으로, 노인성 질환으로,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진 분들이 그의 사무실에 와서 안마를 받았으면 좋겠단다. 요즘은 지자체마다 만 60살 이상이 되면 ‘바우처’ 신청을 할 수 있다. 매년 2월~3월 경, 관청에 신청하여 심사를 통과하면 바우처 대상이 되는데, 이 바우처 대상자는 월 4회 정도를 몇 천원으로 안마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요즈음 그도 코로나 여파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 바우처 대상자들이 찾아와서 안마를 받아야 센터를 운영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손님이 없고 소득이 줄어들어 4명의 시각장애인들의 생계가 걱정이란다. 아휴~~ 그놈의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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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암면 천사의 집 영보작업장에서 장작 봉사 하는 어울림 회원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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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이웃한 사람들과 ‘어울림’이란 단체로 활동하며 코로나 이전에는 매월 2회, 회원들과 여러 곳을 돌며 봉사를 했었다. 사물놀이팀과 안마팀이 함께 움직이며 즐거움과 개운함을 선사하는데 인기가 좋았다고. 회원 중에는 간판, 화원, 컴퓨터, 안마, 사물놀이 등 각기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며 나눔을 실천했다고. 천사의 집 장애우들과 갈모봉을 등산하고 장작을 들여다 놓은 기억이 새롭다. 내 땀 방울방울이 상대에게 기쁨의 씨앗이 될 때 자신의 삶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행복하다는 그의 말이 한껏 높인 보일러의 온도보다 더 따뜻하게 이웃에게 전해지리라. 다음 생에도 다시 이 길을 걷겠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共感)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픔을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공감의 마음을 자꾸자꾸 키우면 공유까지 갈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저 같은 사람과 살아 주겠냐? 내가 누군가를 고생 시키기만 하겠지?’
아직도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괜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하면서도, 그를 인터뷰 하러 오면서 켜 둔 등불을 기억한다. 다른 때보다 더 따끈따끈한 등불에 심지를 돋궈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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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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