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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정이 있는 살기 좋은 수외마을 표지판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이 가득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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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세 어느 늦여름
- 새벽 5시 눈을 떴다. 준비운동 겸 몸풀기 체조를 하고 테니스장을 향해 기분 좋게 나선다. 두 시간 동안 공을 치고, 수영장에 딸린 목욕탕에서 땀을 씻는다. 구월이 되었으니 햇살은 한결 유순해졌다. 한여름 동안 따글따글 볶아치던 기운도 한 김 빠진듯하다. 그토록 세차게 몰아왔으니 이젠 지치기도 할 테지. 바람도 햇살의 꼬리를 잡고 제법 서늘한 입김을 불어 넣는 중이다. 무더위의 기승에 맥을 못 추었지만 이젠 제 자리를 찾아 산들대며 가치를 붙여야지. 길에서 만난 친구와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만다꼬 그 야단이고? 고마 편하게 뒷짐이나 지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면 될 꺼 아이가?” “누죽걸사(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란 말을 모르는가? 방바닥에 등 붙이고 느릿느릿 기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 아인가베? 내는 그리 몬한다.” “그라모 우짤낀데?” “일찍 잠 깨어 운동하고, 깨끗이 씻고, 일하면서 보람있게 살아야지.” “오데 그리 오라는 데가 많더노?” “이 사람아, 정신 빠짝 차리고 살믄 갈데가 천지삐까리 아이더나?” “갈 데 많아서 좋겠네. 그래도 너무 바삐 걷지는 마시게. 돌부리에 걸리면 크게 다치네.” “하모하모, 내 스스로 마치맞게 하고 있으이 염려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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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더니 식물들이 나를 닮아간다며 아내가 흉을 본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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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7시 생수를 한 잔 마시고 마당에 나선다. 처서 지난 잎새들이 기운을 잃고 있지만 배롱나무는 아직도 꽃을 피우고 맥문동 보랏빛이 곱다. 돌삐 사이에 뾰족한 송엽국은 일년 내내 꽃을 피운다. 한결같이 푸르른 소나무는 말해 무엇하리. 비파나무는 잎을 간조롬하게 내밀고 도도하다. 저 열매를 따서 효소를 담궜는데 어디에 있더라? 동백, 영산홍, 무화과, 단풍, 철쭉, 모란, 옥잠화, 비비추, 거기에 돼지감자까지, 호스를 길게 뽑아 물을 주면서 한 번씩 둘러본다. 때 맞춰 전정(剪定)은 필수다. 멋대로 뻗게 두면 가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다. 다른 식물들과 보조를 맞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보담 혼자 잘난 척 으스대면 경관은 물론이고 정원의 품격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과욕은 금물, 저마다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외부의 바람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나 또한 작은 몸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에 속하여 일을 즐기며 살아온 것은 내 분수를 알고 과욕을 금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무들을 낮게 전정하는 것을 볼 때마다 집 사람은 웃으며 지청구를 한다. “본인이 작으니까 나무들도 죄다 난쟁이로 키우는 게야? 뭐야?” “이 사람아, 모난 돌이 정 맞고 키 큰 나무 실속 없고,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는겨!”
- 7시 반 배달된 신문을 읽고 뉴스도 꼼꼼히 챙긴다. 깨끗한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고른다. 넥타이 택과 타이 클립도 색깔에 맞춰서 고른다. 현관 앞 탁자에 앉아 수첩을 펴고 오늘 할 일을 체크한다. 몇 군데 모임이 있군. 시간을 달리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환히 웃어야지.
- 8시 반 집을 나선다. 수외마을을 한 바퀴 눈으로 훑고 마을 표지판엔 한동안 머문다. 1948년에 읍내에서 태어나 고성을 떠나본 적이 없다. 문화서점을 운영하던 부친은 공들여 나를 낳으셨다. 누님은 나보다 10살 많고, 여동생과는 8살 터울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읍내 유일의 신명유치원은 고성교회 안에 있었다. 해동당 약방 주인이셨던 원장님은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 “서점집 아들, 책 많이 읽고 바르게 자라야지!” 나를 볼 때마다 주문하듯 들려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러나 나는 책보다는 재작질에 관심이 많았다. 떼를 쓰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억지 잘 부리는 고집쟁이로 자랐다. 내 맘대로 안 되면 골목길에 드러눕고 발버둥치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짓을 다반사로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귀한 아들 옆에 끼고 싶어하시는 부친의 뜻을 쫓아 고성초등, 고성중, 고성농고를 졸업했다. 육군포병으로 병장 만기 제대하기까지 강원도 양구·인제·원통을 거쳐 서하리에서 복무했다. 코 앞에 북한 장교들이 사는 막사가 있었고 ‘졸면 죽는다!’가 우리 부대의 좌우명이었다. 겨울이면 눈이 첩첩으로 쌓여 빗자루와 삽으로 눈을 퍼 나르고 쓰는 동안 봄이 와 있었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니 이쯤에서 줄이고.
- 9시 읍사무소에 간다. 각 계마다 들러 인사를 한다. 2층 주민자치회에서 사업 진행을 의논하고 소가야문화보존회에 살짝 얼굴을 내민다. “아이쿠, 수외마을 이장님 나오셨어예?” “좋은 아침, 오늘 특별한 일은 없소?” 지난 밤도 무탈하게 넘어갔고, 오늘도 내일도 특별한 일이 안 생기는 것이 좋은 날이다. 저마다 볼일을 보러온 사람들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고 차를 한 잔씩 나눠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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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성내지구의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행동에 옮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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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군청에 들러 도시재생 활성화 사업과 고성읍 중심지 사업 추진 경위를 알아본다. 뒤이어 영농협의회 간담회는 코로나 때문에 서면으로 대신 한단다. 지인들과 내년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눗고 향 좋은 차를 마신다. 마음이 넉넉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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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구들이 모여 물장난을 하며 신이 났다. 사람 사는 집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꽃보다 향그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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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 대우조선에 근무하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는지, 필요한 게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입맛은 좋은지, 저번에 보낸 홍삼은 다 드셨는지 따발총처럼 쏘아댄다. “모두모두 오케이. 완벽해~” 부산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큰아들도, 시립무용단 무용수인 며느리도, 개인 사업을 하는 둘째 아들 내외도 우리 부부에게 잘 한다. 두 아들은 나의 기둥이며 믿음이고 자랑이다. 거기에 왈가닥이긴 하지만 정 깊은 딸과 사위까지 있으니 내겐 과분하다. 손주들도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란다. 여기에 더 무슨 욕심이 있으랴. 감사할 뿐이다.
- 2시 시각장애인 노래교실에 들렀다. 코로나 시국에 다중집합은 금지인데 세 분이 잠시 나오셨단다. 차에 실려있는 마술 도구를 들고 머리를 맞댄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음성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분들이다. 손과 입으로 엉터리방터리 마술을 한다. 빵^^ 박수가 터진다.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아마 개그맨이 될 것이다.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해 주는 몸짓이 너무나 재미있다. 내 말과 행동에 상대방의 웃음이 따라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노래를 부르고 사회를 보며 관중에게 웃음보따리를 안기는 것은 어떤 일보다 신이 난다. 노래강사를 하며 1년간 받은 강사비 절반을 협찬하여 노래기기를 마련했으니 더욱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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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농요 정기공연을 끝내고 홀가분하다. 이수자이며 부회장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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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4시 문화원에 들른다. 분과별 수업 과정을 둘러보고 회원들을 격려한다.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의논할 일이 있단다. 약속을 정하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한사코 밥값을 낸다길래 못 이기는 척 잘 먹었다고 인사를 했다. 오늘 또 빚이 쌓였다. 갚아야 할 빚은 잊지 않고 꼼꼼히 기록해 둔다. 그이에게 언젠가는 더 맛난 밥을 한 끼 대접해야겠다. 그나저나, 그이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준담? 머리를 쥐어짜며 집으로 왔다.
- 저녁 7시 반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가 툭 던진다. “낼은 배추와 무를 심을끼요. 비온 뒤 땅이 꼽꼽하니 딱이요. 딴 데 약속 잡지 마소.” “두 식구 을매나 묵는다꼬 자꾸 심을라 카요? 고마 사서 무웁시다.” “적게 무울낀께 내 손으로 할끼요.” “작년에 마지막으로 김장 담군다 안 캤디요?” “올해를 끝으로 은자는 애나로 김장 안 할 끼요.” 매년 되풀이되는 집사람과의 입씨름이다. 김장에서는 내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하긴, 살림살이에 관한 한 나는 늘 변방을 떠도는 나그네 같은 걸. 집사람에게 평생 미안할 뿐이다. 해마다 올해로 마지막 김장을 담근다 하면서도 이어지는 그 삶의 길을 나는 안다. 아내는 해마다 꽃을 가꿀 것이고 고추를 딸 것이고 배추와 무를 심을 것이다. 아내는 해마다 김장을 할 것이고, 자식들과 나눌 것이고 이웃집에도 몇 쪽 담장을 넘길 것이다. 그렇다. 해마다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고, 부부가 자력으로 생의 갈피를 엮어간다는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 행복하다는 뜻이며, 부부의 연을 이어가면서 사랑을 증거하는 모습이니까.
- 저녁 9시 뉴스를 켠다. 평생을 해 오던 습관이다. 지구상에 무슨 중요한 일이 생겼는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잘 돌아가고 있는지, 경상남도 구석구석은 어떤지, 내 고향 고성에 특별한 사항은 발생하지 않았는지 지방뉴스와 날씨까지 꼼꼼히 듣는다. 수십억의 인구가 살아가는 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생기고 놀랄 일이 많으랴. 또한 개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이야기 또한 보따리보따리 풀어도 더 남음이 있을 것임을. 그러나 2년에 걸쳐 일어나는 이 未曾有 코로나의 발생과 전염, 전이와 치유는 어떻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으랴? 코로나를 말하려면 미세 세균학자부터, 환경학, 심리학, 경제학, 통계학, 예방학, 약학, 사회학, 정치학, 문학, 인류학까지.... 모든 학문을 동원하여 연구하고 채록採錄하고 融合해도 모자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사이 창 밖엔 소나기가 한 줄 긋고 지나간 모양이다.
- 저녁 10시 잠들기 전에 노래를 한 곡 들을까? 아니 부를까? 내 18번인 ‘너와 나의 고향’은 목청을 높여 불러보고, 머리맡에 조용필의 ‘들꽃’을 틀어야겠다. ‘나~~그대만을 위해서 피어난 저 바위틈에 한 송이 들꽃이어라. 돌틈 사이 이름도 없는 들꽃처럼 핀다 하여도 내 진정 그대를 위해서 살아가리라......’ 나는, 한 송이 들풀처럼 돋았다가 돌틈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향기 전하는 들꽃처럼 아직도 피어있다. 물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감사가 담겨 있을까? 따스한 손길로 온 세상에 공평하게 내리던 햇살이며, 변화무쌍하던 바람이며, 중간자의 가교 역할을 하던 구름을 받으며 강부관이란 들꽃을 피웠다.
나를 아끼고 도와주던 사람들, 때로는 질타하고 꾸짖던 이들, 내 마음을 몰라주어 서운하던 이웃들, 누구보다 귀하고 자랑스러운 2남 1녀의 자식들, 함께 노래하던 사람들, 농사일을 재현하며 농요를 보존하는 회원들, 평생 운동을 함께하던 벗들과 연식정구와 테니스 공들, 작품으로 세상에 한 줄 빛이 되고자 했던 예술인들, 농악과 마술을 함께 즐기던 학우들, 소가야의 향기를 지키려던 보존회원들, 수외마을의 정겨운 이웃들, 도시재생을 위해 오늘도 뛰고 있을 위원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원봉사의 길에 나선 협의회원들, 마을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기꺼이 헌신해 준 이장들, 그리고 溫情의 깃발을 높이 들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文化와 文火·文華·文話의 빛을 환히 밝히고자 했던 문화인들과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모두가 감사하다. 한 송이 들꽃이 어찌 그냥 싹을 틔워 꽃을 피웠으랴? 이 모든 분들과 함께, 내 곁에서 마흔 네 해를 함께 해 준 우리 집 ‘안해’, 집사람에게도 고마움의 향기를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