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대나무처럼, 선산 지키는 굽은 나무처럼, 땅을 지키는 지킴이처럼 고향이란 대지에 그림 그리며 흙과 사람을 사랑하리라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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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풍곽씨 충익공파, 30대손, 永자항렬, 근영이다. 종자만자 부친의 5남 4녀 중 셋째로 1954년 말띠 해 정월 초하룻날에 태어났다. ‘땅부자는 일부자’ 이 말을 증명이나 하듯 우리 집에는 일이 참 많았다. 머슴이 셋이나 있었지만 저마다의 할 일이 달랐고, 나는 어릴 때부터 부친을 뒤따르며 농사일을 익혔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도일하시어 부지런히 일하셨고 얼마간의 자금을 저축하여 귀향한 뒤에 고향의 전답을 마련하셨다고 들었다. 나는 셋째로 태어나 있는 듯 없는 듯한 자식이 될 뻔도 했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형이 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부산 소재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형들이 떠난 빈 자리의 노동이 내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집 앞에 우뚝한 앞산이 우리 집을 내려다보았고 우리는 그 산을 올려다보며 살았다. 아침 일찍 소들을 몰고 산으로 갔다. 소뿔에 끈을 둘둘 말아 풀어놓으면 소들은 하루종일 풀을 뜯으며 놀았다. 학교 다녀와서 책보따리를 던져놓고 산에 오르면 노을빛 여무는 햇살이 따끈따끈 등에 업히곤 했다. 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드러눕거나 느긋이 선 자세로 우리를 맞았다. 어쩌다 동무들을 떠나 엉뚱한 곳으로 사라진 황소를 찾아 온 동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온산을 헤매기도 했다. 우리 집 소들은 모이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능선이 흐르는 지점, 석이네 산소 근처에 몰려 있었고 그들은 모두 피를 나눈 형제나 자매들이 대부분이었다. 핏줄이 땡기는 일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나는 어릴때부터 조부님 방에서 기거했다. 보통 농촌의 노인들은 초저녁에 주무시고 새벽녘에 기침하시는 생활 습관으로 나 또한 조부님의 일상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동창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이면 나는 잠에서 깼다. 조부님이 싸릿대로 안마당에서 바깥마당을 향해 비질을 하시면 나는 뒤따르며 조리로 물을 뿌렸다. 흙마당에 싸릿대의 비질 자국이 선명히 드러났다. 조부님은 나에게 이르셨다. ‘네가 살아가는 자리에도 이렇게 선연한 자국을 남기며 스스로를 비질하도록 하라’ 그 때는 정확한 내용도 몰랐지만 추상같은 조부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더욱 언행을 조심하는 아이가 되었다. 부친과 일꾼들은 소꼴을 베러 들판으로 나갔고 조부님은 가마솥에 소죽을 끓이셨다. 나도 옆에서 볏단을 조심스레 작두에 밀어 넣어 자르기도 하고 가끔은 풍로를 돌려 불을 피우기도 했다. 모든 일은 절도 있고 순서에 맞게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점심 무렵이면 걸인들이 한둘 우리 집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다들 가난하고 배고팠으며 하루에 한 끼조차 챙겨먹지 못하는 이웃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조부님은 그들을 불러들였다. 우리가 흔히 TV에서 보던 박바가지에 밥 한 주걱을 떠 넣는 그런 풍경이 아닌, 개다리소반에 반찬과 국그릇을 차리고 고봉으로 떠 올린 밥그릇에는 따끈따끈 김이 피어올랐다. 걸인들은 밥 한 끼를 얻어먹고는 뒤꼍의 장작을 패 주기도 했고, 볏짚을 썰어서 두엄 더미 옆에 가득 쌓아주는 잡일도 거들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도와주는 걸인들이 고마웠고 나는 조부님 옆에서 그들이 우리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는 걸 놓치지 않고 불러들였다. 조부님은 내게 교과서를 가져오라 이르시며 앞에서 책을 읽으라 하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차분히 책을 읽었다. 조부님의 눈길이 내 무릎과 어깨를 지나, 내가 살아갈 미래를 훤히 보고 계셨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지금은 그 눈길이 내 삶의 자국마다 머무르며 바른 길, 정직한 길, 옳은 길, 나눔의 길을 일러주신 것임을 알겠다. 나는 어릴 때의 습관과 인성이 평생을 좌우하는 길잡이가 됨을 믿는다. 어떻게 가정 교육을 받아 어떤 자세로 삶을 시작하느냐가 본인의 인생 좌표가 되는 것임을 안다. 조부님의 인생 철학과 이웃을 바라보는 눈길은 내게 큰 가르침이 되어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 준 것임을.
조모님은 맘 따뜻하고 웃음이 선한 분이셨다. 지엄하신 조부님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삼종지도의 삶을 사셨으나 이웃들에게 인자하고 베풂에 인색함이 없으셨다. 우리 집에 찾아오던 걸인들은 장정들만이 아니라 아녀자들도 있었다. 헤진 아이의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혀주었고 터진 솔기마다 정성들여 바느질을 해 주었으며, 손주들의 머리를 손질하던 가위로 이발까지 해 주셨다. 할머니를 따라 소쿠리를 들고 텃밭에 나간 적이 있었다. 식구들이 많았기에 남새밭에는 온갖 야채들을 키웠고 철따라 뜯는 채소들의 이름도 저마다 달랐다. 그 날은 부추를 베어낸 자리에 재를 뿌리는 날이었다. 삼태기에 재를 가득히 들고 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재를 온통 날렸고 할머니는 온 몸을 재로 뒤집어 쓰셨다. “아가, 나는 이제 더 클 키도 없는데 와 내한테 뿌리노, 정구지들이 배고푸겠다. 우짜노?” 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날 할머님이 내 입에 넣어주신 까마중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까맣게 익은 까마중에서는 달콤한 즙이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그 까마중을 걸인 아이들에게도 나눠주셨다. 조모님과 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걸인들이 와서 장례를 도와주었다. 삽으로 묘자리를 파고 흙을 고르고 상여를 메고 산소를 다듬던 그 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걸인들에게도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내셨던 할머님의 따뜻한 맘과 존중의 자세는 오래토록 내 삶을 배경이 되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까지 우리 집 밀소(먹일소)는 인기였다. 밀소로 나간 소들의 ‘코뚜레를 다 모으면 한 바지게가 넘을 것’이란 소문이 돌 정도로 우리집 소는 각처로 나갔다. 밀소란, 송아지를 데려가서 잘 먹여 어미소로 키운 뒤 그 어미소가 낳은 송아지는 키운 집의 몫이 되고, 어미소는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경제방법을 말한다. 그 시절, 집집마다 아이들은 많았고 두어 마리의 소를 키울 정도의 노동력은 있었기에 밀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부친은 키울 집의 형편은 가리지 않고 원하는 집에는 누구네라도 밀소를 내 주었다. 가끔은 병이 들어 죽기도 했고, 어떤 집은 소를 돌보지 않아 말라깽이를 만들기도 했지만 탓하지 않고 키운 공덕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렇게 얻은 송아지를 어미소로 키워 자식을 공부시킨 집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대학 졸업은 우골탑으로 얻은 기념비라 했을까? 부친은 천성이 부지런하셨고 남다른 의식의 소유자셨다. 농촌에 살아도 배워야 하고, 그 배움으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라 이르셨다. 내 두 형이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저마다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당당할 수 있음도 부친의 자유로운 가르침,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아버지는 내 삶의 지표며 나침판이다.
내 어머니의 손은 물 마를 새가 없었다. 9남매까지 낳은 자식 복이야 그렇다쳐도 조부모님과 머슴 셋의 식사수발이며 빨래로 얼마나 허리가 휘셨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명망가의 여식이라 하셨다. 명민하고 영리하셨다는 말씀을 외가 친척들에게 여러차례 들은 적이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 집에 모이시면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을 읽어드리곤 하셨다. 그런 분이시니 사물에 대한 이치가 분명하고 사리분별도 확실하셨다. 부지런하심을 따지면 인근에 따라올 자가 없었다. 내 어머니는 새벽부터 한 밤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셨다. 부엌에서 불을 지피거나, 장독대에서 된장을 뜨시거나, 고방에서 술을 빚으시거나, 마루에서 다듬이질을 하시던 모습으로 언제나 내 눈에 담겨 계신다. 특히 정원 초하룻날 태어난 나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생일상을 받기 어려웠다. 그런 셋째를 위해 어머님은 새벽 4시에 미역국과 조기를 구우셨고 나를 깨워 새벽밥을 먹이셨다. 설맞이 차례상에 올릴 다양한 음식 중 몇 가지를 골라 생일 상 위에 얹고 삼신할미께 비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찬물로 목욕하고 치성을 드리시던 내 어머니, 장독대 오래된 단지 위에는 어머니가 올린 정화수가 하루도 빠짐없이 달빛과 별빛을 담고 있었다.
나는 상리초등학교와 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해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작은아버지댁이 미남 로타리에 있었고 35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민동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을 했다. 통학버스 안에서 나는 영어단어를 외웠고 국어 교과서의 시를 암송했다. 부산은 서울과는 또 다르게 학구열이 대단했고 서면에 위치한 경남학원은 명문학원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주경야독하며 공부에 매진했으나 부모님의 휘어진 허리가 마음에 밟혀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우리 집에는 나를 빼고도 8개의 책보따리가 부모님의 등짐으로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 고성군 상리면에는 4H(지.덕.노.체) 운동이 막 불붙기 시작했는지 요란한 구호와 초록색 클로버가 나부끼지 시작했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고 무너질 내가 아니었다. 마침 우리 집 농사일을 거들던 머슴 둘은 각자의 농토를 마련하여 떠났고, 한 분 계시던 아재는 연세가 있으셔서 일 도움에 소홀하셨다. 아침이면 나는 아재집 마당에서 읊조렸다. “아재, 기침 하셨심미꺼, 오늘 못자리 한다꼬 기다리고 있심미더.” 그런 기별을 몇 차례 하고나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말리라는 오기가 생겼다.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배우다가 손에 익을 무렵 군입대를 하게 되었고 제대한 78년 6월 3일부터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그 때 큰형은 중앙대를 졸업할 즈음이었고 작은 형도 대학 재학 중이었다. 땅부자 아버지도 해마다 한두 마지기의 땅을 팔아가며 자식들 공부 시키느라 힘들어 하셨다. 나는 부지런히 농사짓고 소를 먹이며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그러는 중 4H 대회에서 경남지역 대상을 받아 경운기를 한 대 마련했다. 소와 곡괭이와 삽으로 하던 일을 경운기로 처리하니 신이 났다. 온 동네 일감을 받아 논밭을 갈고 볏단을 날랐다. 농사와 축산 외의 수입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88년부터 경종농업 지정을 받았다. 경종농업이란 농작물을 생산 재배하고 이를 이용해 가축을 기르는 복합영농의 방법이다. 800만원을 지원 받아 농토를 더 구매하고 소도 몇 마리 샀다. 농업경영인으로 활발히 움직이며 농민들의 소득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 고성군회장을 거쳐 경상남도회장까지 맡아서 활동하게 되었다.
시골의 생활이 다들 부지런함을 밑바탕에 깔아야 하겠지만 우리 식구들은 유독 부지런히 움직였다. 내 어머니는 아홉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등이 휘고 허리가 굽고 손 마디마디 굳은 살이 박혔다. 겨울에는 내복 한 벌 사 입지 않으셨고, 자식들의 엉덩이가 닳아빠진 내복의 다리 부분을 잘라 겉옷과 겹쳐 기우신 뒤에 내복 입은 표시를 내셨다는 말씀을 후일담으로 들었다. 어릴 때는 책을 좋아하셨지만, 자식들을 낳아 키우며 농사일과 가사 일에 바쁘신 어머니가 제일 즐겨하셨던 일은 남새(채소)를 장만하시어 고성 장날 내다 파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채소 기르는 솜씨는 장인의 실력이셨는데 남들보다 열흘 정도 먼저 키우고 먼저 뜯어서 장에 나가는 슬기로운 방법을 선택하셨다. 농작물은 언제 수확하느냐에 따라 값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우스 재배가 힘들던 시절, 설 무렵이면 시금치와 나물거리가 비쌌다. 어머니는 겨울에 씨를 뿌린 야채들은 짚을 덮어 보온에 신경 쓰는 방법으로 남들보다 먼저 장에 내다 파셨고, 여름 땡볕이나 장마철에 녹아내리는 열무며 상추는 물을 뿌리거나 모래밭에 심어 물빠짐이 좋게 하는 지혜로 채소들을 키우셨다. 공부를 계속하여 연구하고 실험하여 그 분야의 박사가 되기도 하고, 제품을 생산하고 조련하는 일로 명장이 되는 것처럼, 내 어머니는 경험과 체험으로 농사일의 달인이 되셨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자신의 못다한 배움의 한을 자식들의 책가방에 싣고, 고된 노동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신 내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그립고 애틋하다. 며칠 뒤 기일에는 사진을 올려놓고, 천천히 잔을 올리고 싶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막걸리 톡톡히 따르며 애달픈 맘 전하고 싶다.
집사람 ‘박현희’한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한다. 소처럼 묵묵히 농사짓고, 바깥 활동에 열심인 내게 시집와서 평생 애쓰며 산 사람이다. 중신아비의 사탕발림에 속아, 혼인하면 도시에 나가 공장에라도 가겠다는 대답에 속아, 상리면 가동으로 시집온 뒤로 맏며느리 역할까지 맡아 주어서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나의 바깥 활동을 군말없이 밀어주었고, 아흔 넘도록 장수를 누리신 어머니과 한량없이 친하게 지낸 사람이다. 노래교실에서 배워온 가사를 시어머니께 가르쳐 드린 사람이다. 고부간에 마주앉아 막걸리 한 잔씩 마시며 부르던 ‘콩밭 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칠갑산은 두 사람의 18번 이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름주고 갈아엎고 다듬는 만큼 되돌려준다. 그 땅에 수많은 농작물을 심으며 나는 내 인생과 삶을 함께 심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몸 사리지 않고 적극 나섰으며, 거짓으로 이웃을 선동하지도 이끌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왔으니 거짓과 가식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 애시당초 배우고 익힌 사람이다. 지식은 학업을 통하여 배울 수 있지만 삶의 가치와 의미는 부모에게서 내림으로 배우며 스스로 깨달아 나간다고 믿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땅과 내 부모님께 배웠다. 땅과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준 정직과 나눔과 성실과 근면, 그리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며 남은 생을 살아 갈 것이다. 또한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능가하는, 더 큰 의미 있음이란 사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땅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내게 남겨진 최대의 과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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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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