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볍씨는 몇 가마의 쌀이 되고, 한 줌 햇살은 온 세상에 온기를 내리고, 내 손녀 윤서는 세상 모든 것에 우선하니, 볍씨도 햇살도 모두 네 것이 되리니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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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면의 모든 물들은 바다로 흘러든다. 당항포 가는 길의 하천 둑에 풀들이 가득한데 들판을 지그시 바라보는 도태규 농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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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젤 이쁜 손녀딸 윤서, 가끔은 도레미야, 라고 불러보기도 하는 사랑스런 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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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에게 전하는 말 윤서야, 이 할배를 취재하러 온 작가를 만나 찻집으로 가는 길에 벨이 울리더라. 윤서인게야. 바로 전화를 받고 싶었지만 운전 중 통화는 위험하니 안 되지. 길 가장자리까지 오는 잠깐의 순간도 윤서가 기다릴까봐 마음이 담금질을 치더마는. 윤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피더라카네. “손녀 목소리 들으면 그리 신나예?” “하모요. 내는 세상에서 우리 손녀가 젤로 이쁨미더. 좋아 죽어예.” “할배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인기라예.” “아일낀데예? 내만치 손녀가 이쁜 할배가 또 있으까예?” 작가님이 씨익 웃으시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살짝 쑥스럽더라꼬. “손녀가 뭐라 캐예?” “다 들으셨다 아임미꺼. 퍼뜩 집으로 오라 카네예” 어여쁜 윤서야, 이 할배는 니만 보면 끄뻑 넘어간다.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아온 것 첫째 이유는 니를 만나려고 그랬던갑다. 깨물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다는 말이 정말 실감나는게야. 이 무슨 조환고? 내가 니 이름을 ‘도레미’로 짓고 싶었는데 난중 크면 놀림당한다꼬 설득하는 바람에 지금의 이름이 된 게야. 나는 가끔 혼자서 ‘도레미야’ 라고 부르곤 하지. 할배가 어디서 봤는데, 사람끼리도 궁합이 있다는게야. 니캉 할배는 완전 찹쌀궁합이 아닐까 싶네. 우리 오래오래 정을 나누며 함께 살자구나. 우주 만물의 생성은 음양오행설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주나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을 목·화·토·금·수의 변전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이라 하더구먼. 니가 물이라면 할배는 나무가 되어 너를 부르고, 할배가 흙이라면 너는 나무가 되어 자라는게지. 내 마음이 이런 말도 갖다붙이고 싶은 게야. 그만큼 네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뜻이니라. 네가 난중 숙녀가 되어 남자친구를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면 이 할배의 마음을 알게 될까?
# 믿음직한 두 아들에게 아들들아, 오늘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싶네. 살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언제 할낀고? 가족끼리는 다 아는 이야기니 뭐 따로 하고 자시고가 뭐 있을끼고?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사연은 좀처럼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내 이야길 좀 들어주라모. 그러니까 너의 조부는 약주를 아주 좋아하셨는기라. 옛말에 ‘술 한동이를 지고 오기는 어려워도 배에 넣어 오기는 쉽다‘는 말처럼 얼마나 약주를 즐기셨는지 말도 마라. 내가 윤서를 예뻐하는 것만치 네 조부는 술을 좋아하셔서 끼고 사셨다고나 할까. 내는 그런 아부지가 싫더구나. ‘아부지처럼 안 살끼다. 아부지처럼 술 안 마실끼다’ 이 말을 가슴에 심지처럼 박고 살았니라. 내가 초등학교를 마친 뒤 회화중학교에 입학을 할끼라꼬 희망에 부풀어 있던 어느 날, 약주에 취하신 아부지가 책가방을 부석(부엌)에 던지삐더라. 교과서는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제, 아부지는 곤드레만드레가 되셔서 정신도 없으시제. 내는 고마 콱 말문이 막히고 심장이 오그라 들더마는. 책보따리 대신 내가 부석에 들어가고 싶은 맘이더라. 그래도 우짜끼고. 살아야 안 하더나. 하기야, 우리 집 형편에 중학교가 뭔 해당이 되던고? 겨우 4남매 굶어죽지 않을맨치 근근이 살았거든. 보리누름이 되면 배를 곯는 이들이 많던 시절이었으니. 자식들 입에 쌀밥 한 숟가락 넣어주기 힘든 아부지 맘이 어땠을꼬? 그 애닯픈 마음을 술로 달래고, 따신 말씀 한 마디 대신 우락부락 얼굴 붉히심으로 마음을 대신하던 내 아부지가 살다보니 이해가 되더라꼬. 그래서 친구들이 중학교에 갈 때 나는 부산으로 갔디라. 처음 취직한 곳이 이발소인데, 남의 머릴 감겨주고 이발 일을 배우려고 1년을 기다렸지. 그런데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다음 해에 명륜동의 성냥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디라. 내 이름도 안 까 묵고 있다. ‘율곡화확’이라꼬. 그 곳에 다님서 야간중학교를 다녔지. 전기가 들어옴서 성냥공장도 내리막길을 걷더라꼬. 그래서 들어간 곳이 양정에 있는 유리공장이었지. 입으로 불어서 병모양을 만드는데 꼭 마술을 부리는거 맨치로 신기하고 멋있어 보였더라고. 내도 기술자가 될끼라꼬 심부름을 열심히 했는데 여도 인연이 아니었던가베. 아는 기술자가 감만동 스텐공장으로 옮긴담서 날 데려 가겠다더만. 그래서 따라갔고,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게지. 스텐공장은 밤낮없이 일을 하더라꼬. 그 때 막, 사기그릇에서 스텐 그릇으로 주방용품이 변환되는 과정이었거든. 무거운데다가 잘 깨지는 사기그릇에 비해, 가볍고 던져도 깨어지지 않는 스텐그릇은 주방의 혁신품이 되었던 게야. 나도 기술을 배워서 제법 폼을 잡으려는데 공장 주인이 바뀌더라구. 다들 다른 공장으로 가는데 쇳소리가 싫었던 나는 이참에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스텐을 깎을 때 나오는 ‘쉿~ 찌이익~~째강~’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띠잉~하고, 그 쇳소리가 내 온 몸에 박히는 느낌이랄까? 기술도 배웠고 월급도 제법 괜찮았지만 왠지 정이 안 들었던게야. 내 온몸이 한 뼘쯤 허공에 떠 있는 기분? 사람의 발은 땅에 딱 붙어서 안정적인 착지(着地) 상태일 때 편안함과 무게 중심이 잡히거든. 그래서 반여2동의 대우실업으로 직장을 옮겼어. 그 곳은 직물을 재단하여 남방을 만드는 곳이었어. 월급은 지난번보다 적었지만 맘은 편하더라구.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 하는 동안 몇 차례의 직장을 옮겼으니 이제는 편히 직물공장에 다니며 야간 대학을 가야겠다는 계획을 잡았지. 그런데 마음 먹은대로 안 되는게 인생살이인게야. 인연이 아니었다고 점을 콕, 찌고 싶었네. 1979년 고성군에 제1호 주택개량사업이 진행중이라는 정보를 받았지. 낡은 초가지붕의 집집마다 사업을 신청하라는 기별이 왔고, 내 옴마는 우짜든지 이번 기회에 새 집을 짓고 싶으신 눈치셨어. 그런데 아부지는 취해 계시니 우짤껴? 장남인 내가 주선하여 15평짜리 새 집을 지었지. 그동안 고생하신 부모님 편하게 지내실끼라고 맘 놓고 복직하려는데, 옴마가 내 바짓가랭이를 잡고 놓지를 않으시는게야. 장남이 와 있으니 사는기 편하시담서 자꾸 가지 말라시대. 우짤낀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계신 내 옴마 부탁은 들어드려야지 않을낀가베? 그래서 고향 땅에 주저앉으니 야간대학은 물 건너 간 게야. 농사 지음시로 야간대학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말도 안 되는기고. 그렇게 농부로 주저앉은게야. 내가 도시에서 계속 살았으모 늬들이 공부하고 사는데 더 좋았을까? 그건 모리는기지. 인생이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는 남게 마련이고 정답은 없으니.
# 내 아내에게 집사람, 내가 지은 죄가 많소. 오늘은 작정하고 용서를 빌끼요.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내 사과를 받아주소. 내가 농부로 살다보이 마음에 드는 처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디요. 내도 보는 눈이 있으이 나름대로 눈이 높았던가 보우. 내 처지가 썩 괜찮은 것도 아님서 그래도 야망이 높은게 사나이 아이디요? 내 나이 서른이 넘어 노총각이 되었으니 장가를 가야겠다고 맘을 턱 먹고는 여기저기 중신애비를 넣었디요. 그랬더니 부산 사는 참한 아가씨한테 중매가 들어온기요. 내사 이번에 꼭 성사를 시켜야겠다 싶어서 때 빼고 광 내고 부산으로 날아갔소. 다방에서 이녁을 만났는데 내가 한 눈에 반했소. 얼굴도 뽀얗고 긴 생머리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맨치고 예삤지만, 눈이 특히 맑고 고왔소. 또 이야기를 하다보니 마음씨가 비단결같이 아름다운기요. 이녁을 놓치모 내 평생 장가 못 갈 것 같아서 아예 같은 동네에 방을 하나 얻었소. 이녁이 퇴근할 때면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데이트 하자고 떼를 쓰며 매달렸던 기요. 그래 승낙을 받아내고는, 냅다 덜쳐업고 고향으로 온 기요. 내 지금도 처형 은혜를 잊을 수가 없소. 우리 처형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기요. “아우야, 저 청년 키는 작아도 됨됨이가 야무지다. 키 크고 인물 잘 생긴거는 첫 날 초례청에서나 해당되지. 살아보모 알끼다. 성실하고 알찬게 진짜배기인게야. 내 안목을 믿고 시집가!” 이렇게 이녁한테 설득을 했던기요. 동생 맡겨도 굶기지 않을 사람이라꼬 믿어준기요. 고맙소. 대도시에서 시골로 시집와서 사느라 애 많이 쓰셨소. 내가 197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울 아부지 부치는 소작면적이 다섯마지기 쯤이었소. 그걸로는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에렵습디다. 도시에서 직장 다님서 모은 돈으로 경운기를 한 대 샀소. 그 경운기를 몰고 봄이면 보리타작을 하고, 가을 벼타작을 해 주면서 삯을 받았소. 논과 밭도 갈고, 볏짚도 운반하고, 매상할 때마다 나락이며 보리가마니 실어 나르고, 콩이며 고구마까지 내 경운기에 싣지 않은 곡식이 없었소. 때로는 짐승들도 장에 델다 주었디요. 돈이 좀 모이면 트랙터를 샀고, 콤바인과 이양기까지 농사에 필요한 모든 농기구를 샀소. 그런 농기구는 내 농사에도 사용했지만, 품삯을 받고 남의 농사까지 거들게 되었으니 소득이 짭짤했소. 이녁과 결혼을 하고 생활이 안정되니 농사짓는 전답이 100마지로 늘어납디다. 이녁은 음식 솜씨도 좋고, 자식들도 잘 키워주고, 짬짬이 농사일도 거들어 주니 참으로 좋습디다. 내가 어디에 대 놓고 마누라 자랑하려니 팔불출이라서 흉잡힐 것 같아, 하루는 대나무 숲으로 갔디요. 그래 대숲에서 맘껏 소리쳤으니, 그 날 일은 오직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라고 알아주시면 되는기요. 이녁 믿고 임차농으로 300마지기 까지 농사를 지어봤으니 내 농부로서 여한이 없소. 무엇이든지 무리하면 병이 오고, 탈이 나기 마련이오. 쉬지 않고 일을 했더니 협심증이 왔고 스텐스 시술을 받고나니 그동안 내 삶이 훤히 보입디다. 이녁하고 오순도순 재밌는 시간도 부족했고, 좋아하는 등산도 자꾸 미뤘고, 아들들 어릴 때 놀아준 기억도 아슴하고, 후회가 밀려옵디다. 그래서 내 다짐했소. 이젠 일은 줄이고 노는 날을 더 자주 만들고 쉬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로 말이요. 사람이 평생 일하며 살았는데 그기 잘 될랑가 싶던차에 손녀가 태어나니 참으로 고맙고 좋디요. 내 참~~ 손녀를 물고 빨면서 내 자식들한테 이렇게 애정을 표현한 적 없었기에 미안했소. 생각해보면 내 젊은 날은 일에 바빴고, 논 한 마지기라도 더 장만하려고 밤을 낮처럼 보냈던기요. 어른들 눈치 보여서 내 새끼 한 번 안아주지도 업어주지도 못했소.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표시를 하며 사는게 당연한 이치인데 왜 그걸 몰랐단 말이요. 그 마음이 넘쳐서 하나 있는 손녀 윤서한테 푹 빠진 할배가 되었으니, 이녁도 이해해 주면 좋것소.
# 며느리에게 아가, 서울 백병원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곳인데, 그 곳에서 간호사로 잘 근무하다가 아들 만나서 결혼하느라 시골 내려와 살겠다는 말 듣고 참으로 고마웠다. 거기에 무슨 용기인지 시댁에 들어와서 함께 지내겠다고 했으니 요즘 세상에 드문 일이라고 사람들이 말들 해 삿네. 자네가 함께 살겠다 하니 근무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집을 지었고 사람 냄새 폴폴 나는 생활을 하게 되었구나. 서로의 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각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가족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도록, 저마다의 자존을 지켜주면서 함께 사는 삶에 나는 만족한다. 가끔은 자네와 술잔을 기울이노라면 나는 수다쟁이 시아버지가 되기도 하지. 그러면 자네는 또 나를 채근하여 꼬드기지. “더 많이 얘기하시고, 노래도 불러주시라. 이러는 아버님이 좋으시다” “우리 메느리가 하라고 하면 내가 얼마든지 해야지. 메느리가 원하모 별이라도 따 주야지.” 나는 술이 몇 잔 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알싸하게 좋아지면서 그동안 속에 쌓인 이야기들이 실타래의 실이 풀리듯이 슬슬 흘러 나오더라구. 가끔은 자네한테 이렇게 투정 아닌 투정도 부리지. “윤서 어메야, 자네는 시아부지가 무슨 일을 농사를 짓는지, 우리 논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인지, 밭둑에 돋는 풀이 쑥인지 민들레인지, 논에는 방동사니가 많은지 올방개가 많은지 봐 주면 안 되겠냐?” “헤헤, 아버님이 환자 팔에 주사 못 놓으시는 것처럼 저는 밭둑 논둑에 돋는 풀을 모르지요.” “그래 맞는 말이지.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면서 지금처럼 화목하게 사는 것으로~” 자네가 천사같은 윤서를 우리에게 안겨줬으니 말해 무엇 하겠냐? 윤서의 웃음이 보석처럼 집안에 구르고, 윤서의 목소리가 꽃처럼 사방에 향기로 가득 퍼지는 것을. 우리네 인생사가 내리사랑 이라더만 손주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줄 내 어찌 알았던고?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모를 일인 것을. 둘째를 낳으려 애쓰는 자네 마음 다 알고 있으니 너무 애닯아 하지 마시게나. 세상 일이 어찌 우리 마음대로 되던고? 삼신 할매가 점지해주셔야만 가능한 일 아니던가? 나는 지금처럼 사는 것에 대 만족이야. 작가가 묻더라고. 앞으로의 꿈이 무엇이냐고 말이지. 이 나이에도 ‘꿈’이 있을끼던가? 곰곰 생각해보니 꿈이란게 별건가? 내가 원하는 일, 하고 싶은 무엇이 꿈이라는 이름이 아니던가? “윤서가 쪼매 더 자라모 항꾸네 산에 오르고 싶소.” “어느 산에요?” “구절산에도, 철마산에도, 사천의 와룡산에도 가고 사량도의 옥녀봉에도 가고 집소.” “윤서가 할배 따라 산에 갈라꼬 할랑가예?” “내가 윤서를 꼬셔야지.” “윤서가 잘 꼬셔지는 손녀인가예?” “우짜든지 손 잡고 항꾸네 가야지. 그기 내 꿈이며 내 희망이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무리하지 않고 움직일만큼의 땅뙤기, 몸을 뉘일 집 한 채, 소박하고 구수한 음식상, 어디든지 달려갈 차 한 대, 농사 일에 필요한 농기구들, 내가 농부임을 잊지 않을 만큼의 종자와 파종(播種)의 기억, 그리고 제일 중요한 내 가족, 그들의 입에 들어갈 맛있는 한 끼의 식사, 덧붙여 건강과 화목함. 이것이다. 좋은 인연이 닿아 사랑으로 엮여 평생을 함께 살아갈 내 식구들의 안위가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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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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