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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과 소가야연맹체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8월 20일
↑↑ 송학동고분군
ⓒ 고성신문
↑↑ 내산리고분군
ⓒ 고성신문
↑↑ 내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
ⓒ 고성신문
ⓒ 고성신문
1. 포상팔국

포상팔국은 경남 서남부 해안 일대에 성립해 있었던, 일시적 이해관계로 얽혀 완만한 연맹 관계를 이루었던 항시(국가)의 연합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맹체는 5~6세기 소가야연맹체의 전신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상팔국은 항시들의 연합체이고 종적인 연맹관계보다는 횡적인 연맹관계로 파악된다. 더 후대인 5~6세기대 소가야연맹체도 횡적인 연맹체로 파악되는 것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인 3~4세기대라면 연맹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더 완만한 연맹체로 보아야 할 것이며, 해당 정치체는 읍락 수준이 다수일 것이다. 이에 비해 고자국 같이 변진12개국에도 거명되는 좀 더 큰 정치체는 국읍과 읍락을 갖춘 소국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대 ‧ 소항시들의 연합체가 포상팔국으로 보인다.
그리고 4세기 초기무렵까지 가야에서 가장 빨리 토기양식이 등장한 금관가야, 아라가야지역과 같은 문화적 동질성이 포상팔국에는 보이지 않는다. 동외동패총에서도 무문토기의 변형인 경질무문토기나 적갈색연질토기만 출토되는 모습에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상팔국의 문화적 동질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요컨대 포상팔국에서 포상팔국 이전의 문화적 동질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포상팔국 전쟁 당시 포상팔국은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2. 포상팔국의 위치 비정
포상팔국의 위치에 대해 이견도 있지만 골포국-창원, 칠포국-칠원, 고사포·고자국-고성, 사물국-사천 등으로 비정하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포상팔국의 위치를 해안변에 비정하는 공통점이 있고 그 공간적 범위는 사천에서 창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포상팔국의 중심세력은 현 행정구역상으로 고성(2개소 이상)‧ 창원(2개소) 일대로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고성에서는 고성분지, 창원에서는 창원분지가 최상위집단으로 존재했다. 나머지 포상팔국의 후보지에서 3~4세기 때의 유적‧유물이 빈약한 것은 인구의 집중도나 개별 소국의 위계에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
정치체의 공간적 범위로 보아도 고성분지·창원분지는 2개 읍락 이상으로 직경 10㎞를 상회하지만 내산리 세력이나 마산 현동, 진해 석동 일대는 1개 읍락 규모로서 전자에 비해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포상팔국의 공간적 범위나 그 정치적 위상이 동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골포국의 위치는 종래 견해처럼 창원·마산지역 전체로 간주하기보다 창원 남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남천 주위로 다양한 유물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마산만과 연결된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골포국을 마산을 제외한 창원분지로 한정하고 마산만 입구인 현동유적을 중심으로 별개의 정치체가 존재한 것으로 본다. 고고학적으로 마산 현동 일대에 현재까지 가장 많은 고분이 좁은 덕동만 주변의 현동 일대에 집중하는 것은 별개 해상세력의 존재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포상팔국의 고지로 추정되고 각기 1천기 이상씩의 분묘가 확인된 마산 현동 유적이나 진해 석동 유적의 묘제는 모두 목곽묘로서 4세기 중후반~5세기 초반에 집중되고 있다.
사물국은 사천으로 추정되고 상당한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중심고분군이 확인되지 않는다. 5~6세기의 사천은 고성의 하위집단으로 전략한 것으로 보인다.
칠포는 칠원으로 보고 있다. 칠원지역, 즉 칠원‧칠북·칠서지역의 유적분포로 보아 정치체가 성장할 수 있는 지역이다. 칠원지역은 해상을 통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지역으로 보기 어렵지만 구산현(마산 합포구 구만면)이 칠원현의 속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양과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칠원읍 중심의 칠포국이 광려천 상류를 통하여 거슬러 올라가 구산면 해안을 이용하여 대외교역을 하다 포상팔국 전쟁 이후 쇠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해 웅천 일대도 대외교역의 중심지로 포상팔국의 하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최근에 발굴되고 있는 진해 석동에서는 현동과 동일하게 1천기 이상의 밀집된 고분들이 확인되는데 4세기 후반~5세기 초 목곽묘가 중심이다. 석동고분군 옆에 분포하는 주거유적과 패총유적의 중심시기는 3~4세기이다. 이러한 점에서 석동과 현동은 유사한 성격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진동지역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대규모 지석묘의 축조와 이후 소가야와의 관계로 보아 포상팔국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진동지역은 진동만을 끼고 있는 진전‧진북·진동에 해당하며 함안의 정치집단이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분포되고 있어 정치집단의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지역이다.
거제도는 변한 소국의 하나인 독로국으로 비정되는 지역이다. 거제 아주동은 3~4세기대의 왜계유물이 확인되면서도 금관가야권과 구분되어, 거제 아주동-진해 용원- 마산 현동-사천 늑도 등의 연결선은 대외교역의 거점이면서 항시로 볼 수 있어 포상팔국과 관련지을 수 있다. 5세기 후엽에 축조된 거제 장목고분도 소가야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5~6세기의 거제도는 소가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유기적 관련성은 3~4세기대까지 소급되어 포상팔국의 일원일 가능성이 많다.
포상팔국 중 고성지역에 비정할 수 있는 나라는 고사포‧고자국 외에 보라국이 거론된다.
고성지역은 소가야연맹체의 중심이고 고성지역의 해안가에 5~6세기대의 고총고분군이 2개소가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즉, 고성 중심부의 송학고분군 외에 동쪽 동해면의 내산리 고분군이 그것이다. 경남 남해안에 밀집된 고분군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내산리 고분군도 포상팔국의 하나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해안변이면서도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삼국시대 성이 확인되고 유력세력의 상징인 고총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 이전에 유력세력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보라국을 보령향라는 지명에 근거하여 고성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 최근 심봉근 교수는 고성문화원 70년사에 게재한 논문에서 보라국은 삼한시대 늑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문헌상에 나타나는 포상팔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 즉, 삼극시대 전기까지 계속해서 늑도에 위치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면서 그 이유로 고고학적으로 3세기 전반 즉 삼국시대 전기 이후에 해당하는 유물이 늑도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당시 보라국이 늑도에서 소멸되었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을 것으로 예상하고 3세기 정도 공백기를 둔 다음 시기에 인접한 육지 사등동(모라등)과 향촌동에서 보라국 흔적이 확인되도 있다고 했다.

3. 포상팔국 전쟁
1) 포상팔국 전쟁에 대한 문헌 기록
포상팔국의 난은 신라인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지만 당대인이 오래 기억을 살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 三國史記 신라본기와 열전 물계자전, 三國遺事 물계자조에 전하여 지고 있어,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최근의 연구성과는 전쟁의 대상도 加羅國(금관가야)와 蒲上八國, 阿羅國(아라가야)와 蒲上八國 사이의 전쟁에 신라가 개입한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가야 내부의 문제로 시작은 포상팔국과 가라국 내지 아라국과의 전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포상팔국과 신라의 전쟁으로 마무리 되고 있는 것이다.
포상팔국의 난, 포상팔국의 전쟁 경과를 정리해 본다.
① 신라 나해왕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모의하여 加羅(阿羅)를 침략하였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열전 물계자전)
② 가라왕자(아라사신)가 新羅에 구원을 청하였다.(三國史記 신라본기)
③ 신라왕이 태자 우로와 伊伐飡 이음에게 명하여 가라를 구원하고 8군의 왕을 격살했다.(三國遺事 신라본기)
④ 포로가 되었던 6천 인을 빼앗아 加羅에 돌려 주었다.(三國史記 신라본기)
▫나해왕 17년(212) 봄 가야가 왕자를 신라에 보내 볼모로 삼았다.(三國史記 신라본기)
▫나해왕 17년에 保羅國, 古自國, 史勿國 등 8국이 힘을 합쳐서 변경을 침범해 왔다. 三國史記 열전 물계자전)
▫내해왕은 태자(왕손) 내음과 將軍 이벌 등에게 명하여 가까운 군과 六部兵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고 8국은 모두 항복했다.(三國史記 열전 물계자전, 三國遺事 물계자조)
▫내해왕 20년(215) 을미에 骨浦國, 漆浦國, 古史浦國 등 3국의 왕이 각기 군사를 거너리고 와서 갈화(울산)을 공격했다. 신라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니 3국이 모두 패했다.(三國史記 열전 물계자전, 三國遺事 물계자조)
 
2) 포상팔국 전쟁의 시기 및 대상
위에서처럼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상 기록에서, 관련된 국가로 포상팔국, 가라, 아라, 신라 등이 등장하며, 관련 인물로 于老(于老音), 利音, 將軍 一伐, 勿稽子 등이 나온다.
사료상의 연대는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대이나, 사료 비판을 통해 3세기 전반, 3세기 후반, 4세기 전반, 4세기 후반, 5세기 전반, 6세기 중반, 7세기 등 다양한 연대폭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이 전쟁 기사가 다양한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과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사료 그대로 이 전쟁이 일어난 시점을 3세기 전반으로 볼 수도 있으나, 4세기 전반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3세기 전반이든 4세기 전반이든 상관없이 이 시기에 포상팔국의 범위나 軍勢를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는 검출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포상팔국은 남해안을 따라 분포한 소국의 연맹으로 간주하고 있어 후대의 소가야의 범위와 겹치고 있다.
이 전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4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낙랑·대방군-마한-변한-왜를 연결하는 교역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연구에서 2세기 중반까지 번영을 누리던 사천 勒道 중심의 교역체계가 3세기 이후에 狗倻國(가락국, 금관가야) 중심의 교역체계로 전환하였다는 설명이다. 새로이 교역을 주도하는 김해의 구야국에 대해 늑도를 중심으로 한 포상팔국이 반발한 사건으로 포상팔국의 난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포상팔국의 난과 관련된 시점은 다양한 연대폭을 보이고 있는데, 3~5세기까지로 볼 정도로 시기폭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는 포상팔국의 융기, 가라국(금관가야)의 쇠퇴 등 여러 시기의 사실이 하나의 사실에 녹아 들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5세기에 걸친 신라와 대가야의 전쟁에 대한 경험이 이 기록에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포상팔국의 전쟁은 한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3세기 초부터 5세기 전반에 걸친 장기간의 국제정세를 반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남해안에서 이루어진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사천 늑도(사물국, 보라국) → 구야국(가락국, 금관가야) → 탁순 아라국 → 고자국(소가야) →대가야(섬진강) 하구) 등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포상팔국의 난이 전개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포상팔국 전쟁의 성격
포상팔국 전쟁의 성격을 교역권과 관련한 가야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가야 내부의 전쟁으로 볼 수 있겠으나 오히려 신라 대 가야연맹의 대결구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가야 내부의 갈등에서 시작되었으나 전쟁이 그 과정에서 新羅대 蒲上八國간의 전쟁으로 발전되고 있다. 전쟁은 최종적으로 가야 내부의 분열과 신라에의 예속을 가져다 주었다.
포상팔국의 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이 전쟁에 우로가 참여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만 나오고 있어,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상팔국의 난에 활약한 신라인은 이벌찬 이음과 장군 일벌이며, 실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인물은 물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더 중요한 전쟁은 포상팔국과 가라국 안아국의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포상팔국 중에서 삼국의 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원정한 신라 갈화성 전투가 될 것이다. 신라에서도 국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던 것이다.
신라의 국가형태는 중앙은 6부로 나누어져 있고, 지방에는 소국이 자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라국왕은 개별 6부와 지방 소국의 자치력을 인정하면서도 전시에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국왕의 아래에 통합시키고 있다. 신라는 점차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여 가는 방식을 선택하였고 후대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6세기 중기 이후에는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된다.
반면 가야는 독립적인 자연지형인 분지나 해안을 기반으로 국가가 건립되어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강하였다. 전시의 군사권과 외교권도 개별 소국이 행사하였다. 포상팔국 전쟁에서도 8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각자 국왕이나 장군의 지휘하에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야의 발전이 신라에 비해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가야는 개별 소국이 그 독자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4. 소가야연맹체
소가야연맹체는 상호간 상하가 아닌 병렬적 연맹관계로 종속적인 면은 약하다. 소가야연맹이 횡적인 지배구조를 갖는 근본적인 원인은 교역에 치중하여 해안가를 중심으로 개별적인 정치체로 분리되어 통합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에 있다.
소가야양식토기는 매우 불규칙한 권역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것은 소가야 정치체가 작은 단위사회들간의 일정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음을 의미하는데, 포상팔국 및 소가야연맹체의 정치시스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포상팔국 전쟁 이후에 포상팔국 소속 항시세력은 두 갈래로 나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자국이나 내산리 세력같이 금관가야나 아라가야로부터 먼 세력은 그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여 후기가야 대외교역의 요충지로 성장했지만, 골포국이나 칠포국 세력은 주변 유력세력(금관가야나 아라가야)에 흡수되거나 영향하에 들어간다. 현동세력은 초기에는 칠포국의 외항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이나 포상팔국 전쟁 뒤인 4세기 중엽 이후 아라가야의 외항으로 기능하면서 전형적인 항시세력으로 성장한다.
항시의 발전단계는 교역장→항시→항시국가의 순으로 볼 수 있다. 사천 늑도는 교역장 수준이고 마산 현동이 대표적인 항시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몇 개의 항시를 통합하는 상위의 정치체를 항시국가로 본다면 포상팔국 가운데 고자국이 초기적인 모습의 항시국가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항시(국가)는 그 시초로서 기원전 1세기경의 소규모 교역장인 늑도유적에서부터 기원후 6세기 중엽 고자국 중심의 소가야연맹체 단계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남 남해안에서 항시(국가)의 중심은 늑도→김해→마산만→고성으로 변화하였지만, 지역적 항시는 계속 유지되어 중심과 주변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항시의 중심이 김해에서 점차 서쪽으로 이전한 것은 신라의 서진과 관련하여 왜나 백제 등이 정치적으로 안전한 항구를 구해야 할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
고대사회에 남해안에는 여러 항시(국가)들이 존재했으며, 고성 송학동 세력을 주로 한 소가야연맹체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항시국가 연맹으로 융성했을 때 내산리 세력은 종래 항시의 연장선에서 송학동 세력의 부용세력으로 그 존재했다.

본 원고는 그 내용을 다음 참고논문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참고논문>
▫이동희 ‘고성 내산리 집단의 성격과 포상팔국’
▫김재홍 ‘삼국초기의 해상영웅’
▫심봉근 ‘고고학적으로 본 보라국과 문화량현’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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