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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잃어버리기 전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9월 17일
ⓒ 고성신문
대학에 다닐 때, 산간벽지의 노인들을 찾아 잊혀 가는 지명을 조사하러 다닌 적이 있다. 일본 강점기에 한자어로 바뀐 지명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였다. 다행
스럽게도 나이 드신 많은 분이 예부터 전해오던 마을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어 한자식 지명과 비교 분석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부 학생의 학문 활동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우리 것을 찾아 복원시키겠다는 의식마저 부족하여 큰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예부터 전해오던 우리말 지명이 한자어로 훼손되고 변질한 것이 안타까웠지만, 복원을 꿈꾸는 일은 행정력을 가지지 못한 학도에게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문제는 일본 강점기 때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중의 의식이 깨어있는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2014년부터 전면적으로 시행된 ‘도로명주소법’이다. 이 무지한 법은 행정 편의주의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 산과 하천을 비롯한 특정한 지형지물을 경계로 수천 년 이어져 온 마을 체계를 무시하고, 도로를 경계로 하는 서양식 기준에 맞추어 마을 이름을 개편해 버렸다. 물론 편리한 점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지명으로 생긴 혼란과 더불어 오랜 세월 불리던 마을 이름이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전에는 동네 이름만 들어도 어디쯤인지, 그리고 어떤 유래와 특성을 가진 마을인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고성이 ‘성(城)’으로 둘러싸인 도읍지라는 것은 ‘성내리’라는 이름에서, ‘동외리’와 ‘서외리’는 마을의 위치를, ‘수남리’는 위치와 물가 옆의 동네라는 특성을, ‘무학리’는 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도로명으로 바뀐 지금은 그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입법의 목적인 길 찾기의 편리성을 고려한 작명도 아닌 것 같다. ‘남산로’라고 반드시 남산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공룡로’는 어디쯤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중앙로’는 어떤가? 고성의 가장 중심에 있는 길인 것 같은데,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지금의 도로명이 굳어질 때면 고성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고성의 지명 역시,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원형을 잃어버렸다. 고유어로 불리던 지명이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로 바뀌거나, 마땅한 글자가 없으면 유사한 의미를 가진 한자로 대체했다. 그런 과정에서 지명에 스며있던 조상님들의 정신이 달아나 버렸다. 거기에 도로명 주소로 다시 한번 지명을 난도질했다. 그뿐만 아니다. 일본 강점기 때야 나라를 빼앗긴 힘 없는 국가였다고 백번 이해를 하고, ‘도로명주소법’은 국가적인 사업이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우리말 훼손은 무엇이라고 변명을 할까?
고성읍 죽계리 인근과 하천을 사람들은 ‘밤내’라고 부른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주민들이 모여 달집을 태우던 곳이라 나이 든 사람으로 밤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밤내를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은 ‘밤내다리’이다. 다리가 생길 때부터 그렇게 불렀고, 지금도 대부분 사람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다리 이름이 ‘고성교’로 바뀌었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을 건너는 것이 다리의 역할이니 밤내다리든 고성교든 이름이 뭐 중요하냐고 할지는 모르지만, 밤내다리가 가지는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생각하면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다.
우선 ‘고성교’라는 이름은 정체성이 없다.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기관이나 시설이다. 그런데 고성교는 고성을 대표하는 다리가 아니다. 혹시 ‘고성천’에 있는 다리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변명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성천은 천왕산 발원지에서부터 무량리를 거쳐 당항만 입구까지 이르는 하천을 말한다.
‘고성천’이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당항포 해전 때문이다. 당시 ‘소소강’이라고 불리며, ‘난중일기’와 ‘당포 승첩 장계’ 등에 하천명이 등장한다. 이후 ‘소소강’이 ‘고성천’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명칭과 지류와의 구분에 오류가 생겼다. 남아 있는 자료와 지명을 근거로 추정하여 본다면, 지금은 ‘두호’라고 불리는 ‘소소포’를 중심으로 용산천과 율대천이 합류되는 고성 아우라지부터 당항만 입구까지가 ‘소소강’이었고, 고성 아우라지 위쪽에 ‘밤내’라는 하천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지류와 강을 구분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명칭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밤내’라는 하천이 실종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면 다리 이름 역시 ‘고성교’가 아닌 ‘밤내다리’가 옳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짚을 것은, ‘밤내다리’가 없으면 ‘밤내’라는 하천과 지명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밤내라는 지명의 유래는 하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 큰물이 지면 밤이 많이 떠내려온 데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하천 주변에 밤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하천 주변이 주거지와 농경지로 바뀌면서 밤나무를 베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율촌(栗村)’으로 불리던 대평리의 지명에서 밤과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죽계리의 ‘죽동’을 지금도 사람들은 ‘밤내’라고 부르고 있다. 천왕산 지류에 대평천이 더하여 암전천과 합류되는 두물머리에서부터는 수량이 적은 것도 아니었음에도 밤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추측을 가능한 것은 밤내라는 지명에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밤내’라는 말이 없어진다는 것은 조상님이 남긴 이야기 한 편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밤내다리’뿐만 아니다. 고성은 역사가 오랜 도시인 만큼 옛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한자어로 바뀌거나 일부 변형되었더라도 아직도 지명의 유래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많다. 그러나 그분들마저 돌아가시면 조상님들과의 대화는 영원히 단절되게 마련이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지명을 연구하고 복원을 꾀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활동은 미미하다. 거기에 보태어 행정에서는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심지어 행정 편의주의로 인해 남은 것마저 변형되거나, 새로 만들진 시설이나 거리에 국적을 알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주변에 잊혀 가는 이름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은 문화와 역사를 잃는 것이다. 이번 명절에는 부모님이나 이웃 어른들에게 내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면 어떨까? 태어나고 자란 곳에 숨어 있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애향심이 절로 생기지 않을까? 더 잃어버리기 전에 조상님의 정신이 담긴 우리 지명 찾기와 마을 이름 복원 사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문화단체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적 지원과 협력은 필수 조건 중의 하나이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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