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달그락거릴 저녁 식탁에, 감사와 사랑과 웃음까지 얹어서 함께 먹어야지
이창수 (51년생 71세, 삼산면)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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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살아온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도 사람은 늙음으로 세월을 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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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린 날, 해명마을의 개구쟁이들 나는 삼산면 해명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조부님부터 농사를 지으셨고 부친은 4남 4녀를 낳아 다복한 가정을 꾸리셨다. 맏이는 일꾼이었고, 부모님의 기대 대상이었고, 효를 실천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등짐으로 지고 평생을 걸어가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나는 농어촌의 그 맏이로 태어난 것이다. 바다와 인접한 곳의 농토는 논보다는 밭이 많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농가가 몇 마지기의 논과 몇 뙈기의 밭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다독여야 했을 때 우리 집은 수십 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었다.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일꾼이 아랫방에 기거했고, 집안의 살림은 따뜻하고 폭신했다. 내 나이 8살, 삼오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이 되었다. 처음으로 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동네에 또래들이 열 명이 넘었다. 아침에 학교 갈 때면 돌담 너머 서로를 기다리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골목길을 벗어났다. 교정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서 있었다. 거무튀튀한 벚나무 둥치를 타고 개미들은 줄지어 오르내리고, 나는 다른 동네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뭉툭한 나무로 된 책상은 가운데 금을 그어 서로의 영역을 나누었고 걸상은 딱딱했다. 가끔은 튀어나온 못에 엉덩이가 찔리거나 옷이 긁혀 찢어지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은 즐겁고 신이 났다. 사월 하순 봄날의 학교 길은 푸르고 싱싱했다. 온 세상은 연둣빛 잎새들로 가득하고 삘기들이 봄의 안테나처럼 뾰족뾰족 솟았다. 아이들은 고 작고 여린 풀들을 찾아 산기슭까지 올랐다. 더러는 망개나무를 못 보고 휘젓다가 가시에 긁혀 피가 났다. 누군가는 끌티에 걸려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프단 소리 없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대궁이 부드럽고 순한 삘기들을 한 줌씩 뽑아들었다. 형들은 송구를 벗겨먹거나 찔레 순을 꺾어먹기도 했지만 저학년 땅꼬마들은 삘기나 아카시아 꽃송이를 입에 물고 단물을 빨아먹을 정도였다. 삘기 껍질을 차곡차곡 벗겨낸 뒤 연한 속잎을 입에 넣었다. 달착지근한 물이 나왔다. 조금 센 삘기는 몇 개를 모아 껌을 만들어 한참을 씹었다. 신작로를 지나 동네까지 걸어오는 동안 삘기껌은 가루가 되었고, 자갈돌은 아이들을 마중하듯 끊임없이 밟혔다. 집으로 오는 길, 그냥 걸을리가 없었다. 봄볕이 따끔거리며 등에 쏟아져도 재미있는 재작거리를 찾아 헤매는 아이들은 올챙이를 잡거나 논고둥을 잡느라 바짓단을 둥둥 걷어 올리고 개울가로 달려갔다. 동네 앞에 작은 섬이 있다. 그 섬은 우리 소유의 섬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선착장에 나가면 섬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기분이 들었다. 섬은 보고만 있어도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저 섬에 집을 짓고 색시랑 오순도순 살아볼까? 저 섬에 별장을 지을까? 바다를 보며 나는 상상력을 키웠다. 책에서 읽은 오만떼만 이야기를 섬에 풀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선창에 모여들었다. 멸치 어장막의 호래기 몇 마리를 몰래 집어서는 뱃속에 담고 윗도리를 홀라당 벗어제끼고는 하나, 둘 호령소리 요란하게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누가 더 멀리, 빨리 헤엄쳐 가는지, 자맥질로 더 오래 숨을 참는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지, 매번 하는 놀이였다. 머스마들은 물에 잔뜩 젖어 반질반질해진 엉덩이를 치켜든 채 쉬지 않고 퐁당거렸다. 무자맥질에 지친 아이들은 바닷 속으로 내려가 바닷말(몰)을 뽑아와 뿌리의 얇은 표피를 빨아먹었다. 갈대처럼 생긴 바닷말은 길고 부드러운 뿌리를 뻘밭에 박은 채 물결따라 출렁였다. 그 모습이 여자의 풀어헤친 머릿결처럼 보일 때도 있었으므로, 방심하다가는 수초사이에 발이 빠져 혼비백산했다. 수초 속에는 해삼이며 미더덕도 숨어있었다. 손과 발이 재빠른 아이들은 그들을 찾아내 혁혁한 전과를 자랑하며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간간짭쪼롬한 바닷물에서 건져낸 해산물들은 소금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고, 그런 날 저녁이면 아이들은 한 바가지의 맹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갈증에 시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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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에서 사모관대에 족두리 쓰고 전통혼례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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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운의 푸른 꿈을 고향에 묻다 동생들은 도시로 떠났지만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에 머물렀다. 농사를 짓고 작은 어장도 꾸미면서 젊음과 노동을 연마하며 지냈다. 동네에 장둘자란 이름의 어여쁜 처자가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슬쩍슬쩍 눈길을 주며 관심을 보였다. 혼인해도 당당할 때가 되면 나는 둘자씨를 업고 오리라. 세상에 둘자씨보다 더 예쁘고 음전하고 조용한 처자는 없을테니. 그런데 사단이 났다. 둘자씨의 사촌언니와 내 사촌 형님이 결혼을 한 것이다. 연애를 먼저 한 것도 우리 둘이고, 서로 더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것도 우리 둘인데 집안에서는 절대로 ‘겹사돈’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깊은 결박은 없을지니, 둘자양과 나는 어른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여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 내 삼촌 한 분이 일본에 계셨다. 고향에 다니러 귀국하시면서 캐논 카메라 한 대를 내 몫으로 사다 주셨다. 그러면서 결혼식은 마을 회관에서 올리는 것이 어떠냐, 라는 의견을 내셨다. 우리는 삼촌의 뜻을 쫓아 혼례 준비를 서둘렀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고, 지짐을 굽고, 떡을 하고, 국수를 삶았다.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온 동네를 휘감아 돌듯이, 사랑하는 그녀와 한집에 살게 된 기쁨은 크고도 넘쳤다. 결혼하고 4년이 지날 즈음, 양식업 바람이 해명마을까지 불어왔다. 나는 아내를 설득하여 굴(석화)을 2줄 넣었다. 마을 어촌계가 형성되고, 바다 어장은 어촌계가 주인이므로 뜻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서로 협치의 방법으로 굴어장을 만든 것이다. 여름에 종패를 넣고 늦가을부터 굴을 까서 수협에 넣었다. 김장철이 되면 굴값이 좋았다. 나는 배를 타고 나가서 굴을 걷어왔고 아내는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굴을 깠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손이 재빠른 아내는 남들보다 굴을 많이 깠고, 우리 어장의 굴은 품질이 좋아서 값을 후하게 받았다. 김장철이 지나고 설까지 쉼없는 노동으로 힘은 들었지만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고, 부모님을 공양하고, 서로 사랑했다. 두 아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이 자라고 대학엘 가고 청년이 되는 동안 살림도 조금씩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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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비 채모를 넣어 키우는 그물망을 잡으면 천상 어부가 되어 마음이 먼저 물결음을 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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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년의 삶을 파고에 띄우다 큰아들은 진주산업대를 졸업하고 어장을 하겠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반듯한 화이트칼라의 길을 걷길 바랐건만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어장을 하겠다는데 말릴 방법이 없었다. 아들의 합류로 어장을 넓혔다. 우리 어장을 30줄까지 늘였고, 남의 어장도 임대하여 4헥타까지 영역을 넓혔다. 일이 많아졌고, 매출은 늘었지만 그만큼 경비 지출도 늘어났다. 해마다 가족이 합심하여 굴을 키우고 채취하고 까서 수협을 통하여 판매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변화의 기류를 따르게 되어있다. 바다 사업 또한 마찬가지다. 동네에 가리비 양식 바람이 불었다. 가리비는 패류 중에서 맛과 영양이 뛰어난 조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손이 덜 간다는 점이다. 종패를 넣는 과정의 일손은 여느 패류와 다름이 없을지라도 수확하여 껍질째 바로 판매하는 잇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홍합이나 굴처럼 껍질과 따로 분리하지 않아도 되므로 바다에서 건져올림과 동시에 판매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마저도 귀찮으면 원줄 그대로 판매해 버릴 수도 있었으므로 어부들의 구미가 당기는 양식업이었다. 7~8년 전부터 우리도 가리비 양식을 시작했다. 동네의 젊은 박사장이 원조였는데 가리비 양식의 정보를 교환하고 시설물과 재료들을 공동 구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가리비 양식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고성군 자란만은 플랑크톤의 보고다. 물결은 잔잔하고 바다는 넓으면서도 안온하다. 자란만은 양식업을 하기에 적합한 지형이므로 고성군내에서도 여러 가지 양식업이 발달한 곳이다. 이 곳에서 키운 가리비는 그 맛을 일등으로 친다. 어느 지역보다 맛 좋은 가리비의 생산지로 인기가 높아지면서 ‘고성군가리비 축제’의 주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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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둘자씨와 많이도 여행 다녔는데, 돌이켜보니 추억과 사진이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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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이 되어 맞는 노을빛 늙으면 추억을 묻고 산다 했던가. 일흔이 넘으면서 내 삶을 되짚게 된다. 청년 때 삼촌이 사다주신 캐논 카메라를 메고 많은 곳을 다녔다. 동네 사람들과, 갑장들과, 어촌계원들과, 각종 모임의 지인들과 여행을 자주 떠났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기에 바빴다. 여행을 다녀와서 보면 내 사진은 몇 장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집사람 사진은 수북히 쌓였다. 가끔 앨범을 들춰볼 때가 있다. 집사람이 차곡차곡 정리한 앨범 속에 우리 부부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국은 대여섯번 다녀왔고, 일본과 태국, 베트남과 미얀마까지 두루두루 다녔다. 그 나라의 삶과 생활상을 눈여겨보고, 향토 음식을 맛보고 노래를 들으며 춤을 보았다. 아이들은 부모의 꿈이며 희망이었고, 자식들을 키우며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희노애락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리라. 큰 아들이 늦게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다섯 살이 된 손녀가 예쁘기로 치면 무슨 꽃에 비하랴. 내 폰과 집사람의 휴대폰 배경은 손주 나영이다. 유치원에 가는 손녀가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배꼽 인사를 하면 내 눈가엔 웃음꽃이 만발한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할머니, 배고파요.” 하면 집사람은 열일을 제치고 나영이의 간식을 챙긴다. 자식이란 그런 존재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은 부모님 면전에서 어르고 업으며 맘껏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지만 손주는 다르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예쁨을 칭찬하고 사랑을 주게 된다. 큰 아들 내외가 금슬 좋게 알콩달콩 나영이를 잘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 부부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지원하고 격려할 것이다. 작은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찰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가를 이뤄 잘 살아가고 있으니 고맙고 감사하다. 가족의 삶이 온화하고 따순 것을 보면 참으로 거룩하다. 어디 사람이 출세하고 세도를 누리고 재벌이 되어야 거룩하던가? 평온한 일상의 나날 속에서 건강하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사는 것이 제일로 거룩한 삶인 것을. 부지런한 아내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이웃 동네에 굴까러 갔다. 평생을 굴을 까고 종패를 부치며 살아왔으니 쉼조차 아내 몫이 아니었던 것일까? 나영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마을 앞에 나가서 손녀를 챙겨야겠다. 노을빛이 슬핏 물들기 시작하면 아내와 큰 아들 내외도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다섯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달그락거릴 저녁 식탁에, 감사와 사랑과 웃음까지 얹어서 함께 먹어야지. 그나저나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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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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