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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자의 자세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기본이다 그 바탕이 된 어린 날 내 고향집, 할매, 논둑길, 산그리메 내리는 풍경을 되짚어 보노라면 세월은 쏜살같고 추억은 아슴푸레하다

남외경 (61년생, 동해면 출신)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6월 08일
ⓒ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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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볕을 등에 업은 땅꼬마들  
삘기(삐끼)들이 봄의 안테나처럼 뾰족뾰족 솟았다. 아이들은 고 작고 여린 풀들을 찾아 산먼당까지 올랐다. 더러는 망개나무를 못 보고 휘젓다가 가시에 긁혀 피가 났다. 누군가는 끌티(삭정이)에 걸려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프단 소리없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대궁이 부드럽고 순한 삘기들을 한 줌씩 뽑아들었다.  
그런 소일거리에 서툰 나와 상선이는 멧등 옆에 오도카니 앉아서 아이들이 삘기를 몇 개씩 나눠줄 때를 기다리며 쑥잎을 뜯었다. 손톱 밑은 새파랗게 풀물이 들었다. 고학년 오빠들은 소나무의 속껍질인 송기(송구)를 벗겨먹거나 찔레순을 꺾어먹기도 했지만 1학년 땅꼬마들에게는 아직 무리였다. 
우리는 삘기 껍질을 차곡차곡 벗겨낸 뒤 연한 속잎을 입에 넣었다. 달착지근한 물이 나왔다. 조금 센 삘기는 몇 개를 모아 껌을 만들어 한참을 씹었다. 십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삘기껌은 가루가 되었고, 자갈돌은 아이들을 마중하듯 끊임없이 밟혔다.  
범바위골을 지나 적개, 정희네 가게에는 신발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볕을 맞고 있었다. 마당에는 늙은 서어나무 한 그루가 니은(ㄴ)자 모양으로 자라고 있었는데 제법 나이가 들어보였다. 잔망스런 아이들은 서어나무에 기어올라 가지를 붙들고 손그네를 탔다. 나무에 집 지은 거미와 개미들을 붙들고 내려와 손바닥에 얹고 빙빙 돌리거나 패대기를 치며 개구쟁이 짓에 시간을 쟁여갔다.  잡화상 가게에는 온갖 생필품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사지도 못할 물건들을 차례로 훑으며 아이들은 마음을 다스렸다. 신발은 추석때까지 더 신어야 하고 눈깔사탕은 입에 고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눈으로만 먹고 또 먹었다.   
전도까지 걸어오면 팽나무숲이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은 두어명의 아이들이 아름 안아도 남을만치 밑동이 굵었다. 팽나무 어린 순들이 처음 돋을 때는 새의 혓바닥처럼 여리고 야들야들한 연둣빛이었다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갔다. 여자아이들은  팽나무 그늘에 진을 치고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윗땀, 아랫땀, 막개, 큰막개 아이들이 돌아가며 가지고 놀았던 공깃돌은 닳아서 반질거렸다. 잔뜩 늘어놓고 못돌을 공중으로 던져 떠 있는 동안 바닥의 돌을 두세 개씩 집어 한 손에 합치는 놀이였다. 손동작이 빠른 아이들은 마당의 돌을 한꺼번에 다 차지하기도 했다. 손까시래기가 일고 손톱에 피가 뭉치도록 공깃돌을 당겨왔다.   
머스마들은 올챙이를 잡거나 가재를 잡느라 바짓단을 둥둥 걷어 올리고 개울가로 달려갔다. 바윗돌 틈 흙구덩에 아직 겨울잠에 빠진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기다란 꼬챙이로 뱀들의 잠을 깨웠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뱀들의 꼬리를 잡고 휘휘 돌리며 공깃돌 놀이터에 던져 판을 깼다. 여자 아이들은 머스마들을 향해 도다리처럼 눈을 흘기거나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 뱀들은 뱀꾼들의 망태 속에 담겨 어딘가로 실려갔고 아이들의 장난질로 가족을 잃었다. 그래도 뱀들은 쉴새없이 알을 낳고 새끼를 치고 개체수를 불렸다. 길섶엔 수시로 뱀들이 나타났다. 머스마들은 뱀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을만치 간이 커졌고, 껍질을 벗겨낼만치 용감해졌다. 
길가에는 민들레가 샛노란 꽃을 피워 올렸고 제비꽃도 뒤따라와서 동무가 되었다. 그들은 1학년  땅꼬마인 우리들을 닮아있었다. 그래서 더욱 친근했고 눈에 잘 띄었는지도 몰랐다. 봄 날 오후의 볕은 아이들 등에 따끈따끈 업혔다. 아이들은 봄볕을 가득 데리고 이마엔 땀방울을 매달고 전도고개를 넘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다리가 아팠다. 다리가 짧은 1학년 땅꼬마들의 십리 길은 멀고도 길었다.

# 고무줄과 오자미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1학년 여학생들은 제비들처럼 재재거리며 몰려다니곤 했다. 벚나무 아래서 돌공기를 하거나, 운동장 구석에 모여 고무줄뛰기와 오자미 놀이를 하면서도 치마 아래 드러나는 속팬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애기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런 놀이가 시시해졌다. 넘어야 하는 고무줄의 높이는 자꾸 깊어졌지만 내 짧은 다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또한 폴짝거릴 때 드러나는 속옷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또래에 비해 조숙하거나, 여학생의 자세에 대하여 입이 마르도록 가르치신 할매의 밥상머리 교육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를 고무줄뛰기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다. 할매 말씀이 아무리 매서워도 1학년 아이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긴 어려운 법이다. 어떤 무리에서건 유독 개구쟁이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반에도 그런 머스마가 있었다. 그 아이는 유독 내가 고무줄뛰기를 할 때마다 달려와서 확~ 걷어가곤 했는데, 어느 날 검은 고무줄을 묶은 이음새가 터지면서 내 허벅지에 피멍이 생겼다. 살갗이 부어올랐고 지렁이가 지나간 것처럼 시뻘건 줄이 생겼다. 아픔과 수치심으로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그 뒤부터 나는 고무줄놀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학생들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으면 다가가서 좋은 말로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코지를 통해 속마음을 드러냈다 (칠칠치 못한 짜쓱들~) 나는 그 남학생의 마음을 읽지 못했고 두고두고 미움을 쌓았다.   
고학년이 되면서도 몇몇의 선배나 또래 남학생들이 그런 종류의 관심을 표현했지만 결코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속짐작은 했지만, 그런 어리숙한 방법으로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는 유치함이라니. 순진한 시골뜨기의 진심이었어도 나는 아직 초등학교 여학생이었다. 그래도 오자미 놀이엔 동참했다. 사실 놀이보다 오자미 만드는 과정이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옷을 짓거나 이불호청을 꿰매고 남은 자투리 천은 재봉틀 옆 반짇고리에 담아두었다. 나는 그 중에 알록달록하고 예쁜 천을 골라 이웃집 순이 언니한테 갔다. 언니는 천을 맞대어 바느질을 촘촘히 여민 뒤에 조그만 주머니를 만들어 주었다. 그걸 작은 구멍만 남기고 뒤집으면 실밥은 안으로 숨어버리고 둥글고 길쭉한 모양이 되었다.  
언니는 그 타원형 주머니 속에 콩이나 팥, 왕겨나 보리쌀을 넣어주었다. 나는 그 중에 콩을 제일 선호했다. 콩은 다른 어떤 내용물보다 정확하게 멀리 나갔고 상대편 몸에 잘 맞았다. 나는 자주 엄마의 반짇고리를 뒤졌고 오자마 만들기에 빠졌다.  친구들도 내가 가지고 간 오자미를 좋아했다. 손끝이 야문 순이 언니의 정성이 오자미 한뜸 한뜸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이젠 할머니가 되었을까?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얼굴은 알아볼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언니가 만드신 오자미 최고였어요. 완전 짱!”

# 류만순 우리 할매   
‘나란 한 인간의 존재를 생성시켜 준 큰 품’ 내게 할매는 그런 분이셨다.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에 할매는 일본에서 생활하셨다. 어느 시점에 할매와 할배가 일본으로 가셨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돌아가셨으니 여쭤볼 기회를 영영 놓쳤다) 큰아들인 아버지를 낳자마자 일본으로 떠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버지가 33년생이시니 해방 되기 10여 년 전에 가셨던 듯싶다. 히로시마에서 사시는 동안 할매는 일본의 문화와 생활풍습을 부지런히 익히신 듯하다.일본생활 10여 년을 중간에 끝내고 귀국하신 것은 아마 할아버지의 취미생활(노름?) 때문이셨으리라.
석공 기술이 뛰어나셨던 할배는 일주일에 한 자루씩 돈을 벌어오셨고, 그 중 한 다발만 집에 남기고는 자루를 그대로 짊어지고 노름방으로 가시곤 했단다. 그 돈을 다 잃으면 집에 돌아오셔서 다시 석공 일을 하러 가셨다는 게다. (아이고, 아까버라! 재일교포 부자 할배로 떵떵거릴 유일한 기회를 그렇게 놓치시다뇨!)어느 집이나 유난을 떠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는 노름과 아편, 처첩질과 주폭일테고 요즘엔 몇 가지 중독이 더해졌다. 주식, 가상화폐, 복권, 컴게임, 경마, 카지노, 쇼핑 등을 들 수 있겠다.   
할매의 강력한 주장으로 광복되기 전에 두 분은 귀국하셨다. 히로시마에 사셨으니 그대로 계셨더라면 원폭의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전화위복은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인가? 할매의 일본살이 경험은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예의바름과 조신함(어렸을 때는 그랬겠지만 자라면서 나는 좀 변했다)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는 여성지위향상, 자의식, 당당함, 세련됨, 남녀유별, 원피스와 주름치마, 단발머리, 다소곳함, 친절함 등이다. 
50대에 과부가 되신 할매는 유난히 손주들을 아끼고 챙기며 사랑하셨다. 60대 초입에 막 들어선 나는 이제야 할매의 그 모든 언행들을 이해할 수 있다. 손주 중에서도 맏이인 나를 유난히 끼고 도셨던 그 각별함과 극성을 말이다.  어린 나는 할매의 그런 유별함이 싫었다. 친구들처럼 맘대로 뛰고 절고 들판을 쏘다니며 망아지처럼 놀고 싶었다. 그러나 할매는 내 목에 고삐를 단단히 매고 당기셨다. 여고생이 되어 마산으로 유학을 시작하고서는 비로소 할매의 감시와 감독에서 탈출했다. 시골 촌뜨기가 만난 마산 생활은 경이롭고 신났다. 나는 1학년 때부터 문예반에 가입하여 책과 원고지를 끼고 오후 수업을 빼먹곤 했다.  
돌이켜보면, 할매의 모든 것이 그립고 서럽다. 지금 할매와 마주하면 많은 얘길 나눌것 같다.
격변기의 일제강점기, 6.25전쟁, 새마을 운동, 민주화를 외치던 세상의 변화에 대하여, 그리고 한 여성의 삶과 질곡과 외로움과 사랑에 대하여.  
누구보다 꿋꿋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생을 살아오셨던, 삼종지도의 평생을 내게 온 몸으로 보여주셨던 류.만.순. 우리 할매의 삶을 경배한다.

# 봄소풍 
달착지근한 냄새가 돌담 넘어 골목을 휘감았다. 할매의 음식솜씨가 빛을 보는 때이기도 했다.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선생님께 뭔가를 대접하거나 마음을 전해드릴 유일한 기회가 소풍날이었다.  할매는 선생님의 점심 도시락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미리 준비해 둔 층층의 찬합은 깨끗이 씻어 봄볕에 고슬고슬 말려두었다.  
뒷곁 담장 밑에 통통하게 자란 머윗대를 베어 한 소큼 삶아 껍질을 벗긴 뒤에, 쓴맛을 뽑으려고 한동안 우려 두었다. 2센치쯤의 길이로 자른 뒤에 왜간장과 물엿과 다싯물과 정종을 넣어 졸이면 그 맛이 참 좋았다.  
일부는 멸치를 넣어 졸이기도 하고, 말린 호래기와 궁합을 맞추기도 했다. 고추장을 가미한 매콤한 맛의 졸임도, 우엉과 어묵을 결합한 쫄깃함도 특별했다.   
아침마다 닭장에서 꺼내서는 단지안에 차곡차곡 모아둔 껍질이 까칠가칠한 달걀을 삶고, 옆마을 점방에서 사 오신 칠성사이다 두 병에, 찬합까지 들려 소풍 길에 보내실 때 우리 할매 가슴은 뿌듯함으로 그득하고 내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선생님들도 우리 할매 음식솜씨를 두고두고 입에 올리셨다.
‘외경이가 영특한 것은 모두 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의 일본살이 경험이 손녀를 키우시네!’라며 침 발린 말씀도 곧잘 해 주셨다. 또한 학교에서 열리는 무슨 대회나 무슨 행사에는 항상 내 이름을 먼저 넣어주신 것도 할매의 그 내밀한 손맛에 대한 갚음도 일부는 있었으리라. 그나마 시골에서 말귀 알아들으시는 할매께 무용복이며, 발레복 따위를 맞춰 입어야 하니 돈을 내 달라, 무슨무슨 대회 참가의 이유며 당위성 따위를 설명하고 긍정적 평가를 받아내셨으리라.
또한 할매의 기대에, 그 깊은 정성에 보답하고자 하는, 내 지극한 효심이나 충성심도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어 나는 있는 힘껏 분발했으리라.  
무거운 도시락을 들고 십리길을 걷고 걸어 학교에 도착한 우리들은 또 줄을 맞춰 평돌바위로 되돌아 왔다. 옴마 밥을 갖다드리곤 하던 우리 고구마밭 아래 바닷가의 평평한 바위돌 넓적한 그 곳이 동해국민학교 소풍의 단골 장소였다. 
바윗돌 중간이 패여 있거나, 곳곳에 묘한 문양이 잡혀있었지만, 그 발자국이 중생대 공룡 발자국인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 곳은 ‘고성 공룡 발자국’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고고학적 유적지가 되었지만, 지금은 조선특구의 ‘**조선소’에 편입되어 추억의 장소로만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반별로 모여 손수건 돌리기를 하거나 보물찾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나는 몇몇 남학생들의 표적이 되어 내 뒤엔 손수건이 자주 놓였고, 달리기에 서툰 나는 술래가 되어 몇 바퀴를 빙빙 돌아야 했다. 그런 날 봄볕은 따끈하게 아이들의 어깨죽지에 내려앉았고, 비석치기의 네모난 돌멩이와 공기돌은 따끈따끈 데워지고 있었다.
양은도시락을 다 까먹은 아이들은 그 속에 든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릴 안고 봄볕에 고실고실 타고 있었다. 보물이 적힌 종이쪽지들은 죄다 어디에 숨겼는지, 선생님이 어젯밤에 야시가 나올지도 모르는 그 먼 산길을 걸어 평돌바위까지 오셔서 진짜로 종이보물을 숨겨 두신게 맞을지, 나는 그 사실을 가늠하느라 정작 보물쪽지 찾기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 시기에 나는 ‘괴도루팡’과 ‘셜록홈즈’에 흠뻑 빠져 있었으므로 추리력을 총동원하여 선생님의 발자국을 짚고 또 짚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지사지의 경험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평돌바위는 우리 집과 지척일 경도로 가까웠고 학교 근처에 살던 친구들은 도시락 가방을 메고 다시 십리를 투덜대며 걸어갔으니 말이다. 
형윤, 명두, 순임, 분두, 향숙아!
뉘들이 멀다고 징징대던 그 십리 길을 나랑 상선이랑 철구 점호 형식이는 9년간을 한결같이 가방 안에 양은도시락 딸랑거리며 걷고 또 걸어 다녔느니라.
그리하여 기초체력 튼튼하고 기초대사량 높은 몸으로 야물어져서 웬만큼 몸 쓰는 일을 해도 좀체로 몸살 안 나고 웬만큼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로 다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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